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만세 Aug 06. 2019

노는 기록 - 2일

2019년 3월 6일 / 우붓, 발리, 인도네시아 

딱히 발리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이유는 다만 무지했기 때문이겠지.                                                                             


남아 있는 연차휴가 일수를 보며, 어떻게 쓰면 잘 쓸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 보았다고 하면, 그건 뻥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차휴가는 늘 남김없이 알차게 쓰면서 여기저기 쉽게 쉽게 마음 내키는 대로 여행을 다니고는 했었다. (그 당시 함께 있던 사람의 영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꾸준히 해야 감을 잃지 않는 법이고, 고기 먹는 것을 쉬다가 대뜸 다시 먹으려고 하면 망설여지는 법이다. (고기 먹는 것을 한 번도 쉰 적이 없어, 부적절한 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쉬지 않고 일해서 뭐하나, 라는 생각은 사실 언제나 들지만, 게으른 탓에 쉬는 것도 잘 미루는 편. 도대체 뭘 하면서 쉬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막막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럴 때는 무조건 여행이겠지만 내 곁에 스며들어 있는 새로운 사람과의 여행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아 조금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무작정 티켓팅을 해놓고, 닥치면 움직이는 게 나처럼 게으르고 쓸데없는 잔걱정이 많은 사람에게는 무척 효과적이다. 해서, 1월부터 스카이스캐너와 카약을 뒤적거리며, 지구본을 돌렸다.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어딘가에 다녀오려면, 일본이 답이겠지만, 그러면 또 고작 이틀 정도의 연차를 쓰겠지. 내년이 되면 그대로 사라질지도 모르니, 뭉텅뭉텅 썰어서 쓰자, 라는 게 최초의 다짐이었다.


그렇다고 빠른 시일 내에 멀리 떠나는 건, 당연하겠지만 티켓이 비쌌다. 베트남, 태국, 오키나와, 미얀마, 다시 베트남, 그냥 홋카이도, 필리핀? 을 차례로 도착지 빈칸에 넣어보다 생각난 게 우붓이었다. 그저 예전에 어떤 브루어가 우붓에서 영감을 받아 맥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라서였다. 말하자면, 그냥 아무 데나 고른 거였다. 날짜를 대충 골라 3월 6일부터 3월 12일까지, 여행 일정은 이랬다. 비행기는 12시간에서 13시간 남짓이 걸리는 중국 경유 노선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 나는 시간을 낭비하기로 했고, '중국 남방항공'이라는 타이틀 앞에서 약 2분간 멈칫했지만, 될 대로 되라지 라는 마음으로 결국 티켓팅을 완료했다.


그리고 3월 6일 오전, 별다른 일 없이 비행기가 지상을 벗어나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라고 하기에는, 떠나기 전 아주 사소한 문제에 직면하기는 했었다. 여행 날짜만 잡아놓고 또다시 게으르게 손을 놓고 있다가, 그래도 잘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에어비앤비와 몇몇 호텔 예약 어플리케이션을 뒤적이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내가 선택하는 날짜에 자꾸만 따라오는 노티스가 마음에 걸렸다. 3월 7일은 발리의 명절 녜삐 데이로 호텔 체크인이 불가능합니다, 라는.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것도 여행자들이 바글바글하다는 발리에 그런 게 어딨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자꾸만 눈에 띄니 불안해지기 시작하여 녜삐 데이를 검색했더니 실제로 그런 게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우리가 탄 비행기가 발리 공항에 도착하는 시간은 3월 6일 오후 11시 25분이었고, (4월이 된 지금까지 정확하게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때 내가 진심으로 쫄렸기 때문이다) 녜삐 데이는 보통 당일 오전 6시부터 시작되기는 하지만, 전날 저녁 시간부터 거리에 사람이 없어지고 상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며, 공항과 호텔에도 직원들이 줄어든다고 했기에, 안전하게 호텔에 체크인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35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입국심사대를 빠져나가는 데 오래 걸리기로 악명 높다는 발리 공항에서 35분 만에 빠져나가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해야 한다는, 뭐 그런 의미였는데 쨌든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비행 일정을 바꾸기에는 늦어 버렸고, 어떻게든 공항을 벗어나 안전한 숙소에서 녜삐 데이를 버티기 위해 첫날과 둘째 날의 숙소를 공항 안에 있는 호텔로 잡은 후, 어떻게 입국심사와 짐 찾기를 35분 만에 격파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자정이 좀 지난 시간에 체크인을 부탁하기 위해 호텔에 Sorry와 Please로 뒤범벅된 메일을 보냈고, 체크인이 문제없이 가능하다는 답신을 받고서야 마음을 놓고 여행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웃긴 일이었다. 아무 날이나 골랐는데 녜삐 데이 당첨이라니.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의 명절이라니.

3월 6일 밤, 11시 25분, 우리가 탄 비행기는 활주로에 가뿐히 내려앉았고, 좀비 떼가 몰려드는 것 같은 디스토피아적인 입국심사대를 죽지 않고 빠져나와, 심지어 환전까지 한 다음 12시 45분,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 아직 비의 계절이 끝나지 않아 젖은 공기가 얼굴과 팔에 달라붙었고, 우리는 발리에 있었다.                                               


이전 01화 노는 기록 - 1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