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만세 Aug 06. 2019

노는 기록 - 5일

2019년 3월 9일 / 우붓, 발리, 인도네시아





낯선 장소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일은, 뻔한 일이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답다.                           


                                                              

여행을 앞두고 발리에서 가볼만한 곳을 하나 추천받았다. 바투르 산이라는 일출 포인트였는데, 화산 폭발로 인해 생긴 커다란 구덩이와 화산재와 자잘한 돌멩이들이 있는 급한 경사의 산을 두 시간쯤 걸어 올라가면, 아궁산과 일출, 인도네시아의 다른 섬들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개고생일 수도 있지만, 그 끝에 만나는 일출과 풍경은 무조건 아름다워서, 어두컴컴한 새벽부터 화산섬을 트래킹 하는 수고를 감수할 수 있다면 꼭 한번 가볼만한 곳이라고 하여, 검색을 조금 했었다.


트래킹을 좋아하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트래킹, 러닝, 등산 등등 온갖 종류의 건강에 좋고 땀 흘리는 행위들과는 거리가 몹시 멀어 가끔 듣기만 해도 어색할 정도인데, 여행이라는 건 보통 평소에 안 하던 일들의 연속인 경우가 많으니 기어서라도 올라가겠지 싶어 바투르 산 일출 트래킹을 일정에 넣었다. 바투르 산 일출 트래킹은 우붓 시내 기준으로 새벽 1시 혹은 2시쯤 차를 타고 출발해서 트래킹 시작점까지 간 다음, 가이드와 함께 일출 포인트까지 죽어라 올라가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고, 우붓 시내 곳곳에 예약할 수 있는 곳이 많다고 했다. (찾아본 바로는 발품을 좀 팔면, 더 저렴한 가격의 패키지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가격 비교를 해 보는 게 귀찮은 나는, 한국에서 클룩 앱을 통해 트래킹을 예약했다. (드라이버 픽업과 가이드, 일출 포인트에서의 아침식사까지 포함된 패키지가 일인당 3-4만 원대였다) 예약을 알아보며 간단히 리뷰를 훑어봤는데, 긍정적인 마음가짐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초장부터 낙오와 추위를 걱정하게끔 했지만, (리뷰대로라면 바투르 산 일출 트래킹은 거의 히말라야 등반이었다) 역시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크게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전날 밤 맥주를 한 병씩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든 우리는 새벽 한 시 반 알람을 듣고 눈을 떴고, (새벽 한 시 반 알람이라니) 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사히 픽업 포인트에서 드라이버를 만나 끔찍한 몰골로 차에 실리는 것에 성공했다. 트래킹 시작점까지 실려 가면서 기절하듯 잠들 줄 알았는데 쾌청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나와서인지, 갑자기 공포의 트래킹 리뷰들이 산발적으로 떠올라서인지, 잠이 오지 않아 어두운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 시간 반 가량을 달렸다. 트래킹 시작 지점에 도착하자 꽤 많은 사람들이 트래킹을 준비하고 있었고, 우리는 우리에게 배정된 가이드를 만나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손전등을 받았다. 사위가 여전히 어둡고,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 새벽 3시가 넘은 시각, 주근깨처럼 촘촘히 박힌 별을 바라보며, 가이드로부터 받은 손전등으로 발아래만 겨우 밝히면서 우리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일출을 보러 산에 오르는 것은 일종의 운 시험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날씨에 의존하는 일이고, 고생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일출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산을 올라갔다가 운 좋게 해 뜨는 광경을 보거나, 아니면 해는 구경도 못하고 내려오거나인데, 나는 이런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심플함이 좋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네팔을 여행했을 때, 지진으로 여기저기가 부서져버린 거대한 산들과 협곡 근처의 숙소에서 간밤에 미세하게 느껴지던 땅의 진동, 중간에 트럭 같은 게 끼어 오도 가도 못하게 되면 몇 시간은 그저 기다려야만 하는 굴곡진 길을 만나면서 생각했던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자연의 힘과 그 앞의 겸허함이었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으니, 욕심을 버리고, 기다리며, 감사할 것. 발리에서의 일출도 마찬가지였다.


