brunch

#1-38. 빈자리 채우기

가득 담아지지 않는 것들

by moonrightsea

오랜만에 얼굴을 본 한팀장은 부쩍 얼굴이 수척해져 있었다.

갑자기 강원도로 오고 있다는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지만 막상 그를 보자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 술 한잔 할래?"

그렇게 그와 1차로 집 근처 치킨집에서 맥주를 한잔하고 가볍게 근황 이야기를 시작한 우리는 다시 우리 집으로 자리를 옮겼고 정우는 인사를 건네고는 야간 근무로 자리를 비웠다.


같이 있던 정우가 자리를 비우자 한팀장은 비로소 조금은 긴장을 푼 듯 그렇게 맥주에 소주를 말아서 한잔 걸쳤다.

" 이제 말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선화 씨는 잘 지내?"


" 선화 씨랑 같이 있는 줄 어떻게 안 거야?"

" 뭐 여기는 동네가 좁아서... 얼마 전에 선화 씨가 서울에 갔다고 했을 때 알았지. 예전에 와이프랑은 헤어진 거야?"


" 응. "




짧게 대답을 한 그는 이내 다시 술을 한잔 들이켰다. 그리고는

" 내 아이가 아니더라고. 뭐 소송도 이제야 마무리되었고."


" 어쩌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 음... 사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기도 했고. 좀 후련하긴 한데 막상 차를 몰고 나왔는데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더라고. "


" 잘 왔어. 뭐. 일이야. 그럴 수 있으니. 근데 뭐가 고마웠다는 거야? 너한테 내가 도움 받은 게 더 많은 거 같은데. "

" 왜 그때 네가 그랬잖아? 내가 초식남이라고... 사실 그 말이 내게는 결정적이었거든. "

" 그건 무슨 말이야?"


" 아. 이혼할 때. 예전 와이프랑 말이야. 전처랑 사이. 사실은 신혼여행에서 말고는 거의 한 달에 한번 정도밖에 관계를 안 해 왔었거든. 임신 때문에. "

" 그런데?"


" 선화 씨가 연락이 왔을 때 내가 한참 진급도 하고 해서 그전에는 회사일로 바빠서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는데 그때도 선화 씨가 연락이 와서 온통 선화 씨에게 신경을 쓰느라 미쳐 내가 모르고 있었어. 아내의 친정에서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던 이유도. 그러려고 했던 이유가 그냥 혼기가 찬 거라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집에서 반대하는 사람과 교제 중이었었나 봐. 결혼하고도 계속 만나왔었는데 나만 몰랐던 거지. 그런데 막상 내가 이혼을 하려고 하니 재산도 그렇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그 둘 사이에 애도 생겨서 내 아이가 되어야 일정 부분 재산에도 유리하니까. 계속 그렇게 끌어 왔던 건데. 선화 씨 문제로 법원에 가게 되면서 친자 확인하고 하면서 같이 알게 된 거지. "




그는 이내 술을 한잔 더 들이켰다.

" 무섭더라. 사람이란 게.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고. 난 그저 선화 씨 문제로 내가 잘못을 전적으로 해서 헤어지는 원인이 나라고만 믿어서 미안한 마음이 더 컸는데 막상을 이혼을 하려고 재산 분할을 들어가니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지도 않았는데 내가 받을 예정인 재산까지 달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그동안 내가 통화한 내역에 너랑 통화한 내역, 선화 씨 만난 거 내 회사 업무 온갖 걸로 협박을 헤대는데 회장님 비서랑 변호사가 와서 하는 말이 그냥 준비한 것 같지 않다고 기다리라 더라고. 그래서 알게 되었지. "


아 결국 내가 엃히니 이야기가 커졌던 거구나. 그래서 태호가 움직였던 거구나.


