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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만세 Aug 06. 2019

노는 기록 - 4일

2019년 3월 8일 / 우붓, 발리, 인도네시아




신들의 섬이 긴 침묵에서 깨어나, 우리에게 문을 열었다. 발리 땅을 딛고 선지 약 35시간 만이었다.

이틀 밤동안 여기저기 던져 놓았던 짐들을 분주하게 그러모았다. 하늘은 여전히 흐린 와중에 이따금씩 빗방울이 떨어졌다가 한 줌의 햇살이 드러났다가를 반복했고, 그러는 동안 우리는 두 개의 캐리어를 끌고서 도착했던 그날과는 다른 멀끔 멀쩡 한 상태로 호텔 로비에 섰다. 드디어 문을 연 호텔 안의 환전소에서 100달러를 루피아로 환전하고 (우붓 시내에도 환전소가 많이 있으며, 달러가 환율이 좋아 보통은 100달러씩을 그때그때 환전해서 쓰는 것이 좋다고 한다), 조금 비싸더라도 호텔에서 연결해주는 택시를 타고 우붓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하루를 꽉 채워 쉬기만 한 덕에 컨디션은 최상이었지만, 어쩐지 공항 앞에서 혼을 채가는 택시 전쟁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평화와 쾌적함, 정신 건강에 만원 정도를 지불하고 우붓으로 향했다. (드디어)

우붓 여행을 준비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은, 우붓에는 좋은 리조트도 많지만 (예상 가능한 부분) 저렴하고 크고 예쁜 에어비앤비도 무척 많다는 것이었다. 선택지가 없었던 초반 이틀간의 (녜삐 데이 덕분에) 공항 호텔 숙박을 제외하고, 3번의 숙박이 있었는데 고민해야 하는 옵션은 백팔십 가지였다는 이야기. 보통은 숙소 예약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약 2주간의 심사숙고를 해야만 했고, 결과적으로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를 3개의 다른 숙소를 예약했다. 무려 3개의 다른 어플리케이션과 구글, 숙소 사진과 서로 다른 옵션들에 치이느라 이동 동선까지 고려하기에는 여행 준비 동력이 모자랐다. 함께 여행하는 이가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와 암묵적으로 업무 분담을 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숙소를 골라 예약을 하고, 그는 도착해서 어떻게든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숙소들을 스마트하게 이어 내리라, 는 속 편한 믿음이었다.


그리하여 우붓 첫날의 숙소는 우붓 시내에서는 조금 떨어진 에어비앤비였다. 설명과 리뷰에 따르면 원래는 우붓 현지인이 살던 집이었고, 깨끗하게 관리된 수영장과 정원이 딸려 있으며, 호스트가 말도 안 되게 친절하다고 했다. 게다가 독채를 쓰는 데에 가격은 1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위치는 꽤나 찾기 어려웠고, 공항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호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 아저씨와 두 차례 통화를 연결해야만 했지만, 접선 포인트에서 호스트와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 스쿠터를 탄 채 나타나서는 우리와, 우리의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싣고 숙소까지 이동한다고 했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였지만, 우붓의 로컬 피플들에게 스쿠터와 불가능은 그다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님을 곧바로 깨달았다. 아저씨는 시트 뒤에 큰 캐리어 하나, 발 밑에 작은 캐리어 하나를 실은 후 유유히 멀어졌고, 우리 둘은 아주머니의 스쿠터 뒤에 완두콩처럼 붙어 앉아 달렸다.

도착한 숙소는 설명이나 리뷰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깨끗하며, 아름다웠다. 묵직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단에서 피어오르는 향에서 진득한 꽃냄새가 났고 샛푸른 잔디 위에 점점이 뿌려진 꽃과 작은 연못, 깨끗하고 파란 수영장에 눈길이 닿았다. 침실은 정갈했고, 욕실에서는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호스트 아주머니가 건네 준 달콤한 웰컴 드링크를 마시면서 잠시 동안 숙소 예약 성공을 축하했다. 짐을 대충 풀어놓은 후, 우붓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아주머니에게 근처 스쿠터 대여 샵을 물었을 뿐인데, 대뜸 본인이 가진 스쿠터 하나를 대여해 주고 말아서 선택지 없이 귀엽게 달리는 (오르막길을 심하게 버거워하는) 스쿠터에 앉아 수십 명의 땀냄새가 배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의 헬멧을 머리에 얹고 우붓 시내로 향했다.

