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두려움과 설레임 사이 _ 중국행 페리

나의 비단길 이야기-1

by 현진

#1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운 건 왜일까?


디데이 날짜를 정하고도 마음 편하게 있다가 집을 떠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조금씩 긴장이 됐다. 뭐 빠뜨린 물건은 없고, 덜 끝낸 일은 없는지 계속 확인을 했다. 낮 기차를 탈까 했지만 우물쭈물하다가 서울행 저녁 기차를 잡아탔다. 동대구역까지 가족들이 따라와 배웅을 해줬다.

"연락 잘하고, 위험한 데 가지 말고, 술 많이 먹지 말고..."

부모님의 마지막 말씀은 역시 걱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서울에 도착해 석계역 앞에서 재하를 만났다. 이틀간 재하의 자취방에서 머물며 할 일이 많다. 내일은 이태원의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에 비자를 받으러 가고, 미처 못 산 물건들도 사야 한다. 대구에서 저녁을 먹고 왔지만 바로 방으로 들어가기는 아쉬워 골목의 김치찌개 집으로 들어갔다. 김치찌개와 맥주를 주문했다. 둥그런 스테인리스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재하에게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틀로 잡았던 서울 일정은 하염없이 늘어지기만 했다. 투르크메니스탄 비자 문제로 출국을 계속 미뤘다. 다행히 페리는 날짜 변경을 수수료 없이 해줬다. 하지만 두 번이나 배표를 미뤘더니 슬슬 이제는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출발선에 선 스프린터가 총성이 울리고도 출발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조급한 마음에 하루에 한 번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대사관 직원은 어눌한 한국말로 초청장이 아직 승인되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기다리라고만 했다.

이런 딜레이를 감수하면서까지 서울에 남은 이유는, 다른 나라에서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을 방문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겪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대사관 직원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나는 그에게서 여전히 확답을 받지 못했고 그는 초청장이 발급되면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초청장만 있으면 다른 나라의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에서 비자를 수월하게 발급받을 수 있을 거라면서. 그게 현재로선 최선이었다. 일단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출발부터 하기로 마음먹고 두 번째 미룬 배 시간은 더 이상 바꾸지 않았다.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출발하려는 건 내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막상 혼자 길을 나서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2 칭다오로 향하는 페리


아홉 시로 맞춰두었던 알람이 울렸다. 하지만 알람을 끄고 다시 누웠다. 오늘이구나... 마지막 밥은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집 앞 뼈해장국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깍두기를 많이 먹어두고 싶었는데 식당에는 깍두기가 없었다. 출발선에 서서 끝이 안 보이는 도착점을 마주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모든 행동에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20180428_125651_HDR.jpg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하자 이제 시작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앞뒤로 배낭이 매달려 있으니 내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인천항으로 가려면 1호선 인천행 열차를 타야 한다. 하지만 내가 탄 열차는 천안행, 정신 차려보니 열차는 천안으로 가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모르는 역에 내렸다. 반대 방향 열차를 타고 다시 구로까지 간 다음, 인천행으로 갈아탔다. 벌써부터 순탄치가 않다. 지하철에서 우왕좌왕하느라 조금 늦게 인천항에 갔더니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커다란 짐보따리를 가득 든 중국 사람들이 대합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출항 시간이 임박해서 그런지 수속은 빨리 끝났다.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으로 나갔다. 셔틀버스가 내가 탈 페리까지 데려다줬다. 배에 올라 승무원에게 티켓을 보여주고 객실을 안내받았다. 나는 3등 칸이었는데 5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한 방에서 자는 구조다. 2층 침대가 겹겹이 붙어있고 침대마다 누런 커튼이 달려있었다.


20180428_170236.jpg
20180428_180721.jpg


페리가 출발하고, 배는 인천 부두를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언제까지 한국 인터넷이 잡힐까, 이런 생각이 들면 괜히 조바심이 들면서 찔끔 오줌이 마렵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돌렸다.