" 뭐 사실 회장님 귀에까지 사안이 들어가고 보니 정말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어서 회사도 그만두고 싶었는데 의외로 회장님 변호사님이 움직이니 그렇게 끌어오던 일들이 순식간에 해결이 되더라고. 합의도 그냥 내가 주려고 했던 신혼 때 집으로 끝났고. 그래서 일은 잘 마무리되었는데... 마음을 둘 곳이 없더라고. 선화 씨 볼 면목도 없고. 적어도 내가 결혼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선택했던 배우자였는데 그렇게 바닥을 보고 나니 사람도 두렵고... 생각나는 게 너밖에 없었어. 후훗. "


"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지? 고맙네. 친구. "

" 그렇게 생각해 줘서 내가 고마워. "

나는 그의 잔과 내 술잔에 술을 채운 후 같이 한잔을 했다.


" 선화 씨랑은 그럼 이제 계속 같이 사는 거겠네?"

" 선화 씨는 내가 구해줬던 집에서 지냈고 나는 소송이 마무리될 때까지 오피스텔에서 지냈지. 가끔 재우 얼굴 보러 갔고. 이제는 소송도 마무리돼서 같이 지내야지. "


나는 술잔을 바라봤다.

" 시간이 꽤나 지났는데 괜찮겠어?"

" 여전히 난 선화 씨가 좋고. 선화 씨도 그 긴 소송을 하는 동안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응원해 줬으니까. 많이 의지가 되어 좋았어. 한편으로는 많이 미안하기도 했고. "




" 오늘 여기 온다고 말은 했어?"

" 당연히 말해야지. 너한테 온다니까. 자기는 안 오려고 하더라고. 볼 면목이 없다고. "


" 다음에는 같이 와. 재우 잘 큰지도 궁금하네. "

" 내가 싫지 않아? 다시는 친구로도 안 본다고 했잖아."


" 뭐. 내가 그다지 친구가 없다 보니 말이야. 이렇게 친구랍시고 찾아와 주니 고맙기도 하네. 한잔 해."

" 음.. 여기 회장님 다녀가셨지?"


" 응. 알고 있었어?"

" 응. 네 소식 물어보셔서 정영이 일 지난번에 통화하면서 네가 말한 거 내가 말했었거든. 네가 찾지 말라고 했다고. 미안해."


" 뭐. 그게 네 일이니 별 수 있니. 사람일이란 게 때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으니 이해해. 너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거고. 아무튼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다. 부모님은 괜찮으셔? 충격이 크셨겠다. 장남이라."


" 아버지께서 워낙 전처를 예뻐하셨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그 사람도 우리 집에 정말 잘했거든. 내가 바빠도 혼자 집에 가 보고 어른 들게 자주 연락도 드렸었고 근데 그랬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만나면서 그랬으니 더 충격이 크셨던 거지. 무엇보다 손주인줄 알았던 아이는 손주가 아니고 다른 아이가 갑자기 손주가 되어서... 한동안은 아버지께서 실망감에 말씀도 안 하셨었어. "


" 어른들 마음도 많이 힘드셨겠구나. "


"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고. 그 큰 회사 하나 감당하고 쓰러져 가는 거 건사하는 것보다 내 가정을 지키고 건사하는 게 더 힘들다고. 가장이 된다는 게 그 책임감과 무게감이 얼마나 큰 건데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냐고. 그 말을 듣는데 너무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 "




나는 그런 한팀장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자 그가

"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늦게라도 잘못을 바로 잡아서 다행이라고 하시면서 돈이며 행복한 가정이며 모두 가질 수 있는 건 없다시며 마음도 내려놓고 항상 베풀며 지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이번에 아버지께서도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시고 한부모 장학재단 설립하시고 인생을 나 때문에 달리 보시게 되셨다네. "

" 아버지께서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구나. 좋은 본을 보고 배우는 기회가 된 거네. "


" 뭐 나야 원래 아버지 재산에 미련은 크게 없었어. 힘들게 자수 성가하신 걸 아니까. 그 기업이 쓰러지면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앉게 되니까 그걸 막으려고 발버둥 치고 그걸 도우려 한 것뿐이었으니까. 근데 이번 기회에 또 한 번 알게 되었지. 무엇이 중요한 지도."


" 응? 뭐가 중요한데?"

" 나 자신?"

" 뭐야. 기껏 깨달은 게 그거야?"

