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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pr 14. 2023

엄마 체험

2020.9.12.

 개나리색에 아주 살짝 붉은색이 가미된 황금빛 똥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 귀여운 조카는 참으로 신기한데 꼭 엄청난 똥을 쌌을 때면 세상에서 가장 평온하고 예쁜 표정으로 말똥말똥 사람을 쳐다본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혹은 곧 선사할 선물을 열어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대하기라도 하는 듯이(?). 마침 너무 예쁜 표정으로 나를 반겨주는 조카를 이리저리 카메라에 담은 뒤 열어 본 기저귀에는 이 조그만 몸이 만들어낸 것이 맞는지 너무나 의심스러운 상황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상하게 가장 결정적인 상황에서 조카는 찡얼거리지도 않는다. 상황을 확인한 올케와 나는 엉거주춤 아기를 안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는 올케의 지시에 따라 물 온도를 맞추고 묵직한 기저귀를 벗겨내고 가제 수건을 준비했다. 그 어느 때보다 유심히 올케의 모습을 관찰했다. 올케는 더 이상 육아 도우미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어설프게 아기를 씻기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두 달 동안 아기가 자란 만큼 올케도 한층 더 엄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생이 손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올케를 조금이나마 도와주러 파견됐다. 동생의 수술 시간에 맞춰 병원에 갔는데 오히려 올케와 조카에게 가보라며 극성을 부린 탓에 부랴부랴 날아갔다. 올케는 동생의 걱정이 무색하게 조카와 잘 지내고 있었다. 내가 뭘 돕는다는 게 이상했지만 올케는 누군가 그저 아기를 지켜봐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며 고마워했다. 내가 아기를 정말로 ‘보고’ 있는 동안 올케는 부지런히 오가며 빨래를 정리하고 구석구석 집안일을 했다. 올케를 조금 쉬게 해 줄 요량으로 왔는데 육아는 단순히 아기를 돌보는 것 외에도 부수적으로 준비하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모두 포함된 과정이었다. 나는 아직 모르는, 올케만이 알고 있는 할 일의 목록에 따라 올케는 바쁘게 움직였다.

임신과 출산도 마찬가지였다. 출산의 과정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하므로 보통 임신 과정을 출산의 고통과 등치시켜 떠올린다. 하지만 올케가 들려준 이야기와 내가 지켜본 과정은 결코 출산의 고통, 그러니까 찰나의 강도 높은 고통이 결코 전부가 아니었다. 올케는 “아무도 내게 유축의 고통을 알려주지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임신 중에는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것처럼 먹은 걸 토하고 음식 냄새를 맡으면 입덧하는 것처럼 강도 높은 입덧은 임신 초기를 지나면 서서히 완화되는데 대신 일상적으로 미약한 미슥거림 상태가 지속 된다고 했다. 항상 속이 불편한 상태로 수개월을 지내는 것이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 잠자는 것도 힘들다. 똑바로 누우면 심장과 장기가 짓눌려 숨을 못 쉬고 옆으로 누우면 배가 꼭 쏟아질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누워도 편하지 않고 앉는 것도 서 있는 것도 쉽지 않다. 만삭에 가까워서는 신발 끈 묶기는커녕 앉았다가 일어설 때도 동생이 손을 잡고 일으켜주어야 했다. 출산을 하고 나면 그 고통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지만 대신 예상치 못한 고통이 닥쳐온다. 아기가 먹을 시간이 아닌데도 차오르는 모유는 금세 가슴을 팽창시키고 기계로 유축하는 건 언제나 한계가 있다. 말끔하게 비워지지 않고 날마다 찾아오는 팽창과 유축의 고통은 아기를 낳은 뒤에 새로이 시작되는 고통이다. 아기를 낳기만 하면 끝날 것 같던 몸의 고통이 여전히 ‘내 몸’이 아닌 ‘아기를 위한 몸’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올케는 병원에 있는 동안 자다가도 통증으로 깨서 유축을 하고 수시로 모유가 옷을 적시며 팽창해 새어 나오는 걸 견뎠다. 그뿐인가. 엄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유가 잘 생성되지 않는 사람도 아기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힘겨워한다며 누구나 손쉽게 떠드는 모유 수유의 중요성만큼이나 모유 수유의 힘겨움을 얼마나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올케와 반나절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여자가 견뎌내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실제적인 몸의 고통과 더불어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시선과 스스로를 잃어가는 자아에 대해서. 그럼에도 아기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밝은 표정으로 지내며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올케가 고마웠다. 올케는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며 아기를 낳기 이전의 자기로서는 이런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 사람의 이러한 변화에 관해, 내 몸을 내 몸으로서가 아닌 다른 생명을 위한 몸으로 경험하는 여자들이 더 많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 힘이 약한 올케와 내가 아기를 물에 적시다시피 하는 목욕을 마치고 배달시킨지 한참 된 퉁퉁 불은 파스타를 펼쳤다. 젓가락질을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조카가 개운한 몸으로 빈 배를 두드리며 울었다. 여자들끼리 파스타로 기분 좀 내려고 했는데 조카는 자신의 존재를 열심히 상기시켜 주었다. 올케가 조카에게 밥을 먹이는 동안 내가 얼른 식사를 마치고 올케와 교대했다. 소화시키기 위해 내가 조카를 안고 두드리는 동안 올케는 남은 식사를 마저 했다. 그제야 동생과 통화를 하며 잠시나마 여유를 갖는 올케의 뒷모습을 보며 전혀 다르게 변화한 그의 모습처럼 새로운 삶과 새로운 행복을 온몸으로 껴안은 한 사람의 분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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