트래킹 코스는 처음에는 완만하게 시작했지만 갈수록 경사가 급해졌는데, 경사보다는 어둠과 미끄러운 지면이 문제였다. 게다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좁고 미끄러운 길을 따라 같은 목적지로 이동했기에 확실히 속도를 맞추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우리의 가이드는 이따금씩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그녀가 밟았던 돌들을 차근차근 밟고 숨을 고르게 쉬면서 죽어라 그녀의 뒤를 쫓았다. 마지막 30분 정도는 가장 급한 경사를 따라 산을 올랐는데 중간중간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지만 대체로 무사히 일출 포인트에 도착했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시작했지만 생각보다는 할 만한 트래킹이었다. 무엇보다 낙오되지도 않았고, 추위에 떨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리뷰에 쫄아, 거의 말도 안 하고 죽기 살기로 걸었고 겉옷도 많이 챙겨가기는 했다) 차가운 숨을 내쉬며 아직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의 가이드는 해가 잘 보일만한 장소에 큰 천을 하나 깔아준 후 간단한 아침식사를 챙기러 갔고, 가깝게 내려앉은 구름들은 서서히 붉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동안, 변화하는 하늘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곳에 오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피부에 미세하게 온기가 스미기 시작할 때 즈음, 가이드가 가져다준 바나나 샌드위치를 먹으며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우리 바로 옆에 앉아서 일출을 보던 아저씨가 그의 가이드를 붙잡고 우는 소리를 했다. 올라오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 길로 다시 내려가는 게 무서운데, 좀 더 편하고 쉬운 길이나 뭔가 타고 내려가는 방법은 없느냐면서. 그의 긍정적인 가이드는, 자신을 믿고 길에 집중하면 해낼 수 있으니 Just Do It, 이라고 해맑게 대답했는데 애석하게도 아저씨는 고귀한 나이키 정신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고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며, 심지어 나이키 후디까지 입고 올라가 상대적으로 나이키의 주술에 취약한 나는, 그녀의 말대로 Just Do It 하며 누구보다 힘차게 하산을 했는데 그 이후로 약 일주일간 허벅지가 아작 나는 고통을 맛보았다.   


                                                  

다시 차를 타고 완벽하게 정신을 잃은 후, 출발할 때보다 더 심난한 몰골로 숙소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였고 죽을 맛이었다. 전날 호스트 아주머니에게 바투르 산 일정 때문에 아침을 못 먹을 것 같다고 말해 놓았는데, 아주머니는 우리의 일정에 맞춰 아침을 만들어 주었고, 심지어 맛있었다. 체크아웃 후, 그녀는 또다시 캐리어를 스쿠터에 싣고 우리를 택시가 있는 곳까지 바래다주었고, See you라고 인사했다. 어쩐지 명절 같은 느낌이었다.    

                        

                                                  

두 번째 숙소는 첫 번째 숙소나 우붓 시내에서 차로 20-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사진으로 봤을 때 푸르른 논밭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도착했더니 실제로 논밭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있었다. 우붓에서 제일 찾기 쉬운 게 환전소와 오토바이 렌탈 샵이라고 했는데, 숙소 근처에는 둘 다 없었고, 덕분에 이번에는 원하는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자 했던 그의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스쿠터가 없으면 움직이는 게 번거로워지는 숙소 위치 때문에 걱정했으나, 다행히 숙소에 대여용으로 가지고 있는 단 한대의 스쿠터를 빌릴 수 있었다. 대략 10분 후에 부서질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숙소에 함께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며 (맛집이었다) 체크인 시간을 기다렸다가 방을 안내받았고, 사진에서 본 것과 같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돔형 숙소에 들어섰다. 넓고 쾌적해 보이는 공간과 침대가 있었고, 거의 텐트형이라 허술한 잠금장치가 있는 창문(인지 잘 모르겠다)을 열면 적당한 온도의 바람이 불어왔다. 야외에 있는 욕실은 천장이 뚫려 있어, 샤워할 때 물줄기와 햇빛이 만나 무지개 샤워를 할 수 있었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하지만 똥 쌀 때도 대나무 벽 틈새로 초록색 논을 볼 수 있었다.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던 탓에 체크인 후 모자랐던 잠을 조금 채워볼까 했지만, 숙소와 날씨가 너무 아름다웠다. 빌린 스쿠터로 적어도 가까운 거리는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고, 구글맵을 확인하니 마침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정화 사원이 있어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헬멧을 썼다. 목적지는 '발리 사원'을 인터넷에 검색했을 때 (구글, 인스타그램 등 각종 채널을 통해) 가장 많이 나오는 'Pura Tirta Empul'이었고, 명성에 걸맞게 심지어 입구에서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설 뻔했을 때 옆에서 달리던 스쿠터에 앉은 현지인이 묻지도 않고 제대로 된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만큼 뻔하게 관광객이 많은 곳이었다. 성수가 나오는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옷을 빌려 입고, 줄지어 성수를 맞고 있었고, 발리의 새해가 밝아서인지 관광객만큼 현지인도 많았다. 어쨌든 나는 그 '정화'라는 것이 하고 싶어 사원을 찾았는데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 건지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대충 눈치를 보면서 줄을 서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차례로 머리를 적셨다. 대략 열 개가 넘는 물줄기를 맞다가, 중간에 아무도 가지 않는 인기 없는 서너 개의 물줄기를 만나 멈칫했더니, 옆에 있던 현지 사람들이 그 물줄기들은 죽은 자들을 위한 거라며 나를 구해 줬다. 죽은 자를 위한 물줄기를 제외하고 모든 물줄기를 만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도 많았고, 그에 따라 줄도 서야 했고, 기도도 해야 했으니. 물론 처음에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깨끗해지기를 바라며 초면인 발리의 신들에게 예의 바르게 기도했으나, 시간이 흐르고 물줄기도 막바지에 이르면서 저녁 시간에 예약해둔 마사지 생각이 나는 바람에 결국 다 망했다.                           


