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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U Nov 28. 2019

행복한 라짜로 해석

네오 리얼리즘으로 본 이탈리아의 현실

'해석' 글이므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행복한 라짜로>는 성경 말씀을 잘 몰라도 되지만, 성자에 대한 이미지는 명확히 떠올려야 한다. 개신교 성경에는 ‘나사로’로 번역된 ‘라자로’는 예수에 의해 부활한 성자로 요한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루가 복음서에는 독실했던 라자로가 현생에서 빈곤함을 잊고 천국에 갔다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라자로를 무시했던 바시리아(바리새)인은 지옥에 갔다는 대목에서 부의 유무와 구원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제 영화를 살펴보자!


백열전구가 부족하고, 10여 명이 한 방에서 자야 하는 인비올라타 마을에 있는 담배 농장에서 갑자기 구혼의 노래가 들려오고, 대가족이 함께 두 사람을 축하하던 자리에서 두 남녀는 갑작스럽게 마을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마름 니콜라는 젊은 연인을 은근히 협박한다. 거기서 마을 주민들이 전구가 부족한 이유가 밝혀진다. 주민들이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쉬지 않고 일했지만, 마름이자 중개상인 니콜라에게 몇 가지 생필품을 구입하고 나면 늘 빚만 남는다.


그 부채로 인해 인비올라타 마을의 지주 겸 영주인 ‘담배의 여왕’ 루나 후작 부인에게 순종한다. 그녀의 교묘한 통치는 인비올라타의 주민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소작이 법으로 금지된 지 오래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동네 아이들을 그녀가 직접 훈육하면서 자신의 착취와 지배를 합리화시킨다. 이에 후작 부인의 아들 탄크레디(루카 키코바니)는 어머니에게 “저들이 진실을 알게 될까 봐 겁나지 않나요?”라고 일갈한다. 이에 후작 부인은 “저들은 개돼지나 마찬가지야. 풀어주면 자신들이 비참한 노예임을 알게 되지. 저 애(라짜로)를 봐. 난 농부들을 착취하고 그들은 저 애를 제 착취하지.”라고 자신을 교묘히 합리화한다.


 마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라자로’의 이름을 부르는데, 마치 신을 갈구하는 기도 소리처럼 들린다. 인간은 신에게 언제나 저마다의 소망을 기도드리지 않는가? 라자로는 그 부름에 항상 최선을 다한다. 농노들에게 착취당하는, 라자로에게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하는’ 예수의 공생애가 엿보인다.


자유를 갈망하는 탄크레디는 라찌로와 의형제를 맺고, 납치 자작극을 벌인다. 봉건제가 무너뜨린 시민혁명은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끌어들임으로써 이뤄졌듯이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라짜로와 탄크레디의 우정은 새총을 매개로 한 기사 서훈이다. 이를 통해 탄크레디가 개혁적이긴 하나 봉건적인 인물임을 암시한다. 나중에 그는 실제로 근대화(도시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이때 감독은 탄크레디가 틀어놓은 카세트를 통해 우리는 이 시대가 1980년대임을 슬며시 흘린다.


우발적 납치극이 불러온 경찰의 등장으로 인비올라타 마을에 굳건했던 봉건 제도는 종식된다. 이 후작부인의 대 사기극은 198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그대로 차용했다고 감독은 밝혔다.


한편, 인비올라타의 주민들이 모두 구출되었지만, 열병에 시달렸던 라짜로는 절벽으로 떨어진다. 늑대와 이야기할 수 있는 성자의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 끼어들고 울음소리로만 등장했던 늑대가 진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죽은 듯했던 라짜로의 모습 위로 이런 이야기가 얹힌다. “늑대가 그를 발견한다. 그에게 다가간 늑대는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잡아먹으려 하지만 처음 맡는 냄새에 멈춘다. 무슨 냄새였을까. 그것은 선한 사람의 냄새였다.” 그렇게 라짜로는 예수의 기적 대신 늑대의 울음소리에 부활하고, 탄크레디를 찾아 도시로 향한다. ‘라짜로’라는 성자의 몸을 빌려 더 넓은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 봉건주의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를 연결한다.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골적인 착취의 시대가 아닌 더 새롭고 더 유혹적인 착취의 시대”로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그가 처음 만난 사람은 마름 ‘니콜라’다.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불법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하는 노동 브로커로 변모해있었다. 그는 취업을 빌미로 더 낮은 임금으로 일할 사람들을 모객하는 행위에서 소작농과 지주의 착취 못지않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착취를 대놓고 풍자한다. 게다가 니콜라는 성자를 쫓아낸다. 이로써 라짜로는 ‘노동자’로써 취직하지 못한다.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안토니아(알바 로르바케르)'이다. 그녀는 라짜로에게 무릎 꿇고서 성자의 부활을 유일하게 알아차린다.(앞서 순교한 성녀들의 사진에 입을 맞추는 존재 역시 젊은 시절의 안토니아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들은 절도와 사기로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형편이다. 대사기극을 전하는 신문 가사는 “그녀(후작 부인)는 이들의 사회적 진보를 가로막았고, 강제 노역과 빈곤 속에 살게 했다"라고 기록하지만, 악덕 지주로부터 해방되었음에도 안토니아 가족은 여전히 가난하다. 즉, 시민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로부터 아무런 교육도, 생산 수도도 없이 도시에 던져졌다. 농노에서 도시 빈민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들은 여전히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이다.


