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의 실마리
" 수고 많았어요."
" 멋진 브리핑이었습니다. 팀장님."
준비한 자료를 브리핑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던 도 관계자가 내게 윙크를 했다.
무사히 행사를 마무리하고 그제야 한숨을 돌리자 어느새 호텔 연회장은 은은한 조명으로 바뀌며 참석자들은 와인잔을 들었고 준비한 만찬이 하나둘 들여오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진행은 이제 시작이지만 나의 업무는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제야 한숨을 돌리는 순간.
" 사장님이 부르십니다. "
김대리의 호출에 사장님에게 향하자 사장님 곁에 태호가 서 있었다.
" 여기 오늘 브리핑을 준비한 저희 회사직원입니다. 인사하지. 위더스 회장님이십니다. "
" 브리핑 잘 봤습니다. 좋은 자리 마련해 줘서 고맙군요. "
" 감사합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셔서. 아직 남은 연회자리가 있으니 마저 즐기시고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그렇게 태호와도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고 뒤돌아서자 진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태호의 곁에는 도에서 나온 사람들과 다른 회사 사장들 그리고 그 외 관계자들이 둘러싸여 태호의 얼굴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는 그렇게 나와 멀리 떨어져 새삼 빛나고 있었다.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어쩌면 돈이 만들어준 세상은 이렇게 서로를 다른 세상에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나 또한 저 세계에서 그 사람의 곁에 잠시나마 있었다는 것이 이제는 현실처럼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내게는 잊힌 추억이 되고 이런 자리가 그저 업무의 연장처럼 느껴지는 정도로 느껴질 만큼 마음 또한 담담해져 있었다.
호텔 로비로 나서는데 강하게 느껴지는 태영의 기운.
나도 모르게 가던 발걸음을 멈춘 채 나는 뒤돌아 보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어디선가 달려와 나를 안은 아이.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나를 와락 안은 아이.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그 아이를 끌어안았고 곧이어 수행비서가 다가와서는
" 도련님. 사모님은 저기 계십니다. 찾고 계세요. 죄송합니다. 실례를... 어."
내게 양해를 구하는 김비서가 나를 보고 흠칫 놀라는데 나는 그에게 눈치를 줬다.
" 엄마 찾고 있었나 보구나. 아줌마는 엄마가 아닌데 미안해서 어쩌지? 가봐야겠구나. 잘 가. 다음에 보자."
그러자 그가 이내 헛기침을 하고는
" 도련님 가시죠. "
그렇게 말하며 태영의 팔을 끌었다. 그러자 태영이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뒤돌아 갔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와 나를 데리러 온 정우의 차에 올랐다.
내 두 볼에 흐르는 눈물.
나는 이내 눈물을 닦고는 다시 머릿속에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태영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태영이 나를 안은 모습을 기억해 내고는 매정히 돌아선 내 모습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정영을 떠올렸다.
그러자 울리는 전화.
" 어머니. 행사는 잘 마무리하셨어요?"
" 어머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야? 거기 새벽일 텐데?"
" 아 잠들었다가 어머니 생각이 나서 문득 깼어요. 아버지 잘 계시죠?"
그러자 옆에서 운전을 하던 정우가
" 나는 잘 지낸다. 아들. 보고 싶구나. 그곳 생활은 어때?"
" 저야 잘 지내죠. 방학이라 아르바이트하다 보니 정신없이 보내요. "
나는 그런 정영에게
" 공부에 방해되는 건 아니지? 돈 모자라면 말해. 네 앞으로 대출해 놓을 테니. "
그러자 당황한 정영이
" 오 no. 그래서 하는 건 아니에요. 돈은 주식으로 여유 있게 생활비도 나와요. 여기서는 다양한 경험이 중요한 프로필로 들어가서 해야 해요. 그러니 너무 염려 마세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쪽. 그럼 저는 마저 자러 가요. "
오랜만에 들은 아들의 목소리에 나는 금방 얼굴에 미소가 머물렀다.
제법 이제는 사춘기를 넘어 어른의 얼굴 모양이 모여 생김새도 선명해지며 남편의 젊은 시절 얼굴이 어땠을지 보여주는 그 모습.
사랑스러운 모습의 정영이 눈에 가득 담기자 어느새 나는 태영의 생각은 머릿속에서 멀어져 갔다.
떠올리지 않는 것이 태영을 위해서도 더 나은 일이니 그렇게 해야 하기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음날 회사에 연차를 이틀 내고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양양으로 차를 몰아갔다.