좁은 도로와 키 큰 나무와 때때로 우거지는 나무들로 생기는 그늘의 청량한 바람이 있었고, 우붓 시내로 들어서면서 하늘의 색깔도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과 땡볕이었다. 우리는 먼저 그가 가보고 싶어 했던 DEUS 매장에 들러 옷들을 조금 구경한 후, 내가 구글 맵에 마크해두었던 ASHITABA 매장 (꽤나 균일한 품질의 라탄 제품을 정해진 가격에 판매하는 곳이라고 했다. 우붓 시장에서 구매하면 더 저렴하지만, 나는 보통 흥정이 귀찮다)에서 귀여운 라탄 백을 하나 사고 나서 우붓 시장으로 진입했다. 좁고 미로 같은 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상점들과 다닥다닥 붙어 걸어가는 사람들 덕에 금방 피곤해지는 곳이기는 했으나, 색감 예쁜 옷들이나 라탄 제품들, 드림캐쳐와 그림들이 집결되어 있는 우붓 시장은 무척 재미있었다. 게다가 가능하면 일정 중에 홀리 워터가 나오는 사원에 갈 생각이었으므로 사롱도 하나씩 샀다.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고, 여행에서도 쇼핑이 우선순위였던 적이 없었으나 나는 뭘 많이 샀다. 역시 여행과 돈 쓰는 것은 승부를 내기 어려울 만큼 둘 다 재미있는데, 여행하면서 돈 쓰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

발리에 도착한 이래로 가장 뜨거운 날씨를 몇 시간 경험하면서 말도 못 하게 예쁜 하늘에 경탄했지만, 그건 그거고 우리는 금세 지쳐버리고 말아 우붓 시내의 중심에 있는 영혼의 안식처, 현대인의 오아시스, 스타벅스에 들러 아는 맛의 커피를 마시며 잠시 열기를 식혔다. 친절하고 다정한 우붓의 스타벅스 파트너는 내 이름이 마치 태국어처럼 들린다고 말했고, 나는 관광객으로 빽빽한 우붓 한가운데에서 어쩐지 안전함을 느꼈다. (외국인들에게 이름을 말해줄 때, 보통 '남경'을 그냥 '남'으로 줄여 말하는데, 가끔 태국어에서 '물'을 뜻하는 단어와 비슷하게 들린다고 한다) 커피를 비우면서, 우리의 피로도 함께 조금 덜어낸 후, 스타벅스 뒤편으로 이어져 있는 사라스와띠 사원을 한 바퀴 돌았다. 발리에서의 첫 사원이었고, 소문대로 아름다웠으나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 천천히 둘러보기는 힘들었고, 문 너머에 뭔가 있는 듯 보였으나 들어갈 수가 없어 약간은 아쉬웠다. 우붓에 며칠 머무르는 동안 사원 한두 개는 더 만나겠지 싶어, 우리는 그쯤에서 스쿠터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하늘빛이 조금씩 엷어지고, 미세하게 서늘한 바람이 불며 공기가 조금씩 내려앉는 무렵에, 우리는 정원 수영장에 둥둥 떠다니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소란스러운 생각들이 증발하고, 뭉근하게 짓눌려 있어 구깃구깃했던 마음이 보송하게 펼쳐질수록 어쩐지 시각이나 후각, 촉각은 예민해졌다. 그저 색깔들을 보고, 벌레 소리나 바람 소리를 듣고, 풀과 향, 꽃의 냄새를 맡고, 살에 닿는 물의 감촉을 느끼는, 그런 일에 시간을 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은. 체크인할 때 호스트 아주머니에게 추천받은 숙소 바로 옆 로컬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 우리는 쓸 수 있는 온갖 여유를 끌어모아 샤워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전이 오는 바람에 샤워의 끝은 조금 불쌍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전기는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왔고, 우리는 슬로우 푸드를 지향하는 식당에서 천천히 나오는 식사를 기다리며, 어두운 논밭과 천장을 기어 다니는 도마뱀들을 쳐다보다가, 밥을 먹고 맥주와 라씨를 마셨다.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였다.

여행의 기억은 어떤 것들로 남는 것일까. 수십 장씩 찍어 놓은 사진이나, 관광지에서 쓸모를 모르겠지만 일단 사고 본 기념품들, 절대로 다시 볼 일 없지만 버릇처럼 모아두는 영수증, 갖가지 티켓과 리플렛으로 여행의 기억은 쌓인다. 그러나 바래지고 소실되는 것들 너머에 명징하게 빛나는 여행의 기억은 감각으로 기록된다. 곁에 있던 사람의 피부 온도로 여행지의 날씨를 기억하고, 나에게 웃어주던 사람들의 목소리로 그 시간의 기분을 기억한다. 눈동자에 비치던 색감들로 풍경을 기억하고, 코와 혀끝에 닿는 달콤한 냄새로 언제든 여행을 재구성할 수 있다. 속도를 늦추고 여유를 체득하면 다르게 기억되는 것들을 우리는 우붓에서 배우고 있었고, 그러면서 다시 하루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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