세 번째로 만난 사람은 '탄크레디'다. 친구이자 형제를 자처했던 그는 부르주아였지만, ‘은행’이라는 거대 자본 앞에 전 재산을 잃었다. 이른바 자본의 집적∙집중 경향이다. 쉽게 말해 자본가 역시 노동자처럼 독점자본가에게 소외된다는 현상 말이다. 이 가난한 부르주아는 (좀비들이 백화점에 모여들 듯) 과시적 소비습관은 여전하다. 그는 은행에 허위 명의로 부동산을 팔려고도 하고, 안토니아 가족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한다. 그러나 성자의 수난은 끝나지 않는다, 라짜로와 안토니아 가족은 탄크레디의 집에서 퇴짜 맞는다. 이로써 두 계급 간의 화해는 영영 물 건너간다.


돌아오는 길에 음악에 이끌려 성당에 찾아가지만 이번엔 수녀들에 의해 쫓겨난다. 만민을 평등하게 대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이에 성자는 조그마한 기적을 일으킨다. 오르간에서 찬송가가 사라지고, 라짜로가 걷는 길 위로 “음악이 우릴 따라오고 있어."라고 사람들이 외친다. 아직은 종교가 신도들을 가난에서 직접적으로 구제할 수 없지만, 정신적 위안을 건넬 수는 있다.


마침내 라짜로는 돈키호테처럼 새총을 들고서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후작부인 못지않게 인비올라타의 주민들을 핍박하는 ‘자본’은 국적도 성별도 없다. 금융 시스템에 의탁한 자본은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하느님을 만지거나 볼 수 없듯이 자본주의 역시 그러하다.


이처럼 실체가 없는 악과 맞닥뜨린 성자는 사회구조적 문제 앞에서 무력하다. 자신이 구원해야 할 양(대중)들에게 살해당한다. 그 광경을 지켜본 늑대가 시내 한복판으로 뛰쳐나간다.



먼저 ‘늑대’란 뭘까? 동화나 성경처럼 잔인한 짐승일까? 영화 속 늑대는 절대로 라찌로를 헤치려 들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공식 국가 동물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늑대가 국가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늑대가 이탈리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전설에 의해서다. 탄크레디가 라짜로에게 ‘우리 아버지가 너희 어머니를 겁탈했을지 모르니’ 형제를 맺자고 한다.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어머니 레아 실비아는 마르스 신에게 유혹 당한다. 그리고 인간이 보름달을 뜨는 밤에 늑대로 변한다는 프랑스 설화는 전 유럽에 퍼져있다. 영화에서 이를 어떻게 조합했을까?


탄크레디는 ‘달의 표면’이라며 메마른 땅으로 라짜로를 데리고 가니까 어딘가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린다. 탄크레디는 흥미로운 듯 귀를 기울이더니 울음소리를 흉내 낸다. 이에 응답하듯 다른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 장면은 후반부에도 반복된다. 도시에서 탄크레디는 안토니아 가족과 만난다. 탄크레디는 둥근 냄비를 손에 쥐더니 ‘작은 달님’이라고 칭하며 손 위로 들어 올린다. 마치 보름달이 뜬 것처럼 둘은 다시 늑대 울음소리를 내고, 이번에도 응답이 들려온다. 이어 스테파니아를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을 잠시 과거로 되돌리는 기적을 연출한다.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이같은 장치로써 관객들을 설득한다.