" 인생 뭐 있어? 내 그릇만큼 사는 거지. 딱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그렇게 사는 거. 나는 아버지만큼 대인배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영을 할 자질도 못되고 겨우 내 가정하나 꾸리기도 힘들어하는데 이제야 생긴 가정을 돌보고 내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게 그게 행복이지. 그것도 어디까지나 내가 행복해야 가능한 일이고. 그걸 알게 된 거지. 내가 불행한데 다른 사람 행복을 위해 견뎌 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 어이구. 아직 철이 덜 들었구먼. 애 키워봐라. 그게 말처럼 쉬운지."

" 어쭈. 애 제법 다 키워놨다고 어른 인척 하네."


" 그래. 접수. 인정."

" 헐. 어이없네. "

그렇게 웃으며 우리는 또다시 한잔 하며 술자리를 마무리했다. 그에게 정영의 방으로 안내하며


"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방이야. 비록 호텔방보다는 못하지만 네게 편안한 잠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어. 마음 편히 쉬어."

" 고마워. 잘 자. "




겉으로 보면 마냥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만 같은 그들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걱정이 있고 남들에게 말 못 할 사정이란 게 있다.


그게 사는 모습.


때로는 행복이란 게 어떤 것인지 채 뭐라 정의 내릴 수는 없는 대도 우리는 마냥 무엇에 홀린 것 마냥 그것을 잃으면 안 될 것 마냥 그렇게 허공을 향해 종종거리며 쫒아서 나아가고 있다.


내가 가진 행복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그것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을 지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아끼고 소중히 다룰 줄 아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


그것이 행복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따라 정영이 더 그리운 날.


아침에 눈을 뜨자 새벽같이 일어나 장에 가서 생선을 사 와서는 시원하게 해장국을 끓였다.

마침 퇴근하고 들어오는 정우에게 입맞춤을 하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주방에서 반찬을 마저 요리하고 그렇게 식탁에 놓는데 기지개를 켜며 한팀장이 나왔다.


" 우와 이게 다 뭐야? 이걸 이 아침에 다 차린 거야?"


" 너 와서 내가 특별히 좀 신경 썼지. 우리는 이렇게 거창하게 아침을 먹지는 않아. 어서 앉아. 여보 나와요. "

" 아 형님 퇴근하셨습니까?"


" 아 일어났어요? 어서 앉아요. "

그렇게 아침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데 한팀장이 해장국을 한 입 입안에 넣더니,

" 이야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네? 부러운데요?"




" 이 사람 주부경력이 몇 년 차인데요. 알고 보면 말없이 척척 잘합니다. "

" 아 항상 회사에서 일만 열심히 하는 모습만 봤지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놀랍네요. 이야. 감동인데? 정대리?"

" 웬일로 정대리레?"

" 크큭. 그럼 앞으로 연수라고 부를까?"


" 그건 안돼. 그냥 정 과장이라고 불러. 이제 나도 나름 진급했다고. "

" 알았어. 정 과장. 아 같이 근무했으면 좋았을 텐데. 너 없으니 요즘 너무 심심하다. "

이것 저것 반찬을 막 먹더니 이내 국에 밥을 말아서 먹으며 한팀장은 말했다.


" 바쁜 사람이 엄살은 어서 먹고 올라가. 주말이라 차막혀."

" 그래야지. "


한팀장을 배웅하고 집으로 들어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내가 소파에 늘어지자 정우가 내 품으로 파고들어 허리를 감쌌다.


" 당신 고생했네. 그래도 서울에서 잘 살았구나? 친구도 사귀고. "

" 그렇지? 바람 안 나서 다행이지?"


" 뭐야. 둘이 바람날 사이는 아니던데?"

" 뭐 저 정도면 멋지잖아? 얼굴 잘생겨. 매너 좋아. 집안 좋아. 내가 마음만 달리 먹었음... 어디..."


" 퍽이나. 그리 만만한 한팀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신이 그리 막가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러며 정우는 나를 들어 그의 배 위에 올렸다.




" 어디 보자. "

그러며 고개를 요리조리돌려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내 얼굴을 끌어당겨 볼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 왜 이래요. 다 큰 어른을 애 취급하고. "


" 가만히 있어봐. 다 크기는. 내 눈에는 아직도 처음 봤던 그 20대 때 모습 그대로인데."


