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진달래 능선
어릴 적 진달래꽃 시를 배우면서 의문을 가졌었다.
'아니, 왜 철쭉도 있는데 진달래꽃이지? 별로 안 예쁜데.'
진달래와 철쭉은 색이 미묘하게 다르다.
진달래는 연분홍색이고, 철쭉은 색이 다양하긴 하지만 진달래에 비해 진한 분홍색을 띠고 있다.
어릴 적에는 주변과 확연히 구분되는,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철쭉을 더 좋아했다.
이번 봄에 아버지가 수락산 진달래 능선을 오르자고 하였다.
기상청 개화시기를 찾아보고, 동네 산책을 하며 틈틈히 진달래 꽃이 폈는지를 확인을 하다가 3월의 마지막 날에 수락산에 갔다.
처음에는 산이 너무 갈색이라서 실망을 했었다.
무슨 몇 년 묵은 낙엽들만 등산로에 깔려있고, 나무들도 다 갈색이고, 농도 차이만 날 뿐이지 주변이 전부 갈색이잖아?
그러다 문득, 분홍색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간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척박한 갈색 사이에서 연분홍색으로 산을 밝혀주고 있었다.
게다가 진달래 나무들의 키가 나 만큼 커서 마치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수수하다 느꼈던 꽃이 실로 엄청 화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내가 진달래꽃이 철쭉보다 안 예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그것들을 도시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조경이 잘 되어있는 구역은 시기별로 갖가지 꽃이 필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진달래가 필 때쯤에는 알전구 같이 빛나는 목련도, 세상을 한가득 노랗게 물들이는 개나리도 피어있다.
색도 연하고, 빽빽히 피지 못하는 진달래는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다.
문득 사람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일한 사람이라도 어떤 배경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우리나라에 있으면 흔하디 흔한 한민족이지만, 미국이나 유럽에 나가면 소수의 인종인 아시아인이다.
친척들과 있을 때는 평균 키의 사람이지만, 친구들과 있을 때는 작은 사람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나의 배경들은 남들에게 나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제공한다.
예전에는 내가 서 있는 배경으로 남이 나를 판단했던 것을 기분 나빠 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것만 듣고 그렇게 판단하다니 편견이 심해.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저 사람이 나와 잘 맞을지, 신뢰할 수 있는지 등을 파악하려면 그런 배경을 조합하여 기존의 상식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사람을 판단한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갖고 있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통계적으로 그럴 수는 있으니까...' 하면서 넘어가게 되었다.
요즘은 나의 배경을 잘 활용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슨 정보를 내가 주느냐에 따라 남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다르게 되지 않는가.
진달래꽃이 화려하게 느껴지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척박한 산이다.
철쭉 옆에는 비교대상이 되니까 웬만하면 심지 말 것.
개화 시기가 비슷한 개나리와 목련 옆에는 심지 말 것.
더 크게 자란다면 키가 작은 꽃들 옆에는 심어도 괜찮을 것 같음.
지금 상황에서 나를 긍정적으로 소개하기에 가장 적합한 정보는, ○○다.
□□는 내가 잘 하긴 하지만 전문가와 비교되니까 웬만하면 소개하지 말 것.
△△는 ~~~한 편견을 조장하니 주의해서 소개할 것.
더 친해진다면 ◇◇한 정보를 알려줘도 괜찮을 것 같음.
아직은 미숙해 긍정적인 이미지라기보다는 나쁘지 않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 노력하는 수준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칠렐레 팔렐레 모든 정보를 애매하게 흘리지 않는 것에 나는 만족한다.
화려한 진달래가 될 것인가, 수수한 진달래가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늘 나 자체도 중요하지만 내가 서 있는 배경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