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현 Sep 05. 2020

육아의 역사

조카의 탄생 3화

유난히 조용하던 어느 날, 다들 말없이 가족 단톡방만 쳐다보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 아가는 뭐하고 있는지, 왜 초보 엄마 아빠는 사진 한 장 보내오지 않고 이렇게 애타게 하는지 할 말은 많지만 할 수가 없어서 속만 태우고 있었다. 그러다 불쑥 뜬 동영상 하나. 짧은 탄성과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는 할 말을 잃었다. 욕조 가득 받아놓은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조카. 방석만 한 작은 튜브를 목에 끼고 밀려 올라간 양 볼이 빵빵해진 채로 물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작은 아기. 물속에서 팔과 다리가 버둥버둥 헤엄이라도 치는 것처럼 휘둘렸다. 그 동력으로 조카는 자유자재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한 바퀴 휙 회전도 하며 물놀이를 즐겼다. 영상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음성으로 동생네 부부와 산후 도우미 선생님이 “얘는 물을 참 좋아하네.” “어우 저 봐 저 봐, 자기가 막 방향도 돌리네.” 하며 조카의 모습을 중계해주었다. 행복해하는 그들의 목소리에도 엄마와 아버지는 말을 잃었다. 영상을 보는 아버지는 표정이 점점 굳더니 거의 울 듯한 얼굴이 되어 방으로 들어가고 엄마는 동영상을 자꾸 돌려 보며 “와, 우와.” 하는 알 수 없는 감탄사만 뱉었다. 조카 동영상이라면 하던 일도 멈추고 꺄르르 웃으며 들여다보던 가족들에게 처음 있는 반응이었다. 아기들은 원래 물에 거부 반응을 보이기 전에 수영도 시켜주고 물이랑 친해지게 해주면 좋대~ 하고 내가 옆에서 아무리 말해도 아무도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신생아 수영은 옛 부모들에게 놀랍다 못해 기이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엄마와 아버지는 선배 부모이긴 하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아이를 키워냈던 부모다. 30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당연히 아이를 키우는 방식도 달라졌다. 아기 침대에는 초점이 생기기 시작한 조카를 위해 흑백 모빌과 초점 카드가 즐비하고 온 방에는 아기용품으로 가득하다. 아기 튜브, 수유 받침대, 바운서, 역류 방지 쿠션, 젖병 소독기, 분유 포트 같은 것들은 우리 부모들이 아기를 키우던 세상에는 없던 물건이었다. 우유를 먹이고 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안아 들고 두드려야 하던 시절로부터 적당히 두드리고 역류 방지 쿠션에 뉘어 놓으면 되는 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메쉬 소재의 여름용 스와들업을 입히고 찍은 사진을 보고 엄마는 “애한테 웬 선풍기 망을 씌워 놨어?” 했다(스와들업이 ‘기적의 속싸개’라 불리는 아기용품이라는 걸 나도 검색해보고야 알았다). 



이름도 용도도 알 수 없는 물건의 존재만큼이나 세상은 변했다. 아기를 위해서, 무엇보다 아기를 키우는 부모를 위해서 세상은 발전했다. 뜨거운 물에 젖병을 삶아 소독하고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기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뜨거운 물을 끓여 분유를 타고 한참을 식혀야 했던 부모들을 위해 기술은 개발되었다. 분유 포트는 적정 온도로 분유를 데워주고 젖병 소독기가 젖병을 최적의 상태로 유지해준다. 한껏 약해진 산모의 관절을 위해 수유 받침대가 아이를 받쳐주고 바운서가 엄마 대신 아이를 흔들어준다. 두 명의 자식을 건강하게 키워낸 엄마는 “저런 것 없어도 다 잘 키웠는데.” 라고 말하며 요즘엔 아기를 요란하게 키운다, 라고 했지만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것 없이도 물론 이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건강하게 아기를 잘 키워내지만 그마만큼 부모가 상한다. 그들의 시간과 몸과 정신이 희생된다. 아기를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의 희생은 필연적이겠지만 조금이나마 그 과정을 도와주는 기술이 발달되었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다. 이젠 그 발달의 결과물을 조금 더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게 하는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하겠지만.


변한 세상의 육아는 잘 모르지만 초보 부모의 부모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식들을 응원한다. 아이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부모가 희생해야 옳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오랫동안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부모가 지치지 않게 적당히 자기 삶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선배 부모들은 반찬을 해다 나르고 미역국을 한 솥씩 끓인다. 주말이면 아이를 맡기고 자유 시간을 보내라며 먼저 손을 내밀고(이건 약간 사심이 큰 것 같지만..) 조카 안부를 묻는 말끝엔 항상 당신의 자식들이 잘 먹고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한다. 부모가 된 자식도 아직 그들 눈엔 여리고 아까운 내새끼다. 이젠 자식의 자식까지 돌보는 우리 부모들은 아직까지 육아 중이다. 나는 그 과정을 열심히 기록하려고 한다.


며칠 전, 엄마는 비장한 목소리로 “더는 못 참겠다.” 하고 결의를 다진 후 아버지와 함께 조카를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운 좋게 엄마와 나는 조리원에서 막 집으로 돌아온 조카를 한 번 보고 왔는데 아버지는 아직 손주를 한 번도 실물로 보지 못했다. 엄마는 본인이 더 행복한 표정으로 “아빠는 한 번도 못 봤잖아.” 하며 아버지 핑계를 댔다. 아버지는 바이러스를 걱정하며 가도 되겠나, 했지만 완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손주와의 첫 만남을 기대하며, 고생한 며느리를 위해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준비했다. 역류 방지 쿠션에 누워 있는 조카를 실물로 본 아버지는 망부석이 되어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자리를 떠나지도 못한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우리가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하염없이 곤히 자는 조카만 쳐다봤다. 내가 발가락 한 번 만져봐, 하고 속싸개를 들춰 조카의 발을 꺼내주니까 그제야 조심히 발끝만 아주 살짝 만졌다. 만지고는 싶은데 부서질까 전전긍긍하며 조카가 살짝만 몸을 움직여도 손을 쏙 거둬들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우습고 좋아서 괜히 심술을 부렸다. “거 봐, 그렇게 작은 걸 키워내느라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겠어.” 하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의 등을 쓸었다. 본인의 자식을 키울 땐 서툴고 철이 없어 아내의 손으로 자식을 키워냈지만 이젠 사랑을 듬뿍 줄 수 있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자식에게 못다 해준 마음을 손주에겐 충분히 줄 준비가 됐다. 


이제 조카는 내가 가면 아는 사람을 쳐다보듯 또렷하게 한참 동안 내 얼굴을 쳐다본다. 이제 겨우 한 달 된 아기인데 손차기도 발차기도 힘차다. 덮어놓은 이불은 금세 발차기에 제압당한다. 매일같이 모자도 씌우고 리본 머리띠도 하고 손수건으로 만든 양머리까지 씌우고 노는 엄마 아빠에게도 불만 가득한 얼굴이지만 찡얼거리지도 않고 몸을 내어준다. 자기를 껴안고 꾸미며 재롱부리는 엄마 아빠를 제가 놀아주는 것이다. 기저귀를 갈며 아이구 응가 냄시~ 하고 말하면 곁눈질로 눈치를 본다고 동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했다. 어제는 “고모 갈게~”하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니까 역류 방지 쿠션에 누워서 자기도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아무래도 벌써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천재인가..).


오늘은 또 뭘 하면서 놀고 있을까. 조카는 부모와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먹으며 바둥바둥 잘 크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카의 탄생 2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