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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국 Mar 24. 2019

열등감

21. 자존감의 회복, 주체적인 인간을 키우는 교육

이제 그들은 그 보트를 부두에 끌고 들어올 기선을 기다리던 중이었다이런 식으로 짐은 자기가 잘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그는 남이 학비를 대주는 가난한 학생이었다그러나 그는 백일몽 속에서 자기의 열등감을 보상하려고 했던 것이다.

 환상이 사라지면 삶이 지루해진다모든 창조적인 행위는 환상 속에서 준비된다크리스토퍼 브렌은 성 바오로 대성당의 주춧돌을 놓기도 전에 이미 환상 속에서 완성했던 것이다.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꿈은 현실로 바뀔 수 있다그렇지 못하고 환상으로의 도피일 뿐인 꿈은 가능한 한 제거되어야 한다이런 백일몽에 어린이가 오랫동안 집착하게 되면 발달이 저해된다모든 학교에서 바보라고 일컫는 어린이들은 무엇보다도 백일몽 속에서 살고 있는 어린이들이다한 소년이 자기의 삼촌이 보내 줄 롤스로이스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찌 수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환상과 대체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어린이의 환상을 제거하는 것은 잘못이다그보다 어린이가 자기의 환상을 털어놓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 가장 좋다그러는 중에 어린이는 천천히 그것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될 것이다백일몽이 수년간 계속되었다는 특별한 경우에는 강제로 제거해 버려도 괜찮을 것이다.

건전한 삶을 위해서서는 어린이든 어른이든 자신이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어떤 분야가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학급에서 우월감을 갖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첫째는 반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요둘째는 학급에서 제일 약한 애를 노예로 삼는 것이다뒤의 방법이 더 매혹적이다외향적인 어린이는 이런 방법으로 쉽사리 우월감을 갖게 된다우월감을 가지려고 환상 속으로 도망치는 어린이는 내향적인 어린이다그는 현실 세계에서는 우월감을 갖지 못한다그는 싸움도운동도노래도춤도배우 역할도 못한다그러나 환상 속에서만은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일 수도 있다자기만족은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만큼이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연숙은 만화를 아주 좋아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아주 즐겨했다. 연숙과 만나서 얘기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주로 만화와 같은 상상력을 가지고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연숙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곤란해 했기 때문에 연숙은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주로 상상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나는 연숙을 제대로 이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교단에 서 있던 나는 삶의 경험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연숙을 이해하기가 곤란했다. 유치원 교사가 되어 있는 연숙과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가서 얘기를 나누고 연숙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가 그때 한 얘기들을 이제는 들을 수 있는지 내 자신에게 궁금해진다. 그때 내 마음 속에는 서머힐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았기에 연숙에게 있었던 어떤 과거의 일이 삶에 영향을 미쳐서 만화를 통한 상상의 이야기를 내게 했던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그랬던 것일까?


 은정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활발하게 지냈지만 늘 한 구석에 그늘이 있었다. 은정은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자주 보였다.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가끔 있었다. 어떻게 나를 힘들게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날 어떤 일로 은정의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다. 은정의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서 은정이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은정은 그때 펑펑 울었다. 엄마에게 큰 소리를 질렀다. 왜 선생님에게 그런 얘기를 했냐는 것이다. 은정은 그전까지 내 앞에서 아빠가 살아있는 아이였다. 은정은 돌아가신 아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내가 그 일을 알고 난 이후에 나는 은정을 깊이 이해하는 어떤 말도 해주지 못했다. 아직은 내가 삶의 경험이 부족했던 서른이 안 된 교사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었다면 은정에게 위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가 당당히 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힘을 길러줄 수 있었을텐데, 은정에게 나는 참으로 부족한 교사였다. 교사는 아이들의 변화를 기다리면서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아직 그런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던 교사였다. 내가 안 되는 것이라면 주변에 있는 선배 교사에게라도 손을 내밀 줄 알아야 했다.


강중은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열등감은 지나칠 정도였다. 내가 준비가 좀 더 되었더라면 나는 강중의 열등감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를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열등감이 가난으로 인한 것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지나친 열등감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기회가 되는대로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서 노력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그의 변화를 위해서 그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주려고 노력을 했을 뿐이다. 그는 강원도 진부로 전학을 가서 많은 성장이 있었다. 이제 그를 다시 만나면 그 시절에 그가 겪었던 어려움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열등감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것을 떨쳐내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에 대하여 나름의 의견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의견을 어디에서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아니면 전혀 써먹을 경우가 없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은희는 아주 작은 글씨를 써서 시험을 보고 난 후에 그의 답안지를 채점하려면 루페를 들고 확대한 글자를 보면서 채점을 해야만 했다. 그가 가진 자존감의 크기는 답안지에 쓰인 글자만큼 작다고 느꼈다. 은희의 답안지를 채점한 후에 은희에게 “좀 더 글씨를 크게 써도 괜찮아”하고 이야기를 해준다. 은희는 꽤 많은 교과서적인 지식에 대하여 생각한 것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학생들 전체로 보았을 때 평균적인 점수에 가까운 점수를 얻었다. 은희가 나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더라도 나는 그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 다음 시험에서도 루페를 사용하여 채점을 해야 했고 내가 그와 헤어질 때까지 그런 일은 계속 되었다. 다른 교사들도 은희의 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해서 많이 애를 썼다. 은희의 아주 작은 자존감은 교사와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가 중학교를 떠날 즈음에 그가 쓴 글자는 조금 커졌다고 들었다. 그의 자존감도 조금 커졌던 것일까? 은희의 열등감의 원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그것에서 빠져나와 온전히 자존감을 회복하여 당당한 글자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언제쯤일까?


 교육은 인간이 주체로 살아가는데 의미가 있어야 한다. 주체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모든 지식은 그에게 허위이다. 객체로 남아 주체를 가두는 감옥에 불과하다. 폭력이다. 그래서 삶을 위한 학교가 필요한 것이다. 지식이란 감옥이 아닌 온전히 회복된 정서를 바탕으로 인문, 철학, 역사를 이해하고 그 바탕위에서 소통하고, 현실을 직시하며 비판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더불어 협력할 줄 아는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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