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실습 썰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각색되었습니다.
나는 과민성 장증후군이 있다. 과민성 장증후군은 쉽게 말해서 '복통과 연관하여 배변 습관의 변화(변비, 설사, 빈도 등)이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 진단기준을 따지면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대충 배가 미친듯이 아픈데 화장실에 가서 설사나 변비 등을 보고 나면 멀쩡해지는 것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있었는데, 딱히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고 증상이 심한 건 아니라서 그냥 적응하면서 살고 있다. 보통은 방을 나가기 1~2시간 이상 일찍 일어나서 해결하거나, 그렇게 일찍 못 일어나면 아침밥을 안 먹는 식으로 적응하는데 이게 매번 그러기가 쉽지 않다. 또한, 저렇게 일찍 일어나고 밥을 굶어도 장이 꾸륵꾸륵 움직이며 안 좋은 날이 있다.
의과대학 교육과정은 예과, 본과로 나뉜다. 예과는 의학을 배우기 전 교양수업과 생물학, 화학 뭐 이런 걸 듣는 시간이고, 본과는 의학만 주구장창 배우는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예과 때는 23학점을 들어도 다른 대학생들과 같이 15주 수업이어서 방학도 많고 수업도 광클의 수강신청에 의해 결정되어서 널럴하게 짤 수 있는데, 본과는 그렇지 않다. 본과 1, 2학년은 이론수업을 배우는 시간으로 그냥 고등학생처럼 아침 8시 반부터 수업이 시작하여서 17시 30분에 끝난다. 본과 3, 4학년은 병원실습을 하는 시간으로 출근은 교수님이 오라고 하는 시간, 퇴근도 마찬가지. (7시 출근 18시 퇴근도 가능... 물론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과도 있다.) 방학도 많아봤자 5주? 6주인 경우도 있었나? 하여간 그 정도이다.
그래서 예과 시절 걱정이 많이 들었다. 과민성 장증후군이라서 아침마다 복통이 있고 묽은 변을 보는데, 1교시 수업을 잘 들을 수 있을까? 심지어 대학교 강의실이면 뒷문으로 몰래 나가서 화장실을 갔다와도 되는데 우리학교 의과대학 강의실은 앞문과 앞문밖에 없어서 (두 개의 문 사이에 칠판이 있는 구조임) 뭔가 나가기 눈치보일 것 같고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본과 들어와서 코로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험보는 날을 제외하고는 온라인 수업을 해서 아주 좋았다. 혹시 배가 아프면 얼른 녹화버튼을 눌러두고 화장실에 가고 나중에 확인하고 그랬다. 그러고 본과 2학년 쯤, 또 걱정이 되었다. 실습은 비대면이 아닐텐데... 무조건 출근해야 하잖아? 배가 아프고 막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
다행히도 배가 정말정말 아픈 걸 꾹 참고 버틴 적은 많아도 실수를 한 적은 없이 실습이 끝났다. 내가 정말 위기라고(?) 생각했던 경우는 아래와 같다.
1. 회진 후에 갑자기 컨퍼런스가 있던 경우
그 과는 '아침 회의 - 회진 - 휴식 - 환자 보기'의 순서로 늘 실습이 이뤄졌다. 그래서 아침회의에 배가 아파도, 회진 때 잘 버티면 화장실을 자유롭게 갈 수 있어서 회의때 버텼다. 교수님들이 왕창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갈 순 없지 않는가.
그런데 어느 날, 회진이 끝나서 아싸 드디어 화장실 갈 수 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교수님이 "오늘 컨퍼런스 있는데 그거 듣고 가~" 그러셨다. ...싫은데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가야지 뭐. 발표 준비 세팅을 하는 시간이 걸리니까 가는 길에 화장실을 들르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웬걸, 컨퍼런스 장소가 화장실 반대방향이다. 심지어 교수님이 내가 길을 모를 거라 생각하고 친절히 데려다줬다. 컨퍼런스를 듣는 내내 이게 뭔 소리인지 집중이 하나도 안 되고 이 꾸륵거리는 배를 어떻게 하면 진정시킬 수 있을까, 미치겠네, 그런 생각만 했다.
