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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나의 비단길 이야기-0

by 현진

“우리는 통조림의 시대에 살고 있어. 만사는 미리 짜 놓은 것이고 미리 씹어 놓은 것이며 미리 느낀 것뿐이야. 자기가 재배하고 길러서, 질문과 의심과 그리움의 불에 올려놓고 끓이는 일은 결코 없어”

_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000056.JPG 칭다오행 페리 2018년 4월

1.
처음 이 여행을 계획한 것은 훈련소에서 공상에 빠져 지내던 때였으니, 지금으로부터 2년도 더 전이다. 하지만 막연히 중앙아시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고등학생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윤후명 작가의 하얀배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다. 우연히 수능특강에 실린 지문에 마음에 들어 학교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199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전문을 찾을 수 있었다.
하얀배는 「안녕하십니까! 이 말은 우리나라 말입니다...」 라고 중앙아시아 초원을 향해 외치던 한글을 배우는 고려인 3세 소녀 류다의 글을 보고 그녀를 찾아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수로 떠나는 ‘나’의 수기 같은 소설이다. 지금 생각하면 고려인 소녀, 초원, 여행 등 감상적인 요소들이 버무려져 있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당시 소설을 읽으며 묘사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톈산 산맥 중턱에 자리한 산정호수인 이식쿨이라는 배경은 아득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나는 이식쿨 호수를 가고 싶은 호수 목록에 추가시키기로 했다.


000038.JPG 송쿨호수 2018년 6월

2.
입대 후 받게된 기초군사훈련은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교관과 조교들은 쉬지 않고 훈련병들을 굴리는, 힘든 훈련 스케줄을 소화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장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것은 대기시간이었다. 1500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제한된 시설로 훈련을 받다보니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긴 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긴 대기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멍하니 전방을 응시하며 앉아있는 것 뿐이었다. 「훈련 받는데 입이 필요합니까」 그렇다. 훈련받는 데는 입이 필요없었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멀리멀리 나아갔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재밌었던 대학 생활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러다 전역 후 어떤 일을 해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았다. 아직 훈련병 신분에서 가당치도 않은 망상이었지만 그때는 내가 예비군 마크를 달고 제대를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곧바로 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좁은 곳에 갇혀 있다 보니 탁 트인 곳으로 나가고 싶었다. 우선은 이름만 불러왔던 이식쿨. 그다음엔, 이식쿨까지는 어떻게 가야할까. 비행기를 탈까. 몇 년간 상상만 해왔던 장소를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만에 툭 떨어진다면, 역시 김이 빠지겠지. 그럼 그 사이의 모든 땅을 직접 내 발로 밟아본다면. 동해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간 다음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반쯤 건너 파미르 고원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옛날 대상들 처럼 실크로드를 횡단해 유럽까지 가는 길은 어떨까, 역사 시간에 배우던 동서교역로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훈련 일지 맨 뒷장에 빛바랜 이름의 도시들을 적기 시작했다. 시안, 둔황, 카슈가르, 페르가나, 사마르칸트, 부하라, 이스파한, 이스탄불.
그 후 2년간 군생활 틈틈이 여행을 준비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유라시아를 횡단한 여행자들의 여행기를 읽으며 가고 싶은 장소를 막연히 꼽아 보는데 그쳤지만, 「나는 여기서 풀려나면 넓은 곳을 찾아 떠날거야」 이 생각만큼은 깊이 박혀있었다.


000002.JPG 호카곶 2018년 12월

3.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순간이동과 비슷하다. 인천에 있다가도 몇 시간 뒤엔 프랑스에 있을 수도 있고, 인도에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곤 공항 밖으로 나와 갑자기 낯설어진 이국의 공기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천천히 모든 땅을 밟으며 여행한다면. 가장 먼 곳에 도달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그때도 이국적인 이채로움을 느낄지 궁금했다. 그래서 인천항을 출발해 칭다오로 가는 배표를 끊었고, 유라시아의 서쪽 땅끝인 포르투갈의 호카곶까지 8개월간 육로로만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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