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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Apr 15. 2020

아무도 없는 자리

최은미, 근린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근대소설과 리얼리즘을 가져온 것은 ‘삼인칭 객관묘사’이다. 삼인칭 객관묘사는 화자가 있는데도 마치 화자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기술이다. 그 결과 독자는 이것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사실 즉 화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화자의 생각이 주인공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포착하지 못한다. 물론 이런 삼인칭 객관묘사는 기하학적 원근법처럼 허구로서 존재한다. 하나의 소실점, 시점으로 묘사되는 세계는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과는 다르나, 우리가 그렇게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착각으로 구성된 원근법의 세계에서 시점의 주체인 주인공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다. 물론 그 과정은 인과관계에 따라 진행된다.

 <근린> 또한 삼인칭 객관묘사로 진행된다. 다만 <근린>에는 리얼리즘 소설과는 달리 ‘고정된 소실점’이 없다. 근대소설의 삼인칭 객관적 시점은 한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즉 하나의 소실점으로 서사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근린>에는 익명화된, 그래서 같으면서도 다른 ‘여자’들이 서사를 이끈다. 그들 각자의 이야기는 동일한 분량으로 분배되어 있다. 이는 마치 겹쳐있는 여러 개의 소실점-시점을 가진 풍경화, 예를 들면 입체파 화가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다층적인 시점, 여러 개의 소실점은 이 소설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이 소설의 입체적 구성은 우리가 피카소의 그림을 볼 때처럼 공허함과 당혹감을 안겨준다. 일관된 시점으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인물의 비밀스러운 내면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래서 공허하다. 여러 개의 시점이 배경을 조금씩만 묘사하기 때문에 총체적 풍경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당혹스럽다. 물론 주인공이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내면도, 풍경도, 정체성도 없는 이야기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절대적인 우연성, 절대적인 불가능성이다. 소설은 초반부에 무인정찰기 추락사건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 사건의 내막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소설이 진행될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여러 인물들이 소개되면서 서로 다른 시점으로 전개되는 서사들과 추락사건이 어떤 인과관계를 가질지, ‘그 여자’가 누구일지, 궁금하게 한다. 그러나 소설이 보여주는 결말은 추락사건은 각각 인물들의 서사와 전혀 관계없는 우연적인 사건이며,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절대 알 수 없다고 알려준다.

 여기에 이 소설이 노리는 효과가 있다. 소설은 전통적인 근대소설처럼 하나의 시점으로 총체적 세계를 그릴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은 서로 다른 시점이 있어서 세계가 왜곡되어 묘사되기 때문에, 진정한 세계가 묘사될 수 없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소설은 진정한 세계(총체적이며 인과관계로 이어진 세계)는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입체적으로 구성한 서로 다른 시점을 결말부에서 모아놓고 소설이 하는 일은, 시점을 비교하며 제대로 된 시점을 찾는 게 아니라 모든 시점을 무화시켜버리는 것이다. 소설은 급작스럽게 끝나고 추락한 ‘무인’정찰기가 보는 의미 없는 풍경만이 서술된다. 각자의 시선을 넘어서서 근린공원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자리는 무인정찰기의 자리일 것이다. 무인정찰기는 추락하고 근린공원의 사소한 일부에 불과한 ‘빈 벤치’만을 본다. 인과관계에 따라 구성된 세계 전체를 묘사할 수 있는 자리는 절대적으로 우연적이고 불가능한 자리다. 다시 말해, 무인(無人)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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