드디어 컨퍼런스가 끝나고 일어나야지, 하는데 교수님이 "질문 있나요?" 보통 이러면 아무도 질문이 없는데 왜 참여자분들이 열정적으로 토론을 하고 있는거지...? 그렇게 한참을 토론하다 이제 끝나나 싶을 즈음, "학생은 질문 없니? 다 이해했어?" ... 아 제발. 보통 저런 질문에서 진짜 질문 없습니다, 그러면 잔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질문이 없을 수 있니, 집중을 안 했네, 하면서. 하지만 교수님이 나를 고깝게 보더라도 나는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학생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었지? 나중에 이런 환자 오면 (대충 어떻게 처치한 뒤 무슨 과를 부르라는 내용)." 그제서야 나는 풀려났고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2. 수술 방 스크럽 중
스크럽이란? 수술방에 들어가기 전 비누와 물로 손과 팔뚝을 박박 문질러 씻는 것을 의미한다. 즉, '스크럽을 선다'라는 말은 박박 씻고 들어가서 수술복을 입고 깨끗해야 하는 수술범위 안에 들어가서 일한다는 뜻이다. 학생들은 보통 스크럽을 서서 기구를 잡고 있는 역할을 한다. 배 열고 있고 힘 써서 당기고 뭐 그런거. 스크럽을 설 때는 당연히 화장실을 갈 수 없다. 가려면 수술복을 벗고 - 화장실을 갔다가 - 다시 박박 씻고 - 새 수술복을 입고 들어와야 하니까 귀찮고 복잡하다.
어떤 과는 학생을 그냥 잉여인력으로 스크럽을 세우는데 가끔 인턴 선생님 대신에 들어가는 경우 (인턴 선생님은 스크럽에서 빠져도 할 일이 많다)도 있다. 그럴 때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진짜 힘들다. 보통 교대가 와야 수술복을 벗을 수 있는데 불쌍한 학생의 소식을 인턴 쌤이 연락을 받고 와서 잠깐 교대하고 그런게 사실은 가능하지만 굉장히 병원에서의 위치가 쫄따구(?)인 학생은 그게 되게 민폐같고 눈치보인다.
그 날은 안과 수술방에서 스크럽을 서는 상황이었다. 그날 수술은 갑상샘안병증 수술이었고, 교수님이 나에게 시킨 일은 면봉으로 피 닦기, 피부 당기기 뭐 그런거였다. 아주 간단하지만 빠릿빠릿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서 면봉을 10개씩 쥐고 한 개씩 쓰면서 닦고 있는데 배가 살살 아파왔다. 아이씨... 그래도 일찍 끝날 것이라 기대했다. 왜냐하면 양쪽 눈 수술하는데 한쪽 눈을 하는 속도를 보아하니 빠르게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청난 함정이 있었는데, 환자가 수술한 눈이 맘에 안 들면 수술을 더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안과 수술방은 환자가 깨어있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눈 부분만 마취하면 되니까 전신마취를 안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쌍커풀 같은 경우를 할 때는 거울을 보여주며 "이 정도면 괜찮으실까요?" 막 그런 거를 물어본다. 그렇게 환자분이 거울을 보고 으으으으으음.... 제발 그냥 마음에 들기를....바랬지만.... 수술은 더 길어졌다. 환자가 의식이 있으니 중간에 나갔다오기 더 눈치보이고...
그렇게 수술은 12시 반쯤 끝났고, 나는 얼른 화장실을 갔고, 다음 일정은 1시 시작이라 밥도 대충 때웠다.
3. 보호병동에서 게임하던 중
정신건강의학과 보호병동에서 환자들과 게임을 하던 중이었다. 배가 살살 아파왔다. 그런데 보호병동에 있는 화장실은 학생들이 쓰지 못한다. 밖에 나가서 사용해야 하는데, 일단 양해를 구하고 다른 환자를 데려다 나 대신 게임을 하게 한 다음에 기사님께 문 열어달라고 해서 밖에 나갔다. 그런데 그 층을 휘휘 돌아보았는데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운 나쁘게도 그 층은 중환자실, 호스피스 병동, 정신건강의학과 병동 등이 있어 출입증이 없으면 보이는 건 그냥 문짝들밖에 없다. 물론 내 출입증으로 다 열리기는 하지만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아무거나 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그래서 얼른 밑의 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 층은 외래를 보는 층이었다. 무슨 환자가 이렇게 많아... 제일 가까운 화장실에 사람이 가득했다. 한 층 더 내려갈까 했는데 거기도 외래고, 그냥 기다려서 들어갔다.
그렇게 1년 반 가까운 시간을 걱정하면서 실습했다. 이렇게 걱정이 많으니 과민장이 해결이 안 되지 지금은 시험준비를 주구장창 하는 기간이라 마음 편히 살고 있는데, 이제 시험이 걱정이다. 실기시험은 운 좋게 오후에 배치되었는데, 필기는 오전이라서... 그날 내 배가 멀쩡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