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0일 / 나트랑(냐짱), 베트남
굉장히 낡은 격언 같지만 보여지는 것과 말해지는 것,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의 쾌적한 30층 에어비앤비 아파트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맞은편에 짓고 있는 고층 아파트의 공사가 새벽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물론 베트남의 날씨를 고려해 보면 한낮에 공사를 하기가 어려워 새벽이나 저녁이 가장 좋은 시간대라는 결론을 쉽게 도출할 수 있겠지만, 그 논리적인 사실이 할 일도 없는데 새벽부터 눈을 떠야 하는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지는 않았다. 우리는 공사 소음에 이미 달아나고 있는 잠의 그림자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으나 결국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파트 코앞에 바다가 넘실대고 있어 나는 바다에 나가 놀 것을 주장했지만, 그는 바다에 들어가는 과정과 나오는 과정에서 겪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찝찝함이 싫었는지 아파트 공용 수영장을 주장했고 아무렴 어떨까 싶어 우리는 대충 세수만 하고 숙소를 나섰다. 근처 식당에서 쌀국수와 볶음밥처럼 보이는 사진을 가리켜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별 거 없어 보이지만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네 까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 하려는데 시작부터 언어를 잃어버리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나는 영어와 일본어 보급형 패치를 가지고 있어, (고급형은 아니다) 두 개 언어가 어느 정도 기능하는 여행지에서는 큰 어려움 없이 소통을 하는 편이다. 게다가 그동안 다녔던 여행을 떠올려볼 때 두 개의 언어가 기능하지 않았을 때는 현지인 친구가 함께 있는 경우여서 언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영어 한마디 작동하지 않는 냐짱의 로컬 까페에서 내 언어 패치는 완전히 고장 나 버렸고, 거기에 당황스러움이 얹어져 우리는 번역기의 존재마저 하얗게 잊어버리는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저 연유가 들어간 커피를 마시고 싶었을 뿐인데, 그 '연유'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온갖 쓸데없는 언어들을 내뱉다가 가지고 있는 창의성을 그러모아 원하는 바를 표현하는 현대무용을 구상하다가, 아무튼 별 짓을 다 하고 있는데 그가 까페에 들어서는 우리의 숙소 호스트 청년을 발견했다. 구원의 빛이 그 청년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순간이었다. 호스트 청년은 우리를 위해 커피 주문을 해 주었고, 덕분에 우리는 두 개의 벽이 완전히 뚫려 있어 바닷바람이 통째로 통과하는 까페에 앉아 여유로운 커피 타임을 즐길 수 있었다.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약간의 현금만 챙긴 후, 우리는 이른 오후 시간을 거의 아무도 없는 아파트 공용 수영장에서 흘려보냈다. (팬티만 입고 물개처럼 수영하는 러시아 여자 어린이들과, 본격적인 다이빙 장비를 가진 중국인 가족이 있었다) 그날 오후 일정이라고 해봤자 마사지뿐이어서 그는 선베드에 누워 맥주를 원 없이 마셨고, 나 역시 선베드에 누워 망고주스를 홀짝이며 바닷바람이 여기저기로 옮겨놓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해변을 걷기 시작했고 백사장의 모든 지면에 공평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젖은 몸을 바짝 말려 주는 것을 느꼈다. 새벽부터 공사 소음으로 정신을 피폐하게 하는 우리의 에어비앤비 아파트는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장점을 가졌는데, 냐짱 시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아직까지 해변에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아 깨끗하고 한적하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우리는 사람들로 점점이 수 놓이지 않은 그저 푸른색의 바다와 때때로 조잘조잘 부서지는 흰색 파도를 보면서 따뜻한 모래를 밟았고 소음 없는 그 풍경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탁탁 털어 먼지 한 점 없이 만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난 우붓 여행에서 고른 마사지 스파가 우리에게 무릉도원을 경험하게 해 주었던 바람에 나는 이번 여행에서도 스파를 고를 때 굉장히 많은 공을 들였는데, 좋은 마사지 스파를 고를 때의 필수 사항이라고 한다면 구글 평점 3할에 한국인 리뷰 5할(한국인은 까탈스럽다), 그냥 나의 감 2할이다. 우리는 예약한 마사지 스파 앞에서 5분 만에 반미를 하나씩 해치우고 난 후(제일 맛있었다) 스파에 들어섰는데, 그다음의 기억은 없다. 이번 마사지도 우리 둘 모두의 뼈를 액체화시키는 데 성공했고 우리는 충만한 기분으로 또다시 오빠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전날 먹어보지 못한 소프트크랩 샌드위치와 해물라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며 노래를 부르는 내 연인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벌써 익숙해진 레스토랑에 들어서 전날 만나지 못했던 매니저 친구를 만났고, 우리가 처음 방문했을 때 서빙을 하던 꼬맹이 친구는 사실 주방 보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우리가 주문한 크랩 샌드위치를 들고 주방을 나오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 전날 눈도 잘 못 마주치고 웃음기 없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나는 내심 놀랐고, 그는 '어제 한 번 봤다고 이제 우리가 좀 편한가 봐.'라며 좋아했다.
