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단길 이야기-2
#4 칭다오의 주말
"노 샤워, 쏘리, 노 샤워"
호스텔 스탭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호스텔은 꽤 큰데 샤워실이 없다는 사실에 꽤 놀랐다. 같은 방을 쓰는 쓰호와 다른 친구들에게 "얘들아 여기 샤워실 없대!" 했더니 다들 "웬 샤워?" 이런 반응이 돌아와 또 놀랬다. 호스텔 스탭 어깨에 소복한 비듬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구나.
단지 샤워실 때문은 아니지만, 아침에 호스텔을 옮겼다. 내가 묵었던 드래곤 호스텔은 유명한 미식 골목인 피차이위엔 안에 있어서 시끄럽고, 하루 종일 음식 냄새도 많이 올라와서 불편했다. 대신 바로 옆 골목에 있는 휘트 호스텔은 가격도 더 싸고 시설도 괜찮은 곳이었다. 분명 어제는 자리가 없었는데, 오늘은 자리가 났다. 귀여운 안마당도 있고, 크림색 외벽에 붉은 기와를 올린 건물도 예쁘다.
체크인을 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오늘 할 일 목록을 뽑았다. 기차역 가기, 해변 산책, 대학로 커피거리에서 커피 마시기. 부지런한 여행자라면 이 정도 일정은 소화해 줘야겠지. 호스텔에서 나와 볶음면으로 아침을 후루룩 먹고 가장 가까운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칭다오 기차역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중국 기차역은 대합실과 티켓 오피스가 나눠져 있어 대합실에 들어가려면 기차표가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티켓 오피스를 못 찾아서 버벅댔지만 무사히 미리 예약했던 표를 받아 뿌듯한 마음으로 걸어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쉽구만?' 비록 사람들이 새치기 시도를 많이 했지만, 나는 앞사람의 등 뒤에 찰싹 붙어있었다.
역에서 칭다오 (혹은 칭다오 맥주)의 상징인 잔교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골목 모퉁이를 돌수록 바다 냄새가 진해지더니 마침내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변이 보였다.
잔교는 사람만 많을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칭다오 맥주 상표 속 건물이 이곳이다, 하는 의미부여랄까. 하지만 다리 위를 가득 메운 사람들 때문에 이제 나에게 칭다오 맥주는 저 사람들과 같이 기억될 거다. 잔교 양쪽으로 펼쳐진, 녹조가 가득 붙은 바위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뭔가를 다들 열심히 줍고 있었다. 진짜 먹으려고 줍는 건 아니길 바랬다.
해안가에서 벗어나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학로 커피거리가 나온다. 과거 독일이 지배할 당시 조성된 깔끔한 유럽식 거리라 그런지 아기자기한 가게나 카페가 많았다.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커피값이 비쌌다. 하지만 다리가 너무 아파서 그냥 앉아버렸다. 중국이지만 친숙한 카페의 분위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찬 음료를 홀짝이며 소파에 가장 편안한 자세로 기대앉아 시간을 보냈다. 카페 바깥은 위험으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 이 소파는 익숙하고 안전한 세계처럼 느껴졌다.
저녁에 돌아온 호스텔은 오전과는 달리 12인실 방이 가득 차있었다. 같이 맥주 한 잔 할 친구 없을까 하는 마음에 눈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모두 말을 걸었다.
"니하오!"
하지만 다들 외국인인 나를 슬금슬금 피하고 싶은 눈치였다. 어쩔 수 없지, 편의점에서 칭다오 한 캔을 집어 들고 안마당에 혼자 앉아 꿀꺽꿀꺽 마셨다. 혼자 마시는 술은 왠지 모르게 빨리 마시게 된다.
#5 짭짤한 바지락 볶음
맥주의 도시 칭다오지만, 나는 맥주 박물관에는 큰 흥미가 없었다. 맥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게 나한테 중요한가? 나한테 중요한 건 어떻게 먹느냐니까. 그런 의미에서 박물관 바로 앞, 맥주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는 맥주 거리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지도 어플에 찍어본 박물관은 호스텔에서 걸어서 1시간 반, 버스로는 20분.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던 나는 망설임 없이 걷기 코스를 선택했다.
자신만만하게 출발했지만 한 시간쯤 부지런히 걸어 맥주 거리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잔뜩 흐려진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관광지 식당이 그렇듯, 아주머니들이 거리에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식당마다 같은 메뉴에 가격들. 어딜 가도 비슷할 것 같아서 눈에 들어오는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뉴판을 다 보지도 않고 맛있다던 바지락 볶음과 생맥주 작은 들이를 주문했다. 아주머니가 가져다주신 맥주통은 엄청 컸다. 작은 거 시켰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이 안 통해서 종이에 작을 소(小)자를 써서 보여줬지만 이게 제일 작은 거 맞단다.
