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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pr 14. 2023

순수한 사랑

2020. 12. 14

조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집은 여느 가족처럼 사소한 일로 언성을 높이고 서로의 생각을 강요하고 때로 서로를 못살게 굴었다. 겨우 셋 밖에 안되는 식구가 생각도 가치관도 마음도 모두 달랐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직전, 나는 덴마크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돌아왔고 엄마 아빠의 사소한 말다툼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돌아온 직후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상황이 엄마가 일하는 직장에서 확진자가 나오면서 우리에게 닥쳐올 수 있는 현실임을 일깨워 주었다. 손님을 응대하는 일을 하는 엄마는 종일 마스크를 낀 채 숨도 못 쉬고 일했다. 화물차를 모는 아버지는 방역 조치로 기사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시설이 문을 닫고 휴게소가 일찍 영업을 마치면서 일주일 내내 몸을 씻지도 못하고 끼니를 자주 거르면서 일을 다녔다. 하필 이렇게 몸이 힘든 시기에 집에 누수가 나서 아랫집에 배상을 하고 돈을 왕창 들여 바닥 시멘트를 몽땅 뜯어내 전쟁 같은 공사를 치렀다. 이례적인 사태에 힘겨워하는 엄마 아빠를 대신해 누수 공사 진행과 보험 처리와 손해사정사와의 대결은 내가 도맡았다. 아버지의 지병을 뿌리 뽑기 위해 서울대병원을 수차례 오가며 긴 수술과 마음 졸임을 견뎠다. 유난히 장마도 길었다. 우린 정말이지 지쳐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겨우 두 달 전의 일상이다. 두 달은 눈 깜빡하면 지나가는 시간인데 두 달 전의 일이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 그때의 우리는 이제 없다. 한자리에 모이면 조카 사진으로 대동단결하고 밥을 먹다가 동생에게서 영상통화가 오면 일제히 숟가락을 놓고 스마트폰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얼굴만 마주쳐도 조카 이야기를 하고 아기의 새로운 표정에 대해 떠들고 어젯밤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그뿐인가. 엄마는 진상 손님들로 화딱지가 나도 조카 사진으로 금세 털어내고 아빠는 조카 장난감 사주려고 주말에도 종종 일을 간다. 빨간색 티셔츠에 파란색 바지에 노란색 운동화를 즐겨 신는 아빠는 엄마가 아무리 잔소리해도 귓등으로 듣다가 “그렇게 입으면 아기가 싫어해~” 한 마디에 옷을 갈아입는다. 아침잠 많은 엄마는 휴무에도 “아기 보러 오세요” 하는 동생의 말에 벌떡 일어나 목욕재계를 한다. 요즘 나는 내 생에 손에 꼽을 정도로 성실하다.

우리는 조카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움직인다. 아기의 존재는 짜증과 슬픔과 고달픔을 상쇄하고 기쁨과 사랑과 행복을 증폭시킨다. 아기는 태어남과 동시에 적어도 일곱 어른의 삶을 바꿔놓았다. 일곱 개의 생에 기쁨을 주었다. 캘 채(採). 기쁠 이(怡). 기쁨을 캐는 아기가 우리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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