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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규의 세 여자

인생의 진실

by 루파고

내 친구 준규의 이야기다. 불알친구나 다름없는 고향의 죽마고우 준규는 거의 25년이 다 되어서야 인천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거의 살붙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다. 언젠가는 꼭 한번 만나야지 하는 생각만 가지고 살아왔었는데 세월이 그렇게나 지난 지금, 중년이 되어버린 준규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주름살이 생긴 준규의 이마를 보고서야 나의 겉모습 역시 늙은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어제 우리는 25년 만에 만난 것을 자축하듯 미친 듯이 마셨다. 나 또한 그랬지만 준규도 어제처럼 즐거운 술자리는 몇 년 만인지 모를 정도라며 마셔댔다. 나는 준규를 추궁한 끝에 30년 넘게 고향에서 굴러다니던 소문의 진상을 드디어 확인했다. 준규는 술에 떡이 되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진실을 파헤친 후 착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30년이나 된 일들이기 때문인지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이제는 나도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면 만나는 친구들이 없다. 하긴~ 오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우리는 이 거친 세상을 살아오면서 먼저 세상을 등진 친구들도 더러 있다. 준규의 입에서 흘러나온 추억의 때가 뭍은 고향 이야기는 지난 세월을 공감하게 만들었다. 이제부터는 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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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천 연수구의 송도국제도시 아파트에 사는 부자 친구네 집들이 때문에 먼 걸음을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고향 친구의 집도 아닌 그곳에서 우연히 준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거의 눈물이 날 뻔했다. 우리는 집들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25년 만에 만난 우리는 집들이 자리에서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인천 송도국제도시는 오래전에 송도유원지로 유명했던 송도를 최첨단 시설로 무장하고 최고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완전 새것이다. 그러나 준규와 나는 조금씩 고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송도 국제도시에 있으니 도시의 시간만큼은 거꾸로 가는 것 같았다. 기분이 애매했다. 하지만 새로 꾸민 송도국제도시는 준규와 나의 추억을 두 팔로 반기고 있었다. 수많은 음식점과 주점들이 우리에게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준규는 그중 가장 멋져 보이는 고급 주점으로 나를 이끌었다. 주머니 사정이 녹록지 않거나 한 편은 아니었지만 고급 주점까지는 무리다 싶어서 준규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녀석은 자기가 낼 테니 걱정 말라며 끝내 고급 주점의 문턱을 넘어섰다. 물론 집들이 때 마신 전작이 있긴 했지만, 우리는 술이 우리를 마시는 건지 우리가 술을 마시는 건지도 모르고 떠들어댔다.