마늘맛이 밴 짭짤한 바지락을 까먹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며 맥주를 홀짝였다. 비록 물통 같은 맥주를 다 마시지는 못했지만, 이미 살짝 어지러웠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걸어서 돌아갈 수는 없고, 무슨 버스를 타야 할지도 막막했다. 하지만 생맥주로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옆 테이블에 있던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
"나 피차이위엔 가는데 여기서 어떻게 가면 될까?"
"우리도 피차이위엔 가는데? 조금 있다가 일어날 건데 너도 같이 가자! 태워줄게"
한동안 번역기로 필담이 이어진 끝에 얼떨결에 합석까지 하게 됐다.
내가 할 줄 아는 중국어는 10마디 남짓. 그 10마디와 중학교 때 배운 한자, 바디랭귀지를 적절히 섞어가며 얘기를 나눴다. 이름을 알려줬는데 내 이름을 발음을 못했다. 그래서 한자로 써서 보여줬더니 '쉬엔지엔'이라고 발음을 해줬다.
"쉬엔지엔도 나쁘지 않네, 하하 어쨌든 태워줘서 고마워!"
#6 첫 야간기차
시안으로 가는 기차는 1시 40분에 출발한다. 하지만 괜히 긴장해서 그런지 아침에 눈이 일찍 떠졌다. 씻고, 짐 싸고, 화장실도 갔다 오고. 중국에 온 지 일주일도 안됐지만 쪼그리는 변기에 적응해가는 중이다. 처음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해결한다. 쪼그리는 변기가 더 몸에 좋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도 난다.
가방을 들쳐 메고 호스텔을 나서 모퉁이에 있는 그전부터 한번 가야지 했던 식당에 들어갔다. 아저씨 혼자 하는 식당이었는데, 메뉴 속 볶음 요리를 가리키며 '소 우(牛)' 자를 써보이자 아저씨는 '돼지 돈(豚)'이라고 써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음식을 받아먹었다. 중국 와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는 밥이었다. 진작 갔으면 4일 내내 갔을 텐데, 아쉽다.
"미빤(米饭)"
손가락을 들어 밥을 한 공기 더 추가했다. 결국 밥을 두 그릇 먹었다. 돼지고기볶음 양이 많아서 도저히 다 먹을 수는 없었다. 두 명이었으면 나눠 먹었을 텐데... 아쉬움이 들었다. 슈퍼에 들러 기차에서 먹을 라면과 물을 샀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대합실에 앉아서 1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내가 타고 갈 기차와 마주하는 시간. 기차가 너무 길어서 걱정이 됐다. 이게 굴러가기나 할까? 중국 기차 좌석에는 3가지 등급이 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가는 잉쭈어, 한 칸에 6명이 들어가는 딱딱한 침대칸인 잉워, 4명이 들어가는 부드러운 침대칸인 루안워. 나는 밤을 새워 20시간을 타고 가야 하기 때문에 침대칸인 잉워를 택했다.
3층 침대 중 가운데 칸을 배정받은 나는 짐을 올려두고 누웠다. 2층 이상으로는 앉아서 허리를 펼 수는 없는 구조다. 이대로 누워서 20시간을 가야 하는구나... 싶었는데 1층을 배정받은 여자애들 두 명이 무언가 물어볼 게 있는지 말을 걸었다.
"팅부동, 워 쓰 한궈런 (모르겠어요, 전 한국인이에요)"
그쪽 친구들의 영어 실력과 내 중국어 실력이 비슷해서 아주 쉬운 단어로 어찌어찌 대화가 됐다. 나랑 목적지가 같아서 신기했다. 허리를 못 펴고 앉는 나를 보고 1층에 있는 자기들 자리에 내려와서 앉을 수 있게 배려를 해줬다. 알고 봤더니 2층 이상 침대를 쓰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들 1층 침대에 앉아서 가는 것 같았다. 가방에서 간식거리가 계속 나왔는데, 할 말도 없고 그래서 조용히 주는 대로 먹기만 했다.
"하오츠...(맛있어요)"
밤이 되고 객실의 불이 꺼지면 할 일이 없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차 안에는 사람들이 코 고는 소리와기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또 다른 어딘가로 나는 밤 새워 달려가고 있다는 감상에 젖어서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창 밖만을 계속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