간단하게 먹자는 처음의 다짐이 무색하게, 우리는 또다시 여러 가지 메뉴와 신나게 싸워 이겼고 냐짱의 한량답게 시내를 어슬렁거리면서 오빠의 마감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술은 매일 마시는 거니까) 냐짱 현지에서 살아가는 오빠에게 로컬 까페를 추천받고자 했는데(왜 그 현지인만 아는 그런 거), 그는 심각한 얼굴로 콩까페를 추천했고 나는 '거기 한국사람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심지어 한국에도 있을걸.'이라고 항의했으나 그는 점점 더 의미심장한 얼굴로 '야 거기 진짜 맛있어. 나 처음 왔을 때 거기 매일 갔어.'라고 제법 신뢰성 있는 답변을 했다. 결국 우리는 거의 모든 테이블에서 모국어가 쏟아져 나오는 콩까페에 입장했고 코코넛이 들어간 아이스커피를 머리가 깨질 정도로 목구멍에 들이부은 다음 있는 힘껏 인정의 제스처를 취했다. '왜 그렇게 여기가 난리인지 알 것 같아. 더위사냥 맛이야. 코코넛 좀 섞인 더위사냥.' 그는 소믈리에의 표정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시내의 좁은 골목에 숨어 있는 수제 맥주 펍에서 오빠를 만나 맥주를 마시며 그날 인상적이었던 꼬맹이 친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겨우 두 번째 본 건데 그 친구 우리가 조금 익숙해졌는지 막 웃으면서 손 흔들더라. 깜짝 놀랐는데 귀여웠어."
내가 말하자 오빠가 대답했다.
"걔 어린데 똑똑하고 일도 잘해. 근데 좀 어두워. 가정환경이 좀 어두운 것 같아. 집에 있는 건 싫은데 일하러 오는 건 좋대. 아 그래서 내가 자꾸 웃으라고 하는데."
그는 이어서 베트남 사람들이 나쁜 건 아닌데 겁이 좀 많은 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웃음기 없고 무뚝뚝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불친절한 게 아니라 겁을 내는 건지도 모른다면서. 나는 그날 오전에 소통으로 애먹었던 까페 청년의 당황한 얼굴과 마사지 스파 앞의 무표정한 반미 가게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말 한마디 섞이지 않아 우리를 불편해하면서도 세심하게 이것저것을 챙기는 손짓과 빵 안에 들어가는 재료를 하나하나 확인시키면서 오케이 사인을 받았던 목소리가 그 기억에 따라붙었다. 꼬맹이의 얼굴에 번지던 앳된 미소도.
나는 오빠에게 말했다.
"아 뭘 웃으래. 오빠도 잘 안 웃잖아. 똑똑하고 일만 잘하면 됐지. 자기 웃고 싶을 때만 웃으면 돼."
언어를 잃어버렸을 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다. 작은 몸짓과 눈빛, 표정, 시간과 기다림 같은 것들은 오히려 우리가 명료한 말을 나눌 때보다 더 소통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언어가 고도화될수록 싸움이 고도화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해서, 나는 더이상 답답해하거나 당황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과 노력을 쓰면 어떻게든 전해질 테고, 내가 결국 포기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포기를 모르는 구글 번역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