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파괴 행위를 억압하지 않고 이해하는 교육이 미움을 제거한다
나는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가치에 대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은 사춘기 이전의 무관심한 시기를 넘으면 재산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어린이들이 아무런 강요 없이 무관심을 극복하면 절대로 이윤 추구에 눈이 멀거나 착취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이들은 어른과 다른 가치개념을 가지고 있다. 만약 어떤 학교가 고전적인 그림과 아름다운 가구로써 어린이들을 감격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어린이들은 원시적이다. 그들이 문화에 대한 욕구를 갖지 않는 한 그들의 환경은 가능한 원시적이고 속박이 없어야 한다.
몇 년 전 현재의 학교로 이사했을 때 남자애들이 아름다운 참나무 문에 칼에 던지는 것을 보고 나는 괴로웠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낡은 기차 두 칸을 사다가 방갈로로 개조해 주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야만인들은 마음껏 칼 던지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차는 3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꼴이 그다지 험하지 않다. 이들 중 대부분은 살기가 편하다든지 실내장식이 좋다는 것을 알만한 시기에 이르렀다.
문제아들의 계속적인 파괴충동은 정상적인 아이들의 파괴적인 행동과는 다르다. 정상적인 어린이들의 파괴 행동은 보통 미움이나 불안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환상에서 오는 행동이고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진정한 파괴충동이란 행동에 미움이 수반한다. 그것은 상징적인 살인행위이다. 이런 것은 문제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쟁 중인 군인에게도 나타난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다. 왜냐하면 소위 그들의 직업이 파괴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삶이요, 파괴는 죽음이다. 파괴적인 문제아는 삶에 적대하는 아이이다. 불안해하는 어린이들이 파괴적 행동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어떤 어린이는 자기 형제들이 자기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형제들을 질투할 수 있다. 어떤 어린이는 자기를 구속하는 권위에 반항할 수도 있다. 또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어떤 물건의 내부에 들어 있는 것을 보려고 하기도 한다. 우리는 부서진 물건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파괴 속에 나타난 미움, 즉 상황에 따라서는 그 어린이를 사디스트로 만들지도 모르는 미움을 문제 삼아야 한다.
어느 날 경민의 책상판이 금이 간 채 구부러져 있었다. 친구들이 발을 들어서 위에서 아래로 내리 밟았다. 경민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만든 친구들을 불러서 책상을 망가뜨린 것에 대하여 “경민이 불편하지 않게 원상회복을 해야 하는데 행정실에 가서 책상판을 교체하는 비용을 알아보고 그 비용을 지불할 수 있게 하고, 설비실에 가서 교체를 해달라고 부탁하라.”고 했다. 아이들은 이내 상판이 교체된 책상을 가지고 왔다. 비용은 안 들었다고 한다. 자기들이 저지른 일을 말하지 않고 책상판을 교체해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어떻게 변상하지 않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것도 그들의 능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상판을 못쓰게 만든 아이들에게 도덕적인 잘못을 강조하지 않았다. 보통의 교사들은 ‘공공기물을 훼손하는 것은 잘못이다. 너희들은 잘못을 했으니 ....’와 같은 훈계를 통해서 반성을 강요한다. 나는 그들이 책상판이 갈라지는 상황을 보면서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잘못된 결과가 나타난 것을 통해서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으며,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서 겪게 될 교사의 꾸짖음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잔소리를 쏟아내는 것은 그들의 행동의 원인을 이해하기 보다는 행동을 강화시킬 억압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후에 비슷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행동의 원인을 파악하는데 진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도 알 수 없었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들이 망가뜨린 책상판은 심각한 정도로 문제가 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니일이 경험한 ‘아름다운 참나무 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