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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Oct 09. 2024

낮은음자리표 (3)




  나는 그녀의 무명 시절이에요. 유인형에게 없는 무명 시절을 채워 준 거죠. 무명 시절이 있어야 지금의 성공이 더 빛날 수 있어요. 내가 있어야 그녀는 완벽해져요.   


  공식 팬클럽을 다시 열게 된 날, 동영상을 찍어 팬들에게 환영 메시지를 보냈다. 유인형이 실종된 뒤 멈춰 있었던 공식 팬클럽이 다시 운영된다는 기사가 뜨고 SNS에 플랫폼 주소가 퍼지자 하루 만에 가입자 수가 만 명 넘게 늘었다. 종종 인형 언니 또는 인형 누나라는 말을 잘못 써서 인영 언니 혹은 인영 누나라고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글들에는 친절하게 댓글로 이름이 틀렸다고 말해 주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이름이에요. 공지 글에는 금지 단어로 흉내, 사칭, 사기, 실종 같은 단어들을 추가했다. 그 단어를 검색해서 나오는 글들은 매니저가 삭제했다.


  포털 사이트에 뜨는 프로필 사진은 기획사에서 제공한 사진으로 바뀌었다. 인물 정보 중 작품 활동에 내가 출연했던 독립 영화들도 추가되었다. 이상하게도 ‘가위’라는 영화 제목이 ‘가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편집 권한을 신청하고 제목을 수정했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수정 전의 제목으로 바뀌었다. 그 영화를 볼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아 몇 번 수정하다 멈췄다.


  최근의 방송 활동에는 패널로 나갔던 예능 프로그램 몇 개가 추가되었다. SNS에 셀카도 이틀에 한 번꼴로 올렸다. 정면 사진보다는 풍경이 많이 나오는 사진, 실루엣만 있는 사진, 머리를 길게 내린 채 옆모습만 나오는 사진을 올렸다. 태그는 유인형의 말투를 따라 했다. 이를테면, ‘#오늘기분은해피인형’처럼 말끝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감정을 표현하는 식이었다. 싸이월드 시절 유인형의 미니홈피를 캡처해 둔 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글 아래에 팬들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진짜 유인형을 찾는 댓글은 없었다. 활동을 응원하는 댓글들만 줄을 이었다. 며칠 뒤에는 단막극 촬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중국 드라마 쪽에서도 러브콜이 들어왔고 로드숍 화장품 광고도 계약되어 있었다. 화장대를 보았다. 화장대는 텅 비어 있었다. 화장을 덧바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색조 화장품뿐만 아니라 기초 화장품까지 버린 지 오래였다. 화장품 광고를 찍은 뒤에도 화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면은 이제 완벽히 얼굴이 되었다. 가면을 잡아당기려고 해 봐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에 유인형이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최신 기사에는 대본 리딩에 관한 기사들만 나열되어 있었다. ‘관련도순’으로 검색 조건을 바꾸었다. 결과는 똑같았다. 다시 검색창에 ‘유인형’과 ‘실종’을 같이 쳐 보았다. 진짜 유인형의 기사가 떴다. 유인형이 실종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프로그램은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유인형은 붉은 수탉 모양의 가면을 쓰고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채 여자 아이돌의 노래를 재즈풍으로 불렀다. 그리고 1라운드에서 탈락해 한 주 만에 촬영을 끝낸 뒤 다음 날 홀연히 사라졌다. 휴대폰도, 지갑도 방에 그대로 둔 채였다.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전국에서 유인형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도 유인형을 봤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기사 사진은 모두 유인형이 가면을 벗었을 때의 얼굴을 따서 사용하고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1라운드에서 탈락한 자신에게 실망해서였는지, 아니면 프로그램에 괜히 나왔다고 후회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인형의 표정을 따라 얼굴을 일그러뜨려 보았다. 거울을 보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당신 때문에 유인형이 사라진 거 아니에요?


  매일 수십 개씩 올라오는 팬들의 글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제목이었다. 금지 단어를 설정했는데도 실종 대신 ‘사라지다’라는 말을 교묘하게 썼다. 그 글을 클릭했지만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디는 붉은수탉이었다.


  댓글에는 나를 모함하지 말라는 내용이 많았다.

  유언비어 퍼뜨리지 마세요.

  일부러 성형 수술이라도 해서 똑같이 행세한다는 거예요?

  뭐 어때요, 유인형 씨와 똑같잖아요.

  이게 원래 내 얼굴이라고 적어 주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단막극의 대본을 연습했다. 나는 주인공의 약혼자를 빼앗는 악녀 역할이었다. 특이하게 재벌가나 상류 사회가 아니라 대홍수가 나서 지역들이 하나하나 무너지고 있는 재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제주도에서부터 잠기기 시작해서 서울 쪽으로 빠르게 홍수가 밀려오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내가 맡은 악녀가 살고자 하는 생각보다는 다른 남자를 탐내는 욕망이 더 크다는 것이 놀라웠다. 물론 악녀는 주인공보다 먼저 홍수에 휩쓸릴 것이다. 주인공 남녀가 재난 속에서도 사랑을 싹틔우고 서로 의지하면서 생명을 연장하는 동안 차가운 물에서 빠르게 식어 갈 것이다.      


  저 남자를 가진 당신을 닮고 싶었어. 저 남자의 여자가 되는 걸 포기하지 않을 거야, 오늘 죽게 된다면 더더욱 포기하지 않을 거야. 무조건 저 남자의 여자로 죽을 거야!

  (유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인이 있는 쪽으로 홍수가 빠르게 밀려온다.)     


  악에 받친 대사를 연습하던 도중 가면이 참지 못할 정도로 간지러웠다. 쥐어뜯을 것처럼 가면을 잡아당겼다. 가면은 밀가루 반죽처럼 탄력 있게 늘어나다가 퉁, 소리를 내면서 다시 얼굴에 달라붙었다. 온 얼굴을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간지러웠다. 바닥을 뒹굴면서 소리를 질렀다. 길게 자란 손톱으로 얼굴을 긁었지만 간지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양 뺨을 번갈아 가며 때렸다. 두드러기가 심하면 응급실에 가야 한다던데 죽어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소중한 가면을 의사들의 손에 맡길 수는 없었다.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유인형처럼 보폭을 크게 해서 걸었다. 세 걸음도 못 떼고 넘어졌다. 다시 일어났다. 조문객 아르바이트를 한 뒤 마지막으로 일어날 때의 동작과 비슷했다. 마지막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무대에서 퇴장해야 했다.


  돌돌돌,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대신 늙었으면 좋겠다.

  돌연 떠오른 생각이었다.


  겨우 발걸음을 떼어 화장대로 다가갔다. 거울을 보았다.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눈물에 젖자마자 가면이 마르기 시작했다. 말라 가는 과정이 슬로 모션처럼 눈에 보였다. 새로운 눈물도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 얼굴을 보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아그그그, 하는 서러운 외침이 가면 속에 있는 입을 뚫고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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