'저는 이제 떠납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방인데 중국 아저씨들이 담배를 막 피웠다. 컵라면 냄새에 담배 냄새, 사람 냄새까지 뒤섞여 머리가 아팠다. 숨이 막혀서 계속 갑판 쪽을 왔다 갔다 했다. 밤에 갑판에 나가면 맞바람이 사람까지 날려갈 듯 강하게 때린다. 3년 전 크레타에서 아테네로 가는 페리를 탔을 때도 밤바다는 낭만보다는 오싹함에 가까웠다. 나를 대륙으로 데려다 줄 이 배를 타고 가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나 하나 없어져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느낌.


#3 여행의 시작


칭다오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오늘은 내 생일이다. 하지만 비행기 모드를 설정해둔 휴대폰은 잠잠하기만 했다. 알게 뭐람, 난 내 살길이나 찾아야겠다. 배낭끈을 조절해 어깨에 꼭 맞추고 호스텔을 찾아 걸었다.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였는데 대중교통편은 모르겠고, 택시 타기는 싫어서 그냥 걸었다. 호스텔은 바로 내가 예상한 그 자리에 딱 있었다. 첫 번째 미션을 성공한 기분이다. 짜릿했다. 하지만 4인실 도미트리의 내 침대에 앉아있으니 또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났다. 이렇게 잔뜩 움츠리고 어떻게 여행하려고. 일단 한숨 자고 고민하기로 했다.


20180429_111317.jpg


얼마쯤 잤을까, 수런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니하오?"

내 또래의 중국 친구들이었다. 호스텔에서 으레 대화를 시작하는 말로 말문을 튼다. '넌 어디서 왔니, 이름은 뭐니?' 호리호리한 체격에 뿔테 안경을 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친구의 이름은 쓰호. 그런데 이 친구는 굉장히 말이 많았다. 물론 중국말로. 그래서 우리는 번역기를 사용해야 했고, 나는 번역 어플이 이렇게 정확한지 처음 알았다. 방 앞 소파에 앉아서 서로 번역기로 필담을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녁이 됐고 쓰호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자기 친구들 2명이 더 있다고 해서 같이 가기로 했다. 방을 나가보니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에서 멀어서 갈까 말까 고민했던 5.4 광장까지 차를 얻어 타고 갔다 왔다. 또래 친구들이라 사진도 서로 찍어주고 이야깃거리가 많아 금방 친해졌다.

"그런데 나 오늘 생일이야"

"뭐라고? 그런데 오늘 저녁을 길거리 음식으로 때우려고 했다고?"

쓰호는 깜짝 놀라면서 5.4 광장 근처 식당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건 어떠냐, 저건 어떠냐, 한참 자기들끼리 토론을 거친 끝에 한 식당을 골라 나를 데리고 갔다.


20180429_190943.jpg


사람이 붐비는 식당이었다. 요리 5개, 밥과 국을 시켰는데 입에 안 맞을까 살짝 긴장했지만 다 맛있었다. 특히 곱창볶음은 먹자마자 이거 정말 맛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여행 출발이 좋다.

식당을 나와서 호스텔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쓰호가 자기는 뭐 살게 있으니 이따 온단다. 그런가 보다 하고 호스텔로 돌아와 공용 공간에 앉아있으니 하나 둘 애들이 슬금슬금 사라졌다. 설마 얘네들 내 생일 케이크 사러 간 거야? 오늘 만났는데 이러면 좀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하면서도 문을 흘끔흘끔 훔쳐보며 앉아 있었다. 곧이어 나타난 쓰호가 사 온 것은 내 생일 케이크가 아니라 트럼프 카드. 다른 친구들도 각자 방에 짐 정리를 하러 갔다 왔다고 했다. 김칫국 한 사발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20180429_231539.jpg


친구들이 준비한 간식과 맥주를 얻어먹으면서 카드를 쳤다. 나에게는 전혀 새로운 카드게임이었는데, 룰을 배우는데 처음엔 전혀 감이 안 잡혔다. 그 카드가 왜 거기서 나오지...? 하지만 몇 판 돌리면서 점점 룰을 깨쳤다. 지는 사람은 맥주 한잔 원샷 걸고 늦게까지 왁자지껄 놀았다. 생일 케이크는 없었지만 이런 파티와 축하는 언제든 좋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