파도가 높게 이는 양양 바닷가.
머릿속에는 강릉에서 보낸 5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듯 그렇게 지나갔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들.
그리고 행사. 그 많은 시간들이 마치 한순간의 연기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져 가며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은 제법 한산하다.
한참 여름이면 붐빌 그곳에 겨울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바닷가 자리 잡은 서퍼샵 옆으로 카페가 보였고 그곳에서 차가운 바닷바람에 아랑 곳 않고 나는 커피를 사서 밖으로 나와 테라스에 앉아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한참을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데
" 여기는 처음 오시나 보네요. 지금은 비시즌이라 그리 사람이 많지 않아요. 날도 춥고... 커피는 안에서 드셔도 됩니다. "
웬 남자가 내게 말을 걸어와서 고개를 들어보니 훨칠한 키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어깨에 보드를 메고 있었다.
" 아 저는 여기 카페 사장입니다. "
나는 그를 바라보고 그저 방긋 웃으며 다시 시선을 돌려 바다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없이 입김을 내뿜고는 다시 커피를 마셨다.
" 여기 숙소는 어디로 가면 되죠?"
내가 바다를 바라보며 그에게 묻자,
" 근처에 민박도 있고 모텔도 있지만 저희 카페도 셰어 하우스를 운영 중입니다. 원하시면 저희 카페에서 머무르셔도 되고요. "
" 그럼 이틀만 머물다 갈게요. "
그렇게 그의 뒤를 따라 카페내부로 들어가자 그는 어깨에 메었던 보드를 한쪽 벽면에 가로로 걸어둔 채 나를 이끌고 이층으로 안내했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이층은 방이 4개로 거실과 주방은 공용으로 사용하고 방 2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사용 중이고 하나는 비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는 아마도 사장의 방인 듯했다.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이르자 아기자기한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기다랗게 이어진 선반 위로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다육이 선인장이 예쁘게 심겨 있었다.
그 옆으로 책이 몇 권 놓여 있었고 그 아래로는 자주색 천을 둘러 씌워 리폼한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주황색과 하늘색의 빈백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거실 중앙으로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꽤나 오래된 둥근 나무 의자는 형광빛에 가까운 페인트로 연두색과 핑크 빛이 도는 색으로 채색되어 아기자기한 느낌을 더하고 있었다.
거실 맞은편에는 기다란 나무 식탁 테이블 아래로 북아일랜드식 타일로 예쁘게 장식을 더하고 그 사이 기둥에는 작은 액자가 걸려 있었고 그 액자에는 유럽 여행에서 찍은 듯한 풍경 사진이 걸려 있었다.
주방의 폭은 좁았지만 냉장고와 싱크대 조리대, 전기레인지 스탠드형 장이 들어가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구성으로 오밀조밀 요리하기에 딱인 동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바로 거실 정면이 보이도록 아치형으로 주방과 연결된 벽면은 앙증맞게 셰어하우스의 디자인에 포인트를 더하고 있었다. 소통이 자유로운 공간 구성.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인 만큼 공간은 개방적이고 활기차게 느껴졌다.
짐을 풀고 밖으로 나온 나는 천천히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대를 걸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는 상쾌하고 하늘은 더없이 높고 푸르기만 하다. 머릿속에 텅 비게 느껴질 만큼 온몸은 차갑게 느껴졌다.
한기가 온몸으로 파고들 때 비로소 발걸음을 멈추고는 눈앞에 보이는 식당으로 향했다.
기사식당이라고 적힌 그곳에 메뉴는 한 가지.
정식.
돼지불고기백반에 된장찌개가 나오고 기본 나물과 반찬들이 나오는 시골인심이 더해진 밥상은 제법 맛을 더해서 먹을 만했다.
허기를 채우고 나온 나는 근처를 둘러보다 때마침 보이는 책방에 들러 책을 하나 골랐다.
북카페로 운영 중인 그곳은 한적한 듯 보였지만 제법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한 두 명씩 책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틈에서 책을 골라 결재를 하고 책을 옆구리에 낀 채 다시 커피를 사서는 밖으로 나와 호호 불어가며 길을 따라 걸어 서퍼샵 옆 카페로 왔다. 그리고 거기 테라스에 앉아 책을 봤다.
" 음 저희 집에서 구매하신 물건이 아닌데 이건 반칙인데요? "
쿠키와 초콜릿을 함께 가져 나온 사장이 내게 웃으며 말을 건넸고 그제야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 미안해요. 책을 사면서 그냥 나올 수 없어서요. 여기서 보는 건 괜찮죠?"
