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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들꽃_란저우, 중국

나의 비단길 이야기-4

by 현진

#11 우육면의 고장


첸과 이탈리아 친구들은 이른 아침에 공항으로 떠나고, 나는 늦잠을 자고 이제는 조용해진 안마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여행 중에는 사람들과 쉽게 만나고, 헤어진다. 심지어 으레 하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대부분 요원해 보이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 혼자 짐을 짊어지고 호스텔 문을 나설 때 발걸음이 무거웠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니 설렘보다는 벌써부터 마음이 안 좋았다.


시안 북역은 고속열차가 정차하는 역이다. 북역으로 가는 지하철에는 커다란 캐리어를 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중국인들은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행 갈 때 다들 큰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

몇 시간 뒤 란저우에 내렸을 때 해가 점점 넘어가고 있었다. 역 밖으로 나와보니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외모가 조금 바뀐 걸 알았다. 서역에 한 발짝 더 다가섰나 보다. 란저우 역시 한족이 다수를 차지한다고는 하지만, 진짜 다 같은 민족일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나라가 단일 민족 국가라는 것도 신화에 불과하듯이, 이곳 사람들은 조금 더 검고 붉다. 그리고 신장으로 가는 입구인 까닭에 흰 모자를 얹어쓰거나 히잡을 쓴 위구르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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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저우는 황허를 따라 길게 늘어선 도시다. 하지만 도시를 산이 둘러싸고 있는 탓에 베이징과 1,2위를 다툴 정도로 대기오염이 심각한 곳이다. 대기오염 말고는 우육면으로 유명한데, 전주비빔밥처럼 음식에 지명 이름이 붙는다. '란저우 니우러우미엔'이라고 발음되는 이 요리는 걸쭉하지 않은 소고기 탕국에 소면을 말고 쪽파를 고명으로 얹은 생김새다. 가격도 1200원 정도로 싸고 아주 맛있다. 란저우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저녁으로 한 그릇을 비우고 시장에서 청포도 한 송이를 사 먹었다.


#12 기억 속의 들꽃


란저우에 하루 더 있을까 고민했지만 대기오염 1위 도시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다른 곳으로 빨리 가고 싶었다. 실크로드 도시인 둔황으로 가는 길에는 시닝, 장예, 자위관 등 꽤 가 볼 만한 도시들이 몇 군데 있다. 하지만 별로 내키지가 않아서 둔황으로 바로 가는 18시간짜리 침대 기차를 끊었다.

계속 고민했던 탓일까, 기차표를 사고 둔황의 호스텔을 예약하자마자 약간 후회가 됐다. 여정을 훌쩍 건너뛰는 느낌이 든다. 티베트로 들어가는 관문인 시닝과 칭하이 호에 들러 티베트를 맛보기라도 해볼 걸. 시닝에서는 라크젖으로 만든 요거트를 판다고 한다.


둔황행 기차는 저녁에 출발하는 야간열차였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조금 있었다. 남는 시간을 이용해 란저우의 랜드마크인 중산교나 가보기로 했다. 미세먼지를 뚫고 강변을 따라 1시간 정도 걸었다. 지도를 펴고 보면 바다나 강에 색깔 이름이 붙은 곳이 몇 군데 있다. 홍해나 흑해같이. 고등학생 때 이집트의 홍해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본 홍해는 기대와는 달리 완전한 파란빛이었다. 하지만 황허는 말 그대로 누렇다. 방금 큰 홍수라도 난 듯 황톳물이 세차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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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허를 가로지르는 철교인 중산교 한가운데서 빠르게 흘러가는 강물을 계속 내려다봤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기억 속의 들꽃이라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소설이 떠올랐다. 부서진 철교 끝자락에 가락지가 담긴 주머니를 걸어두고 하나씩 꺼내 쓰던 소녀의 이야기. 결국 가락지를 꺼내러 가다 어지러워 강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던가? 그 소녀의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애썼지만, 기억이 안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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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열차가 다니는 란저우 서역과는 달리 일반열차가 지나는 란저우 역은 조금 소란스럽고 낙후된 느낌이었다. 신장 근처라 그런지 검문도 심하다. 앞머리를 자르려고 가지고 다니던 이발 가위를 빼앗겼다. 기차 타는데도 검문을 2중, 3중으로 한다. 중국 기차역 매표소에는 항상 긴 줄이 늘어서 있다. 트립닷컴으로 예매한 기차표를 종이 표로 바꿔야 하는데, 기차 시간이 다가와 혹시 놓치면 어쩌나 조바심이 들었다. 그래서 줄을 잘 서야 하는데, 무조건 짧은 줄 보다는 줄의 구성이 중요하다. 평균 연령이 제일 낮은 줄을 고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양쪽 가에 있는 줄보다는 중간 줄이 새치기 시도가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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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으로 가는 야간열차는 이제껏 탔던 기차보다 더 구형 모델인 것 같았다. 객차는 옛날 피시방처럼 담배 냄새로 찌들어 있었다. 배를 깐 아저씨들은 기차 연결 칸에서 뻑뻑 담배를 피워댔고, 승무원들도 객차 문을 닫아 줄 뿐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3층 침대의 중간 칸을 배정받은 나는 둥글게 몸을 구부리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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