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Horses·(2022-6)
믹 헤론이 2010년부터 쓴 베스트셀러 ‘슬라우 하우스(Slough House) 시리즈를 애플TV에서 제작했다. 슬라우 하우스는 MI5(영국 보안국)에서 문제를 일으켜 좌천되는 올더스게이트 지부의 별명이다. 한직으로 밀려난 이곳의 요원을 "느린 말들"(Slow Horses)이라고 지칭된다. 근대 이전의 교통수단인 말이 느리면 퇴물 취급받는 것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뜻이다. 잠복요원들은 유충(애벌레)이 성충보다 긴 "매미"로 비유되고, 전투요원은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개”로 지칭된다. 외부평가원들은 대항군으로 훈련 상대인 관계로 "(종이) 호랑이"라 불린다.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본격적으로 애플TV 드라마를 살펴보자!
《슬로 호시스》은 첩보물 이전에 직장 코미디이다. 영국은 제임스 본드 같은 슈퍼스파이도 배출했지만, 직업으로서 스파이 캐릭터들 해리 파머, 조지 스마일리를 배출한 나라이기도하다. 《슬로 호시스》은 후자의 입장을 따른다. 쉽게 말해 스파이를 공무원으로 대한다. 주무대인 슬라우 하우스 지부는 MI5 본부가 맡기가 꺼려지는 위험한 업무를 떠넘겨 받는다. '느린 말들‘은 어차피 결격 사유가 있어 쫓겨난 요원들이라 미디어에 알려져 문제가 될 만한 민감한 사안들을 처리토록 하고 문제가 생기면 '꼬리 자르기‘를 하면 그만이다.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직장생활 부조리가 강조되고 “느린 말들”은 `사내 정치‘의 희생물로 그려진다. 제작자 윌 스미스는 "안티 본드"라고 제작 방침을 정했고, 존 르카레 소설처럼 국가기관에 이길 수 없는 요원들의 게임을 영국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로 승화시키고 있다.
주요 인물을 살펴보자면, 지부장 "잭슨 램(게리 올드만)"은 제임스 본드와 대척점에 선 조지 스마일리(존 르카레의 페르소나)의 오마주다. 무뚝뚝하고 무례한 언사를 서슴지 않는 악질 상사 같지만, 부하가 저지르는 사고를 수습하는 책임감 있는 리더로 그려진다. 과거에 동료 13명을 잃은 경험 때문에, 수하들이 본부에 의해 소모되고 버려지는 꼴을 못 보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통해 램이 보여준 신중함과 민첩함, 전혀 관계없는 단서들을 하나로 묶어낼 줄 아는 뛰어난 추론능력은 그를 현실적이고 지적인 스파이로 평가하게 한다. 실제로 타버너 부국장은 냉전 당시 동독 슈타지(국가안전부)로부터 총도 맞고, 고문도 당하고 억류되었음에도 살아 돌아온 '전설‘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존르카레 원작의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게리 올드만이 맡은 조지 스마일리가 캐릭터 모티브라고 원작자가 밝혔다.
램과 티격태격하는 MI5 부국장 '다이애나 타버너(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은 출세를 위해서라면 국장도 재껴 버리는 야심가로 슬라우 하우스를 차기 국장이 되는 발판으로 삼으려고 해서 램과 대립한다. 그녀는 리전트 파크(MI5 본부)도 어딘가 비틀어져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현장요원 "리버 카트라이트(잭 로던)"은 훈련 성적이 저조해서 최근에 슬라우 하우스로 전입한 신참이다. 그런데 스파이라기에 너무나 선량하고 심성이 곱다. 그의 할아버지가 MI5의 은퇴한 고위간부인 데이비드 카트라이트(조너선 프라이스)로 그 기대에 부응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다.
다른 슬라우 하우스 요원들도 한직으로 밀려난 결격 사유를 갖고 있다. 누구는 알코올 의존증이 있고, 누구는 기밀 서류를 허술하게 다뤘고, 동료들로부터 평판이 나빴다던지 결점을 갖고 있다. 이 오합지졸들이 본부의 실적이나 올려주고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전락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왠지 모르게 직장인의 애완처럼 느껴진다. 스파이 장르답게 새로운 갈등 상황, 가령 경제적·사회적 측면에 착안해서 정치적 현안을 극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스파이가 현실에서 달아나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즌 1에서는 〈Slow Horses〉을 원작으로 극우단체 '앨비언의 아들들‘이 파키스탄계 영국인을 납치하는 사건을 다뤘다. 혐오 정서에 의존하는 보수 우파 정치인의 인기 관리, 그에 복무하는 언론인의 가짜뉴스 그리고 출세 도구로 삼은 MI5 부국장의 오판이 이뤄내는 삽질의 연속은 실소를 금치 못한다. 그러니까 요원도 정치인도, 기자도, 악당들도, 말도 안 되는 믿음에 집착하여 위험을 자처하는 꼴이다.
시즌 2에서 구소련의 슬리퍼(잠복) 요원이 벌이는 테러를 다뤘다. 원작인 〈Dead Lions〉은 2013년에 골드 대거 상을 받은 소설로, 존 르카레의 분위기가 진하게 풍긴다. 냉전이 끝났고 포스트 9·11 시대에 접어든 지금도 고집을 꺾지 못하는 전직 KGB 요원의 복수극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반대로 슬라피 하우스의 낙오자들은 우정, 충성심, 애국심과 같은 과거의 고결한 가치들이 잊지 않는다. 존 르카레를 인용해서 설명하자면 “우린(스파이는) 과거의 유산이 될지 미래의 구성원이 될지 결정해야 한다”는 태도다.
시즌 3은 〈Real Tigers〉을 원작으로 조직을 보호한다는 허울 앞에 내부 고발자를 자살로 위장한 사건을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정보기관이 스스로의 무능과 아집으로 실패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동시에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이며 작전에 희생되는 스파이들이 대단히 불쌍하게 그려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냉혹 하지만, 대단히 유능하고 효율적인 첩보조직의 신화화를 무너뜨린다.
시즌 4는 테러리스트를 지원한 정황을 감추려는 첩보기관과 할아버지를 암살하려는 손자 리버의 추적, 두 가지 이야기를 병행하며 진행한다. 원작 중 최고작이라 평가받는 소설〈Spook Street〉을 각색하며 새롭게 연출을 맡은 애덤 랜들은 기존 시리즈의 명성을 이어나가는 데 성공한다. 다만, 두 개의 메인 플롯이 찰싹 달라붙지 않고 클라이맥스가 다소 밋밋한 것이 다소 아쉽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협적인 건 무능하고 무책임한 '리더들' 때문일지 모른다. 조직에서 '결정권자'가 절대적이라는 것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피부로 느낄 것이다. 잭슨 램이라는 영웅상은 직장인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던진다. 끔찍한 업무 환경 속에서 계획대로 일은 풀리지 않고,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설령 슬라우 하우스가 성과를 낸다고 해서 본부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다. 직업적 회의가 들지 않는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슬로 호시스》의 주인공들은 공무원으로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
결론적으로 《슬로 호시스》는 스파이의 세계를 실패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경쟁 구도에서 밀려난 루저들이 바라본 조직 생활을 건조한 유머로 풍자하고, 위로하고 있다.
★★★★☆ (4.5/5.0)
Good : 직장인의 애환을 달래다.
Caution : 제이슨 본은 여기 없다.
●이번 시즌도 성공적이라 《시즌 6》 제작이 결정되었다.
■믹 재거가 주제가 'Strange Games'를 작곡하고 불렀다. 참고로 롤링스톤즈는 007 주제가를 거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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