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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pr 14. 2023

부부의 첫 외출

2020. 10. 01.

분유를 140ml씩 먹는 아기가 할아버지를 위해 기습 방문을 또 해주었다. 아버지가 쉬는 날을 맞아 동생네가 방문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동생네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베란다 밖을 내다보고 가만 있지 못하고 거실을 서성였다. 마침내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는 동생 차를 보고 아버지는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이내 아버지 품에 안긴 조카 등장. 아버지는 그때부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아기를 안고 아기와만 속삭이듯 대화를 시작했다. 조카는 말끔한 얼굴로 불편한 기색 한번 없이 할아버지를 동글동글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어쩜 이렇게 순한 아기가 있을꼬, 하며 그 순진한 얼굴을 놀랍다는 듯이 들여다보았다. 곧 다가올 일은 꿈에도 생각 못 하고.


동생과 올케는 마트 장도 보고 곧 퇴근할 엄마를 모시러 다녀오겠다고 했다. 아기를 두고 부부가 첫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품에서 조카는 엄마의 인사를 받았다. 올케는 아쉬워서 “엄마 간다”하고 재차 말했는데 아기는 눈만 말똥말똥 신경도 안 쓰고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과 올케가 떠나고 아버지와 나, 조카만 남겨졌다. 우리끼리만! 그래도 몇 번 안아보고 분유도 먹여보고 어깨너머로 기저귀 가는 것도 봐서 그렇게 걱정스럽진 않았다. 걱정보단 설렘에 가까웠다. 아기를 온전히 내가 책임지고 있다는 것, 부모가 아기를 두고 떠나도 될 만큼 믿을 만한 존재라는 것. 아버지와 나는 이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조카에게 딱 붙어서 그 순한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봤다.

동생과 올케가 오랜만에 둘이서만 자유로이 마트를 구경하고 있을 때, 조카는 그 어느 때보다 방글방글 예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간의 경험이 헛되진 않았는지 그 표정, 특유의 말간 표정을 나는 알아보았다. 분명히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일을 보고 왔다고 했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기저귀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시큼하고 오래된 요거트 냄새. 기저귀를 열자 눈부신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자, 침착하자. 올케가 어떻게 했더라? 일단 아기는 쑥스러운 얼굴로 얌전히 있으니 나만 정신을 차리면 된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물을 틀어달라고 하고 아기를 화장실로 옮겼다. 아버지에게 아기를 받치고 있게 한 다음 샤워기 물 온도를 체크하고 수압을 최대한 약하게 해서 아기 엉덩이 쪽으로 물을 뿌렸다. 엉덩이를 구석구석 확인하며 씻었다. 금색 덩어리들이 아기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아버지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씩씩하게 안겨 있는 아기에게 “아구 착하다”하며 쉴새 없이 감탄사를 뱉었다.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괜히 더 “아빠 손가락에 똥 묻는다” 했는데 아버지는 “괜찮다, 뭐 어때서.” 하며 조카를 얼렀다.

실은 아버지는 비위가 약해 나와 동생이 아기일 때도 똥기저귀를 한 번도 치워본 적이 없었다. 연년생인 우리를 엄마 혼자 씻기고 먹이고 어르느라 고생했다는 걸 아버지도 우리도 이제야 알아가고 있다. 올케의 말마따나 아기는 먹이고 트림시키고 돌아서면 다시 먹일 시간이 됐다. 그 사이사이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찡얼거리는 걸 달래야 했다. 그뿐인가. 아기의 손수건, 옷가지를 따로 빨래하고 어른들의 세탁물들도 빨고 널어야 했다. 내가 종종 아기를 보러 갈 때면 올케는 내게 아기를 맡겨놓고 쉬는 게 아니라 널어 둔 아기 수건과 옷들을 개키고 집안일을 했다. 그래도 요즘엔 역류방지 쿠션이니 바운서니 하는 도구들의 도움이라도 받지. 엄마는 환경을 걱정해서 면 기저귀를 사용하는 올케를 보며 “요즘엔 면 기저귀도 잘 나오네. 우리 때는 2m도 넘는 무명천을 접고 또 접어서 썼어. 그거 손빨래해서 널어놨다가 개킬 때면 진짜 진이 빠진다.” 하고 되돌리고 싶지 않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이전에도 종종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조카의 기저귀를 직접 갈아보고 동생과 올케가 아기를 중심으로 변해가는 걸 보며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은 타고난 ‘모성’에 의해 자연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서툴고 힘겹지만 애써 버텨내면서 모성이란 것을 서서히 키워갔다는 걸. 예쁘게 치장한 선별된 사진이 업로드되던 올케의 sns에는 어느샌가 민낯의 얼굴에 편안한 옷차림으로 아기를 안은 올케의 사진이 올라왔다. 아기를 키우기 이전에 중요하게 생각하던 가치관이 아기가 생긴 이후에 동생과 올케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개운하게 씻고 새 기저귀를 찬 조카는 빈 배를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구기기 시작하더니 이내 발작적인 울음을 터트렸다. 조카를 안은 채 발버둥 치는 아기의 힘을 느끼고 목청을 높이며 뱉어내는 울음을 들으며 아버지는 정말로 당황했다. 올케가 얼려 온 모유를 데우는 내게 쉬지 않고 아직 안 됐나, 빨리 해라, 언제 되노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올케가 하던 모습을 흉내내며 오히려 차분하게 조카를 향해 “조금만 기다려”하고 모유를 준비했다. 아기는 이제 정말 목청을 사용해서 울었다. 어른들을 충분히 당황 시킬 수 있을 정도로 힘차게 울고 발버둥 쳤다. 젖병을 물려주자 허겁지겁 빨아먹는 아기를 보며 아버지는 땀을 닦았다. 겨우 한두 시간 아기를 봤을 뿐인데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몸에 열이 오르고 땀이 났다. 마트에서 돌아온 동생과 올케, 엄마에게 우리는 그간 있었던 일을 모험담처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그 순하던 아기의 목청, 힘에 대해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그럼 배고픈데 안 울면 바보지. 그게 자기 일인데.” 하며 조카를 쓰다듬었다. 조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말간 얼굴로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고 한참씩 들여다봤다. 우리 집에서 육아의 경험이 없는 유일한 두 명, 아버지와 내가 우리끼리 무사히 아기를 씻기고 먹이고 돌봤다는 사실은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물론 나중에 올케가 기저귀를 새로 갈아주기 위해 옷을 벗겨보았을 때 내가 기저귀를 거꾸로 채워놓았다는 걸 발견했지만 그래도 아기는 기저귀를 거꾸로 차고도 한참을 잘 놀아주었으니 어찌됐든 괜찮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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