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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ug 29. 2020

조카의 탄생 1탄

포슬포슬 잘 익혀낸 감자 같은 뺨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작은 입이 오물오물 입맛을 다신다. 혀도 낼름거렸다가 온 얼굴을 구겨 하품도 크게 한다. 새카만 눈동자도 이제 또렷이 정면을 응시한다. 뭐가 불편한 듯 인상도 쓰고 고개도 이리저리 돌려댄다. 영상 속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따라 “아구 아구” 감탄사를 연발한다. 요즘 우리 가족의 일과는 점심 무렵 업로드되는 몇 개의 영상을 양분 삼아 돌아간다. 온 가족을 울리고 웃기는 작은 생명체. 우리 집에 21일째 된 아기가 산다.


2019년 12월, 덴마크에서의 긴 여행을 마치고 따뜻한 나라를 찾아 아테네로 날아갔다.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동네의 아파트에서 한 달간 머무는 중이었다. 처음 가 본 그리스였지만 곳곳을 여행하는 대신 아테네의 아파트에서 꼼짝 않고 머무르며 아크로폴리스를 산책하고 매일 같은 케이크 가게에서 여유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덴마크에서 반년이 넘도록 오전 8시면 일터로 나가 몸을 쓰는 일을 하며 지냈고 아테네의 한 달은 그에 대한 보상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기. 집에서 꼼짝도 안 하기. 무조건 먹고 놀기. 그게 아테네 여행의 계획이었다. 점심 무렵 일어나 빵을 썰고 계란과 베이컨을 굽고 치즈를 잘라 넣은 샐러드로 브런치를 즐겼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던 거실에서 하늘을 구경하며 천천히 빵을 씹었다. 기대도 안 했던 연락이 온 건 그때였다.


“누나 고모 됐다.”

이어 날아오는 사진 한 장. 까만 콩알 하나가 찍힌 초음파 사진이었다. 저 콩알이, 내 조카라고? 아직은 형체도 가늠하기 힘든 까만 점은 생각보다 존재감이 너무 컸다. 그 사진을 받아보자마자 순식간에 그 존재는 내게 박혔다.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 까만 콩이 내 조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빵을 씹던 것도 잊고 팔짝 뛰었다. 아테네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고모가 됐다는 통보를 받다니. 그 비현실적인 장면은 내 삶이 크게 휘어지기에 탁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달 간격으로 올케와 조카가 생겼고 형님과 고모, 새로운 존재가 됐다.


여행 내내 거리에만 나서면 아기용 물건들이 휘몰아치듯 시야 안으로 뛰어들었다. 엄마 신발과 똑같은 미니 사이즈의 아기 샌들, 온갖 그리스 신들이 귀여운 캐릭터로 프린팅된 작은 티셔츠, 알 수 없는 신화 속 동물들의 자수가 놓인 턱받이. 모두 아직 빛 한 점 보지 않은 까만 콩이 쓰기에는 너무 먼 물건들이었지만 나는 참지 못하고 노란 말이 수놓아진 턱받이를 사고 말았다. 생김새만으로도 아기만을 위한 물건인 턱받이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귀여웠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조카가 벌써 눈앞에 그려졌다.


올케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성실히 부풀었다. 임신 중반기를 넘어가자 이주 전의 배와 이주 뒤의 배가 눈에 띄게 달랐다. 조카가 그만큼 성실히 자라는 중이었다.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오늘은 척추가 다 생겼대, 손가락 발가락이 10개씩 다 있대 하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늘은 심장이, 내일은 뼈가, 또 그다음엔 손가락과 발가락이 열심히 빚어졌다. 그 모든 순간이 전투나 다름없었다. 무언가가 하나씩 생길 때마다 동생과 올케는 부지런히 검사를 받았다. 하나하나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형체로 빚어지고 있는지, 이 아이가 온전해지고 있는지. 몸의 모든 것들이 잘 빚어지는 건 어쩌면 기적인지도 몰랐다. 검사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매 순간이 작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조카는 부지런히 제 몸을 일구었고 올케는 성장의 진통을 고스란히 느꼈다. 밤잠을 설치고 입덧은 자주 찾아오는 게 아니라 24시간 매스꺼운 채로 이어지는 과정임을 알아갔다. 선물이라는 아기가 생기는 과정에 엄마의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만 같아 마음마저 불편했다. 해맑은 동생은 얕은 둔덕 같은 배에 대고도 아빠 다녀올게, 아가야 안녕, 하고 행복해했지만 아직 올케는 뱃속의 작은 점이 모든 걸 다 바쳐도 좋을 만큼의 행복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아서 좋은 거구나 했다고. 하지만 초음파를 통해 들려오는 아기의 심장 소리만큼은 어떤 경이로움을 안겨주었다. 뱃속의 작은 점이 내는 쿵쾅쿵쾅 거세고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는 이 세상에 새로운 존재가 생겨났음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2020년 8월 7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병원에서는 외부인을 철저히 차단했고 동생은 생애 처음 경험해보는 순간을 오롯이 혼자 맞이하고 있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올케를 기다리며 대기실을 서성이던 동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알려왔다. 누나 너무 긴장된다. 애교 많고 활기찬 동생의 그 한 마디에 그 애가 얼마나 떨고 있을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덩달아 나도 몸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괜찮다, 다 잘 될 거야 했다. 온 가족이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한 채 휴대폰만 부여잡은 채 조카의 울음소리를 기다렸다. 오전 11시 28분. 수술실 안쪽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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