" 눈이 삐었구먼. 이리도 피부도 쳐지고 뱃살도 나오고 그런데 어딜 봐서 20대 모습 그대로야. "

그렇게 말하며 내가 배를 움켜쥐자 그가 그런 내 배를 한 움큼 같이 움켜쥐었다.


" 오 그러고 보니 여기 타이어 있긴 하네. 하하."

" 어쭈. 이 손 놔요. 아무리 그래도. 어디 배를 함부로 타이어 취급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탁 쳤고 그러자 그가 연신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 그래도 당신 이 뱃살이 온몸을 뒤덮어도 예뻐. 내 눈에는. 그럼 된 거잖아. 안 그래?"


그의 다정한 눈빛.

세월이 지나도 나를 보는 그 초롱초롱한 다정한 눈빛은 어떻게 변함이 없을까.


그 마음에 나는 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그 눈빛이 조금이라도 달라 보였다면 나는 아마도 다른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세월이 한참이 지나도 내게 한결같은 그 눈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 당신 눈이 참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안 변할까?"




" 내 눈? 내 눈이 왜?"

" 한결 같잖아. 나만 바라보면 반짝반짝 빛이 나면서... 음 뭐랄까. 지긋히 바라보는 그 다정한 눈빛. 마치 사랑스러운 강아지 바라보는 눈빛?"


" 그걸 이제야 안 거야? 항상 그랬는데? 당신 내 강아지잖아. 이리 와."


기댈 곳이라고는 둘 밖에 없던 우리.


그래서 함께 하는 동안 오로지 서로를 생각하며 서로를 챙겼고 그런 서로를 배려하는 행동들이 몸에 배어 어느새 함께 하며 지낸 시간들로 아이를 키우는 일도 함께하며 힘든 과정도 그렇게 잘 이내내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하며 서로의 존재를 익숙하게 당연하게 여겨왔던 순간.


함께하지 못하며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면서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더욱 서로를 믿고 신뢰해 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사랑이 이토록 길게 이어져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나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랑의 모습들은 때로는 불타는 애정으로 서로를 갈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자리를 메우는 의지의 모습으로 대신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를 메꾸기도 하지만 어쩌면 마음 한편 빈방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그 사랑이라는 존재는.


비어 버리면 항상 찾아야 하고 채워야 하는 것.


그래서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항상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잃은 것 같은 불안함에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구해 넣어야만 할 것 같은 것.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부터는 그러한 혼란에서 마음은 한결 안정을 되찾고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원동력이 되는 것.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끔은 그 사랑이 들어가야 할 곳에 다른 마음이 들어가 있기도 한다는 사실.


그것을 모르고 있다 보면 때로는 착각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길로 향하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스스로의 마음을 직시하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




" 야. 너는 바쁜 애가 맨날 전화질이야? 너 진짜 그렇게 만날 사람이 없는거야?"

" 무슨 소리야. 지금도 일때문에 이동중인데... 그래서 엇그제 어린이 집에 갔는데..."


" 아 그건 와이프한테 상의를 해야지. 나를 붙잡고 할 게 아니고."

" 아 그러니까. 와이프랑 이야기 하기 전에 너한테 먼저 물어보는 거잖아. "


가끔은 생각한다.

왜 나는 남자들이 말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을까.


아니 그런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 일상의 소소한 대화들까지 오가기 시작한 한팀장은 여느 여자친구들 못지 않게 사소한 것들까지도 내게 보고하듯 수시로 전화를 해댔다.


예전에 같이 있을 때는 종종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주고 받고 했지만 여기를 다녀가고 나서 그리고 그의 비밀을 알고 나서는 부쩍 한팀장 전화가 잦았다. 그의 아내에게 말 못하는 이야기 부터 회사이야기 그의 부모님 이야기까지. 그리고 그의 잠자리 이야기까지.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내가 공감하고 들어주면서 우리는 정말 찐 친구가 되어 있었지만 그만큼 그는 수다스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때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내가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도움은 되는지 가끔은 의문이 들었다.


" 그래서 오늘은 어디 미팅가는 길인데 이렇게 한참이 걸려?"