돌담을 넘다가 머리로 떨어져서 계란 만한 땜통이 생긴 기태 녀석, 수박 서리하다가 걸리는 바람에 형철이네 할아버지한테 끌려가서 비가 오는 날마다 원두막을 지키고 있었던 진성이, 너무 못생겨서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라는 별명을 가진 영선이, 하도 안 씻어서 매일 선생님이 머리를 감겨주시던 경호, 숙제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선생님마저 포기하게끔 만들었던 호용이, 한겨울에도 코를 불리면 불렸지 절대 외투를 입지 않았던 지금 생각해보면 철인 체력을 가진 민구, 예쁜 척은 더럽게 하고 다녔던 선민이, 학교에서 제일 못생겼던 호숙이 이야기는 우리의 술안주가 되어 주었다. 준규는 이런저런 고향 이야기를 하다가 동네를 은근히 들었다 놓았던 자기 자랑까지 이어졌다. 그것이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삼십 년이나 내 호기심을 풀지 못했던 소문의 진실이 드디어 밝혀질 것 같았다. 물론, 준규가 내 호기심을 풀어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술이 거해지고 준규의 용기가 격해지면서 드디어 말문을 열어 놓았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내가 아는 사실과 준규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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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규의 세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준규는 충남 장항군에서 태어나고 자란 장항 토박이다. 준규네는 할아버지 때부터 쭉 장항에서 살았다. 준규네는 가끔씩 군산에 살기도 했다. 준규 아버지의 직업 때문이다. 준규는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장난꾸러기다. 사실 그건 좋게 표현한 것이고 말썽쟁이라고 하는 게 맞다. 사고뭉치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준규가 가진 절대적인 무기가 있었다. 그 사고뭉치 준규는 동네 여자아이들의 여심을 홀딱 빼앗아갈 정도로 잘 생겼었다. 지금도 나이가 든 것 빼고는 그나마 봐줄 수 있을 정도지만, 지금도 그때만큼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물론, 준규가 여자아이들에게만 인기 있었다는 건 아니다. 준규는 아는 것도 많고 말솜씨도 좋아서 거의 골목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고, 함께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온 동네는 모두 준규의 세상이었다. 준규의 친구들 중 병만이라는 녀석의 집은 주막을 운영했다. 준규 일당은 병만이네 주막이 아지트나 마찬가지였다. 준규 일당은 병만이네 주막 양조장에서 몰래 막걸리를 훔쳐다 먹곤 했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야 녀석들이 너무 일찍 술을 배워 버린 것 같지만, 그때만 해도 시골 아이들은 국민학교 때 막걸리 마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른들도 은근히 묵인해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설사 막걸리를 마시다 어른들에게 걸린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막걸리를 마신 만큼 욕을 들어 처먹는 수준에서 그쳤다. 아마 막걸리보다 욕이 더 소화는 잘 된 것 같다. 왜냐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욕먹은 걸 금세 다 잊어버리고, 또 막걸리를 훔쳐다 마시곤 했으니까 말이다. 준규 일당은 그대로, 그 모양대로, 하던 짓도 그대로 중학생이 되었다. 녀석들이 달라진 거라고는 국민학생이 중학생이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같은 국민학교에서 같은 중학교로 진학했기 때문에 결국 학교 위치만 바뀌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준규 일당에 새로운 멤버가 하나 추가되었다. 명숙이라는 여자 아이다. 이 녀석도 동네에서 알아주는 골통이었다. 물론, 준규의 수준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명숙이는 예쁜 아이도 아니고, 여자 같은 아이도 아니어서 남자들로 구성된 준규 일당에서 명숙이는 특별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명숙이는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서서 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명숙이는 오로지 <쪼그려 쏴!>였다. 준규 일당은 중학교 1학년 때만 해도 명숙이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가을, 어른들이 모두 논밭에 나가고 없던 한적한 주말. 병만이네 주막에 있는 골방에서 막걸리를 받아먹던 준규와 명숙이는 술김에 성관계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만큼은 온전히 둘만의 관계였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성관계라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 시골에서는 빈번하게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준규와 명숙이는 그들의 성관계에 있어 성이라는 개념이 성립되기도 전에 순전히 동물적인 욕구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라 어떤 죄의식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가벗고 뒹굴었다는 것이 부끄러울지언정 성관계 자체가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것이 준규와 명숙의 해석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 둘은 틈만 나면 성관계를 했다. 사랑 같은 것도 아니었다. 마냥 그냥 좋았다. 동물적인 감정 그 자체였다. 명숙이네 집은 장항이었다. 준규와 같은 동네다. 하지만 준규의 집과는 달리 명숙이네 집은 원래 장항이 아니었다. 장항 근처에 있는 유부도라는 조그만 섬이다. 준규와 명숙이가 첫 성관계를 맺을 즈음에는 유부도에 남아 있던 명숙이네 가족들이 모두 장항으로 이사 왔다. 그리고 준규는 명숙 이의 여동생 세연이를 처음 만났다. 물론 아무 일은 없었다. 준규는 동물인지는 몰라도 생각은 할 줄 아는 동물이었다. 세연이는 정말 귀여운 아이로 장항 시내에서 모르는 남자아이들이 없었다. 정말 예쁜 아이였다.

언젠가부터 준규는 공부를 꽤 잘하게 되었다. 준규 일당은 그런 준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준규가 처음부터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사고뭉치 준규가 갑자기 공부를 잘하게 된 것이 대체 어떤 계기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네 어른들은 준규를 보며 하는 반응이 달라졌다. 혀를 끌끌 차던 분들이 어느샌가 준규를 칭찬하고 있었다. 별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준규의 부모님은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한 준규를 유학 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집안의 구제불능 장남 준규는 어느새 집안의 희망이자 대들보 준규가 되어버린 것이다. 준규는 그야말로 할아버지 이후로 집안을 이끌어갈 집안의 희망이 되어버렸다. 명숙이는 애가 탔다. 명숙이는 나이를 먹으면서 준규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보다 성숙한 편이었다. 게다가 명숙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성관계를 알게 되면서부터 정신적으로 매우 급성장을 해버린 것이다. 준규는 명숙이와 훗날을 기약하고는 서울로 전학을 갔다. 유학을 간 것이다. 집안의 기둥이 되어버린 준규 때문에 준규네 집에서는 집 안의 모든 것을 준규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준규의 여동생은 준규의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파견되기도 했다. 명숙이는 준규가 금의환향해서 춘향전의 이몽룡처럼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숙이 품었던 꿈이 그저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이미 늦어버린 일이었다.