요한복음서의 '라자로의 부활'을 빌어왔지만, <행복한 라짜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자본주의 시스템'이다.이 영화가 빈민들의 가난을 그린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형식에 기반했기 때문이다.묘하게 <기생충>과 비슷하다. <기생충>이 한국이라는 배경을 활용해 계급문제를 다뤘다면, <행복한 라짜로>는 이탈리아 사회구조에 깊숙이 뿌리박힌 착취와 빈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시로 내몰리는 과정에서 무엇을 빼앗겼는지, 공동체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우화적으로 표현한다.


먼저 고립된 '인비올라타 마을'은 무엇을 상징할까? 역사적으로 이탈리아는 극단적인 지방분권과 자급자족을 기본적인 성격으로 하는 사회였다. 그래서 혈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한 중소기업 위주로 발전했으나 이런 경제구조가 세계 8위의 경제대국 이탈리아의 한계이기도 하다. 정치계의 부패지수도 높고, 남북 간 경제 격차는 무척 심각하다. 그래서 공동체가 해체되는 과정은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연상시킨다. 영화에 그대로 적용해보면 전반부는 농업 위주의 가난한 이탈리아 남부이고, 후반부는 공업이 발전한 이탈리아 북부지대로 이해하면 편하다. 농노 봉건제가 잔존하는 이탈리아 남부와 서유럽에서도 손 꼽힐만큼 부유한 이탈리아 북부의 차이를 <행복한 라찌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인비올라타 주민들이 도시로 나가는 과정도 다음과 같이 설명 가능하다. 중세에는 농노들이 비록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없었으나, 관습적 경작권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출현하면서 생산수단(토지)에 대한 권리를 상실한 농노들과 상속을 받지 못한 지주의 자손들이 도시로 흘러들어가 노동을 판매하고 임금을 받으면서 ‘노동자’라는 계층이 탄생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불행하게도 그들은 룸펜 프롤레타리아(일용직 노동자 혹은 실업자)로 전락한다.


다음으로 '착취'를 알아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착취는 도덕적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적으로 ‘착취’란 생산수단과 노동이 분리된 상태에서 노동자의 몫인 부가가치를 자본가가 가져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모순은 생산수단이 노동자와 분리되어 있는 현상이지 노동자의 빈곤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자본가가 부를 과시해도 자본주의 모순은 발생하고, 반대로 노동자가 부유해도 똑같이 자본주의 모순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행복한 라짜로>에서 착취는 전반부와 후반부 개념이 다르다. 중세 농노제에는 지주, 한 개인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지만,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회구조 하에서 전방위적으로 발생하므로 윤리적 행위로 판단 내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라짜로에게 총이 아닌 새총이 쥐어준 것이다. 그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시스템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라짜로가 ‘새총‘을 수여받는 중세적 기사도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다. 기독교는 시대에 따라 변천해왔다. 로마시대에는 박해와 탄압을 받았고, 당시 아직 성경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서기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쯤 가야 우리가 아는 성경의 형태가 어느 정도 갖춰진다. 중세 시대에는 기독교를 등에 입은 교황은 세속군주 못지않은 절대 권력을 누리다 계몽주의가 도래하자 서구사회에서 주도적 위치에서 내려온다. 그렇지만 막스 베버는 청교도의 청부 사상이 자본주의를 발전하는데 공헌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기독교가 그 시대의 변천에 따라 알맞게 적응한 것이다. 그러므로 새총은 라찌로와 탄크레디가 여전히 세속주의 이전의 신앙관에 머물고 있음을 설명하는 영화적 상징이다.


끝으로, 라짜로의 순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톨릭은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세속주의를 받아들였다. 세속주의(secularism)란 기구나 관습, 가치관, 그 소속된 사상들이 종교나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18세기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기독교는 문화적 뿌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이미 'Believing Without Belonging (소속없는 신앙)' 혹은 'Unchurched Christian (교회 없는 크리스천)' 같은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보통 가나안 성도로 지칭되는 데 '교회를 사랑하지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교회 출석이 기독교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결과와, 동성결혼과 임신중절 등의 이슈에 있어 전통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비율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서유럽 기독교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현재 기독교신자를 살펴보면 비서구권 신자들이 약 75% 정도 차지한다.


극중 라짜로와 동네 주민들은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했다. 즉, 라짜로로 대변되는 종교가 결국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는데 실패했다. 그것이 이 영화가 내린 결론이다.



★★★★ (4.2/5.0)


Good : 현재 경제구조 하에서 도덕적 해이가 왜  발생하는가?

Caution : 이탈리아 사회와 경제구조에 대한 이해가 살짝 필요하다.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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