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길 묻는 환자 썰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각색했습니다.
요즘 너무 무거운 병원 실습 썰만 푼 것 같아서 좀 가벼운 실습썰을 풀어보려고 한다.
의과대학생들은 병원 실습을 돌 때 정장에 흰 가운을 입고 다닌다. 어떤 학교는 스크럽복(약간 활동복 같은거)을 제공해준다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학교는 그런 게 없었다. 사실 병원에서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직원분들은 외래 진료를 보는 교수님들 말고는 사실 잘 없다. 가운은 긴팔이라 여러 작업을 하다가 물품을 오염시킬 가능성도 높고, 병동은 입원 환자분들을 위해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므로 생각보다 엄청 덥다. 그래서 대부분 반팔에 긴 바지 활동복을 입고 돌아다니신다.
하지만 병원에 오는 손님들은 가운을 입은 사람에게 말을 건다. 누가 봐도 신분이 확실해 보이는 사람, 누가 봐도 병원 사람인 것 같은 사람. 바로 가운을 입은 교수님...이면 좋겠지만, 병원 여기저기 산포해있는 의과대학생들이 주로 걸린다.
"선생님, 여기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1. 산부인과 = 산과 + 부인과
지나가던 어르신이 산부인과가 어디있냐고 물어보았다. 마침 내가 산과 실습을 돌던 중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OO센터 △층으로 가시면 되어요~라고 답을 해주고 뿌듯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 어르신이었는데 왜 산부인과를 찾으시지? 딸이 출산하러 왔나? 이렇게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산부인과라고 하셨지!! 부인과를 찾아오셨구나!! 뒤를 돌아보니 어르신은 OO센터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고, 다행히 코로나 시국이라서 문 앞의 직원분이 열도 재고 어디 오셨는지 묻고 길 안내를 해주셨다.
물론 나보다 심한 실수를 한 동기도 있다. 누군가가 □□과 어떻게 가요?라고 물었는데, 마침 그 과 실습을 도는 의과대학생이 매일매일 회진을 도는 병동을 떠올리고 그쪽으로 보내버렸다. 조금 걷다가, 그 환자는 병동 환자가 아니라 외래 환자였다는 것을 깨닫고 뒤돌아봤으나 이미 환자는 엘리베이터를 타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참고로 □□과의 외래와 병동은 4차선 도로를 한 가운데에 두고 갈라진 다른 건물에 있다.
2. 심장내과? 신장내과?
(참고: 나는 사오정끼가 좀 있다.)
환자분이 심장 내과를 가고 싶다고 그러셨다. 아 그러면 OO건물의 △층으로 가시면 되어요~ 그러자 환자분이 아이고 감사하다면서, 자기가 콩팥 이식을 받았었는데 막 증상이 어쩌고저쩌고 하시는 것이었다. 잠시만요, 심장이 아니라 신장이에요?? 그러면 다른 건물이에요! 정말 환자분이 수다쟁이어서 다행이었다.
이 외에도 사람들이 헷갈리는 과 이름들이 있다. 신경과/신경외과, 소화기외과/소화기내과, 심장내과/심장외과 등. 하지만 그 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협조를 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위치가 보통 붙어있다. 그러면 그냥 환자분께 가서 데스크에 앉아계신 분께 한 번 더 물어봐요~라고 말한다.
3. 중환자실이 어디에요?
중환자실은 1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과계 중환자실, 외과계 중환자실, 외상외과 중환자실, 심장외과 중환자실, 응급중환자실 (응급의학과에서 보는 약물/가스 중독, 심정지 후 상태 환자 등이 있다), 신경계 중환자실(신경과, 신경외과가 공유한다) 심지어는 신생아 중환자실까지.
한 가족이 아침 일찍 걸어가던 나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중환자실이 어디에요?" 마침 나도 중환자실로 가는 중이어서 따라오세요, 라고 할까 생각했는데 내가 가는 중환자실과 다를까봐 물어보았다. "저희 중환자실이 여러개인데, 혹시 환자 분 왜 입원했는지 아세요?"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우리 할머니가 어제 밤에 쓰러졌다는데 여기 응급실로 왔다가 중환자실로 갔대요"라고 답하셨다.
자, 쓰러진 이유가 무엇일까... 당 수치가 너무 높거나 낮아서 의식을 잃었으면 내과계 중환자실, 뇌출혈이나 뇌경색으로 쓰러졌으면 신경계 중환자실, 넘어지다 다쳤으면 외상외과 혹은 외과계 중환자실, 심정지로 쓰러져서 왔으면 응급중환자실.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자 환자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셨다. 그게... 제가 이 병원에 계신 환자분 성함을 모두 외우고 있지는 않은데요... 결국 나는 찍어맞추기로 신경계 중환자실의 위치를 알려줬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다행히 맞았다.
4. CT실이 어디에요?
우리 병원은 길이 복잡하다. 같은 건물, 같은 층이라도 어떤 경로로 가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곳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거나 에스컬레이터 옆 엘리베이터를 타면 편의점과 식당이 나오고, 계단이나 계단 옆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면 CT실이 나온다. 그리고 편의점과 식당에서 CT실로 바로 가는 길은 없다.
보통 사람들은 1개 층인데/2개 층인데 굳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소모하냐, 에스컬레이터 타자~ 하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편의점 앞에서 멀뚱거리며 나를 붙잡는다. CT실이 어디에요? 다시 올라가셔서 직진하시면 엘리베이터 4개와 계단이 있는데 그쪽으로 내려가셔야합니다...
5. 응급실이 어디에요?
병원은 직원들만 알고 있는 길이 있다. 의국(과별 사무실 같은 느낌이다)과 연결되는 길이기도 하고, 응급 상황일 때 뚫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그냥 건물 설계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생긴 길 같기도 하다. 문제는 자꾸 그런 길로 가다보면 환자분들이 가는 길을 모른다는 것이다.
응급실 앞 카페에서 음료를 사고 있는데 한 환자분을 업고 계신 남자분께서 응급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의료진들이 가는 뒷통로(?)를 알려주었고, 옆에 계신 보안요원이 휠체어를 들고오면서 환자분들이 가는 앞통로를 알려주었다. 미안해요... 저는 그쪽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6. 3월의 길치들
3월은 초짜들이 많다. 우리 실습도 3월부터 시작 (정확히는 2월 말), 신규 의사 선생님들도 대부분 3월에 입사하신다. 그래서 3월에 병원을 가면 어리바리 친구들이 많다. 나도 본과 3학년 3월에 길을 물어보면 만날 "저도 이번주가 첫 출근이라...", "제가 여기 들어온지 얼마 안 되어서..."라면서 길을 못 알려주었다.
또한 3월이 아니고 12월이 되어도 사실 자기 구역 아니면 잘 모른다. 그러니 모르면 아, 저 사람은 그곳에서 근무해 본 적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병원에서 길 물어봤는데 까이신 분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대신 사과드리고요, 미리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