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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만세 Aug 06. 2019

노는 기록 - 3일

2019년 3월 7일 / 우붓, 발리, 인도네시아

Day of Silence                                                                                                                                                                 

2019년 3월 7일은, 발리의 명절인 녜삐 데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힌두교 발리 달력으로 새해. 우리의 구정처럼, 양력으로는 매년 날짜가 바뀐다. 그들은 다른 많은 명절들과는 다르게, 침묵으로 새해를 맞이한다고 했다. 해서, 그날만큼은 공항과 상점들이 문을 닫고, 호텔도 체크 인아웃이 불가능하며,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모든 관광객도 마찬가지이다), 밤에는 아주 작은 불빛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다고 했다. 말 그대로 침묵의 날.


여행을 떠나기 전, 비행 일정과 연차 일정을 어느 정도 마무리해놓은 다음 녜삐 데이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는 바람에, 퍽이나 큰 불안에 시달렸다. 하물며 블로그만 조금 찾아봐도 녜삐 데이의 불안과 불편이 고스란히 전염되었고,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걱정해야만 했다. 3월 7일 자정 전에 호텔에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몰랐고, 자정 이후로 체크인이 불가능하다면, 공항에서 노숙을 무려 이틀이나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녜삐 데이 당일은 당연히 체크 인아웃이 불가능하므로 녜삐 데이가 끝나는 8일 아침까지는 한 곳에 머물러야 했다) 호텔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조식은 포함되어 있으나, 점심과 저녁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 등. 실제로 점심과 저녁을 굶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어, 나는 컵라면과 햇반과 김 쇼핑을 준비했고, 그는 발리에서 절대 먹고 싶지 않은 비주얼의 전투식량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녜삐 데이는, 아주 평화롭고, 고요하고, 인상적이었던,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좋은 명절이었다.

3월 7일 녜삐 데이 오전 12시 45분에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무사히 체크인을 마치고, 발리에 도착해 침대에 누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13시간 남짓의 긴 비행과 경유 동안 묻은 피로들을 천천히 털어 낸 후 잠을 청했다. 그리고 3월 7일 아침, 침묵의 날이 시작되었다. 적은 수의 호텔 직원들은 전부 발리 전통의상을 입고 일을 했고, (사실, 이것은 다음날 녜삐 데이가 끝나고 나서야 인지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녜삐 데이가 끝나자마자 전통의상이 아닌, 흔한 호텔 직원들의 유니폼을 입었으므로) 호텔의 메인 입구는 테이프로 막혀 있었으며, 직원들은 우리에게 호텔 밖으로 나가지 않기를 당부했다. 조식을 먹는 도중에는 몇몇 직원들이 레스토랑의 큰 창을 박스와 테이프로 꼼꼼히 가리는 작업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이유를 묻자, 그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녜삐 데이에는 몇 가지 금지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일하는 것, 불을 피우는 것, 여행하는 것(밖을 나돌아 다니는 것), 더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몇몇 사람들은 이야기하지 않거나 먹지 않기도 합니다. 어쨌든 침묵의 날은 명상과 자아 성찰의 날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이 날을 보내요. 그런 날이지만 우리는 호텔이기 때문에, 저녁에도 레스토랑 영업을 해야 해서, 불을 켤 수밖에 없는데 불빛이 새어 나가면 지역 순찰을 도는 사람들로부터 경고를 받아요. 그래서 미리 가려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다른 많은 호텔 방문객들과 함께) 호텔에 갇혀 조용히 발리 명절을 보냈다. 아직 우기를 벗어나지 않은 발리의 하늘은 하루 종일 비를 퍼부었고, 조식을 먹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어, 창 밖의 묵직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거나 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늦은 오후에는 비 오는 야외 수영장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수영을 한 판 했다.                                                                                                                                                                                                                                            

녜삐 데이에 생존 문제가 조금 해결되자, 우리는 하루 종일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몇몇 대비책을 마련했었는데, 나는 리디북스 페이퍼에 읽을만한 충분한 책을 채웠고, 그는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것들을 양껏 다운 받았다. 이것들은 우리의 긴 비행시간은 물론 녜삐 데이에도 유용했는데, 나는 그가 낮잠을 자는 동안 <애프터 다크>와 <메리 수를 죽이고>를 읽었고,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며, 함께 <데이팅 라운드>를 몇 편 보았다.                                                                                                                                                                                          

시간이 느릿느릿, 침묵을 통과하고 있었다.


글쎄, 누군가는 발리까지 여행을 왔는데, 하루 동안 호텔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면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날은 우리에게 무척 귀중한 날이 되었고, 이후 며칠간의 건강한 여행을 위하여 숨을 고르고, 그 섬의 고요함을 존중할 수 있게끔 했다. 시작은 나의 부주의한, 혹은 대책 없는 비행기 티켓 예약이었으나, 이렇게 불쑥 녜삐 데이를 만나게 된 것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았던 그에게도 고마웠다. 그 시간들을, 발리의 호흡에 맞춰가며 천천히 즐기고 이 섬이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면서 보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필요하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모든 것들을 멈추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부족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한 번씩 말에서 내려 한참을 뒤를 돌아본다고 했다. 뒤쳐졌을지도 모를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기 위해서라고. 어쩌면 발리는 우리에게 시간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발리로 날아온 우리의 리듬을 적절하게 맞출 수 있도록. 급하게 뛰던 습관을 이기지 못해, 이곳에서 놓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기지 않도록.                                                                                                                                                                                                                                                                                                              

여전히 젖어 있는 공기의 밤과 빛이라고는 하나 없이 암흑에 휩싸인 도시를 바라보았다. 낮잠을 하도 많이 자서, 밤에 제대로 잠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우리는 그날도 꿈 한점 없는 맑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 무거웠던 구름과 함께 침묵이 걷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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