준규는 낯선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생전 처음 가본 서울이 유학으로 가게 된 곳이었다. 준규의 어머니는 준규의 손을 잡고 버스를 타는 연습을 삼일이나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낯선 서울에서 길을 잃고 집을 찾지 못할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준규는 어머니의 훈련에도 불구하고, 허구한 날 길을 잃어버렸다. 준규는 그제야 자신이 수재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게 첫 번째 깨우침이었다. 준규의 두 번째 깨우침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시험 때였다. 장항에서 수재 소리를 들으며 일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였지만, 육십 명 정원의 학급에서 중간 실력도 벅차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성적표를 받아 든 준규는 하늘이 노랬다. 준규와는 달리 서울 아이들은 영어도 잘했고 수학도 이미 중학교를 졸업하고 방학 때 어느 정도 교과 과정을 먼저 배우고 올라왔지만 준규는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준규는 난감했다. 그즈음 준규의 어머니는 그런 준규의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하고 여동생을 준규의 학업 뒷바라지 임무를 맡겨 올려 보냈다. 준규는 난감함을 넘어 마음이 무겁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이실직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싶기는 했다. 준규는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쳤다. 준규의 성적은 점점 떨어져서 육십 명 중 삼십사 등으로 일 학기를 마무리했다. 준규는 1학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준규는 자신에게 다시 사고뭉치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옮을 알았다. 준규는 살고 있는 달동네 월세방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강소주를 들이부었다. 정말 쓴 소주였다. 준규는 어릴 적 막걸리가 그리웠다. 준규 일당들이 그리웠다. 준규는 달빛을 안주 삼아 강소주를 세 병이나 마셨다. 그곳에서 준규는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일등을 해본 적 있는 사람만이 아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준규는 어차피 공부로 일 등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돈을 버는 것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술김이었을까? 준규는 용기가 백배했다. 하지만 사실 준규의 인생은 그의 생각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새로운 도전과 자신감에 달동네를 내려오던 준규는 동네 건달들과 마주쳤다.


“야! 돈 가진 거 다 내놔 봐! 어린 새끼가 술이나 처마시고~”


준규는 화가 났다. 그렇지 않아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거칠 것 없었던 준규에게는 그 어떤 것도 막을 것이 없었다. 준규는 술김에, 홧김에 건달들과 삼 대 일로 싸웠다. 누가 먼저 주먹을 뻗었는지, 누가 먼저 땅바닥에 나뒹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준규는 건 달 세 명을 모두 때려눕히고 말았다. 준규는 자신의 주먹을 믿을 수 없었다. 준규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주먹을 쓰게 되리란 걸 말이다. 건달들은 어린 준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비록 동네 양아치들이었지만 준규는 신이 났다. 여기서도 골목대장이 된 것이다. 사고뭉치 준규와 일당들의 서울 버전이다. 준규의 일생은 그렇게 건달의 세계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준규의 여동생은 오빠의 탈선을 눈치채고 말았다. 당연히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그 사실이 전해졌다. 그 해 겨울, 준규네 식구들은 모두 서울로 이사했다. 달동네에서 시작했던 준규의 인생은 잠시 궤도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원래 궤도를 찾아왔다. 준규는 본성이 선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준규는 자신을 무한정 믿어주시던 부모님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가 약속을 지키는 사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준규는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25년이 지난 어제가 되어서야 그 약속을 기억해 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준규는 그럭저럭 아주 평범한 고교시절을 보냈다. 남들 다 다니는 대학에 입학했고, 군대를 다녀왔다. 준규는 그땐 철이 들었을까? 어머니나 여자들 눈에는 남자들이 군대 다녀온다고 해서 남자가 되거나 철이 들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물론, 본인 스스로는 철이 들었다고 착각하며 살긴 하지만 말이다. 준규는 군대 전역 후에 대학을 그만두었다. 공부보다는 역시 돈을 벌겠다는 목표에 도전해보겠다는 어릴 적 꿈을 잊지 않은 것이다. 뜻이 없는 공부는 준규에게 있어 그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준규의 부모님은 그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집안의 기둥이자 희망이었던 준규는 이제 장사를 하겠다며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준규 부모님은 패기 넘치는 준규를 끝까지 믿어주었다. 부모님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니까! 준규의 꿈은 수 년째 벽에 부딪혔다. 세상은 그저 용기와 패기만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두 번의 실패로 깨달았다.