" 오늘? 나? 강원도 가는 길이지. "


" 뭐? 여기 온다고? 그럼 진작 말하지. 이제껏 통화하면서 왜 그 이야기를 이제야 하는건데?"

" 아 그 말 할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 근데 강원도는 왜 오는데?"


" 아 일단 나는 먼저 가서 행사장 세팅한거 확인하고 보고 하고 나중에 회장님 오시면 수행해야지."

" 태호씨도 와?"

" 응. 거기서 경제인의 밤 행사 하잖아. 니네 회사에서 광고했다며?"




" 아.. 그렇지. 근데 그런 건 회장이 오지 않잖아?"

" 응. 근데 이번에는 연휴이기도 하고 애들도 있으니 가시나 보던데? 휴가차? "

" 해외가 아니고? 휴가를?"


" 그거야. 해외는 수시로 나가시니까. 뭐. 지난주도 일주일 해외 출장다녀오셔서. 국내가 오히려 휴식일걸."

" 아... 그런 거구나. 뭐 아무튼. 그래서 지금 오는 길인거야? 숙소는?"


" 아 숙소는 호텔에 예약 잡혀 있고. 와이프는 어제 재우랑 먼저 갔고 나는 오늘 출근했다가 지금 가는 길이지. 잠시만 휴게소 좀. "


한참 연초에 바쁘게 행사 일정이 잡혀 있을 시기고 회사에서도 각종 업무보고와 연초 계획으로 바쁠 시기일 텐데 연휴라는 핑계로 여기까지. 뭔가 말이 맞지 않은 일정이 영 낵히지 않지만 아무튼 물어보기에는 너무 내 행동도 말이 안되고 내가 관여할 부분도 아니라 나는 구지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다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서둘러 한팀장과 전화를 끊고 회사에 들어가자 연과장이 나를 불렀다.

" 정과장. 한참 찾았잖아요. 지금 현장은 세팅 끝났는데 그래도 행사 진행상황은 봐야 하니까 내일 근무는 정과장이 들어갈거죠?"

" 제가요? 내일은 연과장님이 들어가시는 거 아닌가요? 내일 본 행사고 사장님도 가시는데..."


" 아 저는 내일 가족 일정이 있어서... 사장님께는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정과장한테는 미리 양해 못구해서 미안해요. 뭐 안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내일 가족행사에 저만 빠지고..."

" 그런 사정이면 제가 가야죠. 저야 내일 별다른 일정은 없거든요. 그럼 오늘은 연과장님이 행사장 지금 가시나요?"


" 아 안그래도 제가 지금 가려구요. 고마워요. "

" 그럼 여기는 제가 있을게요. 상황보시고 연락주세요. "




내게 미안해 하던 연과장은 이제야 얼굴이 좀 풀린 듯 그렇게 자리를 떴다. 곁에서 김대리가


" 연과장님은 이런 건 미리 말씀 안하시고 꼭 당일이나 그 직전에 저렇게 말씀하셔서 사람 곤란하게 하신다니까요. 아니 같은 직급인데 왜 저렇게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

" 괜찮아요. 김대리. 김대리는 어떻게 내일 출근해요?"


" 뭐. 저야. 하라는 대로 해야지 별 수 있나요. 여자친구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호텔에 방 잡아뒀으니 잠이라도 실컷 자라고 알려줘야죠. "

" 다행이네. 여친이 그래도 이해해줘서. 여친이 서울에서 내려 온다고 했나? 둘이 뜨거운 밤이라도 보내요. 그래야 덜 서운하지."


" 아이 정과장님도 부끄럽게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다니... 내공이 틀리십니다. "


나는 살며시 김대리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 뭐. 아줌마다 보니 이해해줘요. 대신에 여친 미리 와 있으면 오늘은 2시간 조기 퇴근 합시다. 내가 출장을 보내줄게. 호텔로. 간김에 절대 로비는 안나가는 걸로. 현과장 마주치면 안되니까. 비상구로만 다니고 알았죠? "


" 와. 정과장님 센스... 감사합니다! "

" 청춘이잖아. 부럽기만 한데 뭐. 즐거운 데이트 시간 보내요. "
















keyword
이전 06화#1-37. 너를 가졌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