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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레티아 Jul 07. 2023

나는 교수 만나러 왔는데, 왜 학생이 와요?

외래 예진 실습 썰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각색되었습니다.

의과대학에서 보는 시험은 크게 세 종류이다. 첫째, 필기시험, 둘째, 모형을 활용한 시험, 셋째, 환자 역할을 하는 배우가 있는 시험. 필기 시험이야 그냥 공부하면 성적이 오르고, 모형을 이용한 시험은 순서와 동작을 몸에 익게 만들면 그럭저럭 볼 수 있다. 하지만 환자 역할을 하는 배우와 보는 시험은 어렵다. 친절해야하고, 공감 표현도 해야 하고, 문진도 하고, 신체 진찰도 하고, 교육도 하고... 목소리가 크면 부드럽지 않다, 작으면 자신감이 없다는 피드백이 오는 어렵고도 미묘한 시험이다.


이런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모의시험도 많이 보지만 어떤 과는 실제로 학생이 병원에 처음 온 환자의 예진을 보게 한다. 예진은 예비진료라는 느낌으로, 교수님 보기 전 미리 필요한 정보를 얻는 과정이다. 과마다 예진 양식이 다르지만, 어떤 과는 무슨 질환인가 유추까지 할 수 있도록 환자에게 문진 및 신체검진을 해야한다.


자, 그러면 환자의 반응은 어떨까?


학생이 예진을 보는 환자는 병원에 처음 와서 아무 정보가 없는 분이다(보통 초진환자, 신환이라 부른다). 왜, 6개월마다 똑같은 약 처방받으러 오는 분을 학생이 문진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데 이 병원은 대학병원이다. 이 병원 외래에 오는 분은 자신이 심각한 병이라 생각하고 오거나 개인 병원에서 심각하다고 여겨 의뢰한 환자이다. 그래서 얼른 교수님을 봐야 하는데 웬 학생이 진료를 본다고?

항의를 하시는 분이 많다.


"아니 나 바쁜데, ㅇㅇ과도 가야 하는데 얼른 교수님이나 만나게 해줘요!"

→ 괜찮아요~ 5분에서 10분밖에 안 걸려요!

→ 속마음: 환자분 앞에 예약된 사람이 n명이 넘어서 어차피 m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느라 심심할텐데 학생과 이야기나 하면 덜 심심하지 않을까?

실제로 학생과 이야기하는 게 하소연이 되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하신 분도 있었다. 교수님은 하루에 50명 넘게 외래를 보시니 필요없는 말 끊기 스킬이 있으시지만 학생은 그런 능력이 없어서 다 들어주기 때문이다.


"저는 의뢰서가 있어요."

→ 네, 이따가 교수님 보여주세요~

→ 속마음: 의뢰서가 있으면 거기에 검사 결과도 있고 예상되는 진단명이 있어서 학생은 좀 편하다.

사실 무슨 뉘앙스인지 이해는 못했지만 아마 잘 모르는 학생이 진료보는 게 싫다는 것 같았다.


"어제 응급실에서 여기로 오면 바로 교수님 볼 수 있다고 했는데요"

→  네, 그래도 앞에 예약자가 많아서 5분은 기다려야 해요~

→ 속마음: 응급실에서 입원 안 시키고 보낸 거 보면 응급환자는 아닌가보네... 아닌가, 작은 병원 안 보내고 외래로 연결한 거면 중요한 병인가...

교수님을 바로 볼 수 있다는 말은 모두를 새치기하고 1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면 먼저 와 계신 분들이 항의한다. 내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이 먼저 들어가냐~~ 정규 예약은 몇 개월 걸리는데 다음 날 와서 진료 볼 수 있게 적당히 빨리 해준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cf. 외래 순서가 온 순서가 아니라 예약순서로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 항의가 들어온다. 예를 들어, 1시 20분에 A가 예약했는데 12시 50분부터 기다리고 있다. B는 1시 10분에 예약했고 1시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예약순서대로 B가 먼저 들어가도 항의하는 A가 있다. 과마다 먼저 오면 해주는 곳이 있고 무조건 예약순서가 우선인 곳도 있으니 확인해보시길.

그렇게 항의하는 분을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예진을 시작하면 처음엔 냉랭하던 분들도 의외로 순순해지고 친절해지신다. 가끔 교수님 진료까지 보고 나서도 나에게 인사를 하시는 분도 계시다. 왤까...?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학생에게 적대적이었다가 무엇을 느끼고 친절해지는 걸까? 

나는 아직 크게 아파 본 적은 없지만 나중에 나이들어서 웬 꼬맹이가 가운입고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보면 애쓴다, 가상하다, 기특하다 이런 마음이 들 텐데. 근데 그건 내가 지금 그런 꼬맹이 입장이라서 그렇게 공감이 가능한 것 같다. 그런데 다른 직군으로 생각해봐도, 예를 들어 미용실에 갔는데 상담을 신규가 해줘도 뭐 디자이너가 바쁜가보다~ 그럴 것 같은데... 어차피 머리는 디자이너가 자르듯이 진짜 진료와 약은 교수님이 주니까...


언젠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대학병원 외래에 갔는데 예진을 본다고 오는 학생들이 보인다면, 날세우지 말고 친절히 대답해주면 좋겠다. 어차피 교수님께 또 말해야해서 귀찮을 수도 있지만 보통 학생이 있으면 교수님도 눈치보느라(?) 좀 더 친절해지고 학생에게 설명해야하니 자세히 보시는 경향이 있으니 위안을 삼았음 좋겠다. (물론 학생이 있든말든 환자와 싸우시는 예외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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