                                                  

무려 한 달 전에 예약해둔 마사지 시간에 늦을까 봐 중간에 뛰쳐나오고 싶었던 마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마지막 물줄기를 클리어하고, 허겁지겁 젖은 옷을 갈아입었는데 그가 늦어져 조금 짜증이 났다. 이미 때가 낀 마음은 성수로도 어쩔 수가 없다. 우리는 마사지 예약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샵에 들어섰고, (물론 예약 시간 15분 전에 도착하라는 노티스를 미리 받았으니, 사실은 지각이었지만) 때가 낀 마음과 푹 젖은 데다 먼지까지 묻은 몸을 마사지 베드에 던지듯 뉘었다.


마사지받는 걸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마사지로 유명한 나라에 방문하면 무조건 좋은 마사지 샾부터 찾게 된 것은 분명 나이를 먹고 말았다는 뜻 이리라. 90분간 이어진 발리 전신 마사지의 내용은 생략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잠시 정신을 잃고 천국 비슷한 곳의 모서리 같은 것을 보고 왔기 때문이다. 마침내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7시가 넘은 시각, 흐물흐물해진 몸을 이끌고 이미 옅은 어둠에 잠겨 있는 우붓의 시골길을 달려 숙소에 도착했는데 우리의 자연 친화적인 숙소가 어쩐지 낯선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틀 동안 우붓에서 스쿠터를 타고 다니면서 그와 내가 깨달은 것은 '스쿠터가 많이 세워져 있는 곳이 핫플레이스'라는 점인데, 아니 낮에 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던 숙소 앞에 스쿠터가 200대쯤 빽빽했다. (심지어 교통정리하는 가드도 있었다) 사실 낮에 체크인을 하는 동안 그곳에서 토요일마다 파티를 한다는 얘기와 숙소에서 묵는 사람들은 파티 입장이 무료라는 안내를 들었고, 어쩐지 아무도 안 올 것 같은 파티지만 저녁에 심심하면 한번 들러볼까 하고 가볍게 넘겼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어두운 논밭 한가운데에서 우붓의 온갖 핫한 언니 오빠들이 파티 입장 줄을 섰고, 입장도 무료인 김에 저녁도 해결할 겸 우리도 줄에 합류했다. 낮에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밥을 먹고, 적은 수의 사람들이 조용히 책을 읽거나 차를 마셨으며, 몇몇이 나른하게 누워 시샤를 하고 있던 공간은 채식 뷔페로 바뀌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작은 야외 수영장 주변에는 큰 모닥불과 그 주변에서 신들린 듯 춤추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과도 같은 낮과 밤의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레스토랑(이었던)으로 진입하는 계단 한구석에는 신발들이 쌓여 있었는데, 알고 보니 모닥불 근처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전부 맨발이었고, 배를 간단하게 채우고 맥주와 칵테일을 몇 잔 마시고 낯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어쩐지 묘한 명상음악 리믹스를 계속 듣고 있자니 맨발로 춤추고 싶어 져 우리도 신발을 벗었다. 아주 많이 웃었고, 맨발로 풀 위를 걸어가 맥주를 샀고,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춤을 췄다.                       


                         

                                                   

단 며칠 동안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여행지의 얼굴이란 아마도 아주 적은 숫자일 것이다. 게다가 '여행'이라는 자체 필터까지 씌운 채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바람에 거의 모든 것들이 좋아 보이는 데다 거의 모든 것들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하니, 실제로 다양한 면면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행지에 머무르는 시간은 우리에게도, 그리고 그 장소에게도 최초의 시간이며 단 하나의 시간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짧은 순간순간들도 그러하다.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으나, 유일무이한 것들을 바라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과 그림들을 우리 안의 어떤 공간에 새기면서, 천천히 걷고 천천히 숨 쉬며. 우리의 하루는 짧지만 길었고, 느렸지만 숨 가빴고, 단순했지만 몇 번의 우연들이 겹쳐 입체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에서, 그리고 여행에서 다시는 없을 하루가 지나갔음을 알았다.                      


이전 04화 노는 기록 - 4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