" 농담입니다. 손님. 일행은 없으신가 봐요?"
" 네. 혼자 왔어요. "
" 편안히 즐기다 가세요. 이건 서비스입니다."
오후 내 차에 탔다가 또 테라스에 앉았다가 하면서 책을 기어이 다 보고서야 2층으로 향하자 카페 사장이 따라 올라왔다. 그리고 분주히 식사를 챙기기 시작했다.
" 아직 저녁 안 드셨죠?"
" 안 챙겨주셔도 돼요. 제가 챙겨 먹으면 됩니다. "
" 뭐 이 시간에는 손님도 없고 또 1층에 점원도 있어서요. 지금은 저도 조금 쉬어야 하니까요. 식사나 같이 하시죠. "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익숙한 듯 냉장고에서 묵은 김치와 반찬을 챙겨 내고는 이내 프라이팬에 계란 프라이를 하고 미역국을 데워서 꺼냈다. 그리고 간단히 차린 저녁 식사.
" 잘 먹을게요. "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식사를 하기 시작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다른 방에 투숙객으로 보이는 남녀 한쌍이 후다닥 2층으로 달려 들어왔다.
" 으 추워. 사장님 너무 추워요. 아 저녁 식사 중이시네? 저희 오는 줄 아시고 어찌 또 이리 준비 하셨담? 그럴 줄 알고 히히"
그들은 손에 든 봉지를 들어 보였고 그 속에는 치킨과 맥주, 소주가 들어 있었다.
" 인사해요. 여기서 2일 있다 가실 손님이야. 여기는 저희 집에서 3개월째 하숙 중이신 커플 분이십니다. 여기는 제인 씨, 여기는 Tim 님. "
" 안녕하세요. 제인 씨. 하이요. Tim."
" 편하게 말하셔도 돼요. 저 한국말 잘해요. 이름이..."
" 연수라고 해요. 편하게 연수라고 불러주세요. 반가워요. "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한잔해요. 연수 씨"
" 언니라 불러도 되죠? 연수 언니."
" 네 편하게 말하세요. "
그때,
" 와 나도 불러야지. 이런 자리 있음 나 안 부르면 쓰나?"
양손에 술을 잔뜩 사서 들고 웬 여자가 들어왔다.
" 야. 이사장. 또 술이야? 그러다 쓰러져. 작작 마셔. 인사해요. 연수 씨. 여기 옆에 서퍼샵 주인."
" 아 안녕하세요. "
" 아 아까 낮에 그 손님이구나. 가게 앞에서 책보시던. 반가워요. 연수 씨. "
" 아 이럴게 아니고 쭌이도 오라고 해?"
" 아 이럼 너무 판이 커져. 처음 온 사람도 있는데..."
때마침 울리는 전화소리.
" 여보세요? 아 응. 안 그래도 너 오라고 하려던 참인데... 응? 여기? 방? 응 있어. 모시고와. 그래."
" 누군데? 쭌이지. 방 찾는 손님 있어서 모시고 오랬어. 여기 방 있다고. "
" 아니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 뭐 없으면 우리 집으로 안내하면 되지. 자 마셔. "
그렇게 급작스레 밀려든 사람들을의 틈바위에 끼여 얼떨결에 합석을 하게 된 저녁자리.
건아하게 차려진 술판은 늦은 밤이 되도록 이어졌다. 각각의 사연을 가진 방문객에서 이곳 양양에 터를 잡은 사람들까지.
게임을 하고 왁자지껄 웃음소리에 그렇게 흥이 돋궈진 술판은 꽤나 신이 나서 마이크까지 들고 노래까지 부르고 창문에 올려져 있던 블라인드가 내려오고 빔프로젝트에 카페 주인이 즐겨본다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오래된 영화가 틀어지고 나서야 끝이 나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그들을 뒤로 몸에 담요를 두르고 따스한 코코아를 한잔 든 채 1층으로 내려왔다. 어느새 주변은 새벽을 알리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카페 난간에 기대어 있는데 주인이 어느새 다가와 내게 담배를 권했다.
나는 잔을 옆에 내려놓고 담배를 받아 한대 폈다. 그러자 그가 곁에서 나를 한번 힐끔 바라보고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더니 길게 연기를 내뿜으로 한대 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을 보더니
" 어떻게 알아본 거죠?"
" 게임요. "
" 게임? 아 그 키스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