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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레티아 Jul 14. 2023

가족과 연을 끊어도 법적으론 안 끊어져요

중환자실 실습 썰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각색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플 때 법적인 보호자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의식이 없이 쓰러졌을 때, 응급의료는 물론 전문의 2명이 동의하면 시행해 주겠지만 긴가민가하거나 애매한 경우는 법적인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기숙사 룸메이트? 나를 응급실까지 데려가주겠지만 권한이 없다. 학교 교수님? 의대생이니 좀 더 신경 써서 치료해 줄 수도 있지만 권한이 없다. 남자친구? 제일 먼저 연락이 될 수는 있겠지만 권한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동거인이나 친구가 아니라 "법적" 보호자를 꼭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20년 동안 별거를 했어도 법적으로 이혼을 안 하면 그 20년 전 인연을 찾아야 한다. 부모님과 연을 끊었어도 법적으로 끊긴 건 아니라서 부모님을 찾아야 한다. 그게 좀 안타까운 것 같다. 사실은 친구보다 못한 사람들일 수 있는데, 법적인 것은 가족이 꼭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1. 신경과 중환자실

길바닥에서 쓰러져 있어 119가 데려온 환자였다. CT를 찍어보니 뇌출혈이 있었다. 처음에는 출혈량이 많지 않았고 뇌부종도 심하지 않아 일단 약을 쓰면서 지켜보기로 하였다. 며칠이 지나고, 의식은 안 깨고 출혈이 멎질 않고 뇌가 부어 머리를 열어 감압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 왔다.

그런데 그 환자의 가족을 못 찾았다. 휴대폰으로 연락 오는 사람도 없다. 수술을 하려면 동의가 필요한데, 신경외과는 필요하면 동의 없이 열어보겠다고 하지만 사실 나중에 보호자가 등장하면 그것도 위험한 처사이다. 그 정도 되면 환자가 후유증 없이 회복되는 건 불가능하고 소송 걸릴 가능성도 너무 높다.

결국 사회사업부에 연락해서 거의 3~4일 만에 이혼한 보호자를 찾았고, 예상되는 장애를 감당할 만한 경제사회적 능력이 되지 못해 연명치료를 포기하셨고, 일주일 정도 되는 날, 사망선고를 받게 되었다.


2. 내과 중환자실

당 수치가 너무 높아 의식을 잃어 입원하신 분이다. 어찌저찌해서 당 수치는 잡아뒀는데, 흡인성 폐렴과 요로 감염 등 여러 합병증이 있었다. 다행히 약을 열심히 써서 상태를 호전시켜 일반병동으로 올려 보냈는데, 밥 먹다가 음식물이 기도로 들어가 심정지가 왔다. 심폐소생술을 하고 어찌저찌 살려둬서 다시 중환자실로 보내고 차후 치료에 대해 자녀분들에게 연락했는데, 알아서 하랜다. 우리는 이미 연 끊은 지 오래라고... 그나마 법적인 권한은 없지만 조카분이 연락이 되어서 설명만 하고 그냥 교수님들이 원하는 대로 치료했고, 다행히 정상 퇴원하셨다.


3. 외과 일반병동

간호사 선생님이 보호자에게 전화를 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고 끊어졌다고 했다. 법적 보호자는 아들이었는데, 그래서 뭐요? 저랑 뭔 상관이에요? 의식 있지 않아요? 그러면 알아서 하라고 해요. 그러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아니 우리가 당신이 연을 끊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이 세 상황에서 교수님의 반응이 다 달랐다.

A교수: 어떻게 자식이 부모를 버릴 수 있냐. 아무리 못해줘도 낳아주고 키워주신 분인데, 정말 어이가 없어.

B교수: 저 환자가 젊었을 때 애를 때리고 학대를 했나? 자녀가 연을 끊을 정도면 지 업보지 뭐.

C교수: 법을 바꿔야 해 법을. 이게 뭐야. 그냥 진행해. 그래도 될 것 같아.


정답은 모른다. 하지만 C교수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비혼주의인 사람도 많고, 이혼한 사람도 많고.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안 갖는 사람도 많고, 결국 십수 년 지나면 법적인 보호자가 없는 환자가 더 늘어날 것 같다. 그러면 어쩌지...? 법적인 보호자가 필요한 모든 술기는 못하는 건가, 강행해야 하는 건가.


일단 우리 가족이 만일의 사태에 무연고자 처리되면 안 되니까 부모님 휴대전화 잠금화면에 내 번호나 적어두고 내 잠금화면엔 부모님 번호나 적어둬야겠다. 이왕이면 지문인식으로 잠금이 풀리게 해 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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