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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미 Feb 03. 2022

밤쟁이들의 히어로

  

 신혼 시절. 시댁에 가서 저녁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누군가 말했어. “치킨  마리 할까?”라고. ‘치킨  마리에는 ‘같이 소주  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지. 작은 아파트 거실에 상을 펼쳐놓고 치킨과 소주를 사이좋게 나눠 먹던 어느 날이었다. 얼큰하게 취한 시아버지가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어. 순간 어머니와 남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지만, 처음 듣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어. 어머니의 고생담은 자주 들었지만, 말수가 적은 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는 새로웠거든.


 “나는 성질이, 스님이 돼야 했었는데. 스님이 딱 맞는 사람인데. 장남이라 이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스님이라니. 시아버지에게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는지 그때 알았어. 아버지는 농사꾼의 장남으로 태어나 무직인 상태에서 결혼하고, 도시에 와서 치킨 가게를 차렸어. 장사가 얼마나 안됐던지 손님에게 파는 치킨보다 아들, 딸의 친구들에게 공짜로 튀겨주는 치킨이 더 많았다고 해. 둘러보니 네 사람 중 어정쩡하게라도 웃는 것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망한 옛 가게 이야기가 나오자, 또 그때의 열불이 치솟아 오르는 듯했어. 아니, 갑자기 그때 이야긴 왜 꺼내노!  


 그래도 역사는 소중한 것이지. 집안의 새로운 사람인 며느리도 이 집안의 내력을 알고 있어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어.


“그때는 치킨을 주문하면 양배추를 썰어서 같이 내줬는데, 양배추가 갑자기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져. 물가가 그렇게 뛰데. 기름도 매일 갈아야 맛이 있는데. 이건 뭐 기름값도 안 나와. 물가가 확 오르니까 이건 뭐, 닭이 팔려도 기쁘지가 않은 거야”     


  허허하고 웃는 아버지의 웃음은 회한이 남는 것도 속상함이 남아 있지도 않아 보였어. 다 지난 일이니 조금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장사에 별 재주가 없다 깨달은 아버지는 치킨 가게를 접은 이후 채집 생활과 농사에 주력했어.


 철마다 떨어지는 밤과 도토리를 줍고, 쑥을 캐고, 고사리를 뜯고, 냇가에서 고동을 잡아 상에 올렸다. 오디 엑기스를 담그고, 자신의 어머니를 도와 된장과 고추장을 담갔지. 사계절 내내 본인이 채집한 음식은 주로 남의 입으로 들어갔어. 원체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어. 그게 어머니는 애가 탔을 지도 모르겠어.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딸과, 그들이 각각 낳은 둘, 셋의 손자를 생각하면 ‘스님’이라는 아버지의 꿈이 다소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아무튼 채집에 능한 아버지 덕분에 어떤 계절에 어떤 과일과 채소가 나는지 아주 잘 알게 됐어.


 몹시 추워지기 전인 가을철은 밤 시즌이야. 시댁에 갈 때마다 밤이 담긴 커다란 봉지를 받아와. 본인은 밤을 삶아 놓으면 겨우 서너 개 까먹으면서 밤을 좋아하는 아내와 아들 가족을 생각해서 매주 주말마다 밀양의 야산에 가서 밤을 주워 오는 거지.


 얼마 전에는 쌍둥이 형제들이 부지런히 밤 먹는 모습을 동영상 찍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게 보내드렸어.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기도 했지만, 또 밤을 가져가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기도 했어. 밤을 삶아 두고 삼 남매에게 알아서 파먹으라고 숟가락을 쥐여 줘도, 밤 까는 속도가 아이들 먹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어. 급기야 막내는 하원해서 집에 들어오면 밤부터 찾았어. 밤을 삶아 식탁에 내려놓으며 “밤쟁이들아~ 밤쟁이들아~” 하고 부르면 “우리는 밤쟁이야!”하고 웃고는 했지.


 어머니에게 새로운 밤쟁이들의 탄생에 대해서 말했더니 ‘나도 맨날 일 마치고 오면 집에 와서 삶아 먹는다’며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어. 밤 소비자가 이렇게 늘었으니 밤 보급자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바쁠지 추측할 수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주말, 시댁에 가서 다 같이 밤을 삶아 까먹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참 걱정이다. 이제 밤이 없는데... 너희들이 아쉬워서 어떡하겠나 싶다.”

 “아니, 없으면 안 먹는 거지 뭘!”     


무심하게 대답하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다른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맨날 먹는 밤이 없어 봐라. 그 단맛이 아쉽지.”

     

 이때다 싶어, 이번 가을에 아버지 덕분에 밤을 너무 잘 먹었다고 감사 인사를 드렸어. 아버지는 가만히 웃을 뿐 아무 말도 없으셨지. 나는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하지만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어. 언젠가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제 밤을 주울 수 없는 계절이 되고,

여전히 당신은 스님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당신은 밤쟁이들의 조용한 히어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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