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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아 Mar 07. 2021

엄마의 억척과 오지랖을 존경한다!

엄마의 투병 일기 - 181105

엄마 집에 들어서는 순간 쓰나미처럼 짜증스러움이 훅 밀려왔다. 엄지손가락에 칭칭 붕대를 감고서도 마늘을 다듬고 있는 엄마를 봤기 때문이다.


“또 왜 그래?”

“살짝 베었어”

“뭐하다가?”

“흑마늘 만들려고 마늘 다듬다가”


엄마 앞에 있는 마늘을 보니 한 보따리다.


“그걸 다 뭐하려고?”

“뭐하긴! 먹지”

“엄마랑 아버지랑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좀 어지간히 하고 살아"


엄마는 늘 그랬다. 특히 먹는 것 관련해서는 적당함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나 차고 넘쳤다. 남으면 아깝다고 버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먹지도 않았다. 한두 번 먹을 만큼만 해서 먹어야 맛있지, 일주일 내내 똑같은 음식이 상에 올라오면 오히려 밥 맛을 떨어뜨린다고 말하고 또 말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습관이라기보 다는 신념인 듯했다. 평생을 청소를 하면서 힘겹게 살아왔던 자식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날은 제삿날밖에 없었던 엄마 입장에서는 당연했을 것이다. 엄마의 고집스러운 신념을 인정해야 하지만 쉽지 않다. 엄마가 아프기 때문이다.

딸내미를 찍는 사진의 반에 반 만큼이라도 엄마의 사진을 많이 찍어야겠다 생각한다. 


엄마는 말기암 환자다. 4년 전에 폐암을 발견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다행히 초기였고 수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2년 후 재발했다. 의사는 말기라고 했다. 폐막까지 암세포가 번졌고, 이름도 생소한 ‘부신’이라는 장기에도 암세포가 보인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시작했고 또 정확히 2년이 지났다. 2년 동안 세 종류의 항암치료를 했다. 항암치료보다 더 두렵고 고통스럽다던 항암 부작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자식 입장에서는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물론 당사자인 엄마 입장에서는 뼈를 때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표현을 안 했을 뿐임을 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엑스레이를 찍고 피를 뽑는다. 이때부터 진료실 문을 들어서는 순간까지 모든 신경은 검사 결과 그러니까 암덩어리가 커졌는지 줄어들었는지 그대로인지, 그리고 항암치료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몸상태인지 아닌지에 곤두서 있다. 엄마의 이름이 불려진다. 진료실 문을 엶과 동시에 의사 선생님의 눈을 살핀다. 내가 독심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엄마는 자리에 앉고 나는 의사 선생님 뒤로 가서 연결되어 있는 3대의 모니터를 훑는다. 의사 선생님은 한 달 전에 찍었던 사진과 오늘 찍었던 사진을 비교한다. 뚫어져라 모니터를 보지만 뭐가 다른지 알 수는 없다. 또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저 긴장의 표현일 뿐이고 제발 커지지만 말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다.


"지난번과 똑같네요. 피검사 결과도 다 정상이고 한 달 후에 봐요"


팽팽하게 최대한 당겨져 있던 고무줄이 한순간에 제자리로 돌아와 아무렇게나 얽혀버린 느낌이다. 그 긴장과 간절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를 대신 허기가 채워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지간해서는 차에서는 잠을 자지 않는 엄마도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들었다. '지난번과 똑같네요'라는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듯했다. 그런 엄마의 옆모습을 본다. 참 고단한 인생을 살아온 엄마의 얼굴에 '다행히 체력도 의지도 강해서 말기암 치고는 오래 사셨어요'라는 의사의 말이 오버랩됐다. 지난번 항암을 받기 위해 입원을 했을 때 아침 회진을 하던 의사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서 했던 말이다.


엄마는 당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온갖 오지랖과 극성을 부리며 억척스럽게 살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그 억척이 암덩어리를 조금씩 물리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볼 때마다 잔소리를 퍼붓고 투덜거리지만 그동안 엄마의 억척과 오지랖이 자식들을 먹여 살린 것임을 잘 안다. 엄마의 억척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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