준규는 서울역 어딘가를 배회했다. 무작정 시작했던 배회는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었다. 무언가 새로운 꿈을 꾸어야 했다. 하지만 준규의 눈에는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 그 무언가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준규는 누군가 등 뒤에서 자신의 어릴 적 별명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준규는 설마, 설마 했지만 낯선 여자가 준규의 앞을 가로막으며 <너 준규 맞지?>라고 물었다. 준규는 한참 만에 그 여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인숙! 고향의 친했던 누나, 인숙이었던 것이다. 그래 맞다! 인숙. 준규의 두 번째 여자다. 두 번째! 그래~ 그동안 준규에게 거쳐 간 여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어떤 의미로는 두 번째 여자가 맞다. 같은 고향을 둔 여자 중에 두 번째 여자 말이다. 준규는 두 번째 여자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겨우 세 살 연상의 여자였지만, 인숙은 준규에게 있어 힘든 몸뚱이를 받아주는 고향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 준규는 한동안 인숙의 자취방에 함께 살았다. 백수나 다름없던 준규는 몇 달 동안 인숙에게 신세를 졌다. 준규는 그동안 새로운 일도 시작했다. 인테리어 회사에서 기술을 배우기로 한 것이다. 준규는 자신이 그런 감각을 가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만, 인테리어 사장은 준규를, 아니 준규의 성실과 패기를 믿어주었다. 준규는 미친 듯이 일했다. 인숙과는 신혼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아니다. 인숙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당연한 듯이~ 그러다 준규는 고향에서 올라온 인숙의 막내 동생을 만났다. 인숙의 인물도 꽤 미인 축에 들었지만, 막내 동생 세연이는 이름만큼이나 예뻤다. 준규는 세연이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준규는 그 길로 고향에 갔다. 이미 10년 만에 찾은 고향은 거의 변해 버렸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동네 노인들도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노망이 들어 준규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니던 준규의 일당들 역시 군산이나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이제 고향에서 아는 사람은 세연이 뿐이었다. 준규는 세연이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물론 세연이도 준규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인숙은 그들의 관계를 용납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세연이는 이유 없이 준규와의 교제를 막아서는 큰언니 인숙에게 대들었고, 자매간에는 드디어 돌이킬 수 없는 불화가 시작됐다. 인숙은 자신과 준규와의 관계를 세연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의 불편한 관계는 꽤 오랜 기간 지속됐다. 준규는 세연이와 불 같은 사랑을 키워갔지만, 인숙의 훼방에 더 이상은 정상적인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준규는 결국 세연이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고, 끝내 다시 고향을 떠났다. 얼마 후 세연이는 집을 나가 버렸다. 세연이의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그 후 세연이는 누구와도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물론, 준규 역시 세연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 세연이는 그저 실종 상태였고, 1년 남짓 지난 후 세연이는 아이 하나를 안고 고향집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이 아빠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



그것이 준규에 대해 아는 전부다. 그런데 나는 오늘 어이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준규는 세연이 있는 곳에 가끔씩 드나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 여자는 모두 준규를 사랑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 누구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다. 준규가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내일 다시 준규를 만나기로 했다. 자세하게 물어볼 생각이다. 준규의 생각, 준규는 진정으로 세 여자들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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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이다. 횡단보도 건너에 준규가 기다리고 있다. 25년의 미스터리 중 하나를 더 풀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준규는 술을 좋아한다. 예전에 병만이네 주막에서부터 준규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오늘은 준규의 일당 중 한 명인 내가 우리들의 추억을 함께 마셔보기로 했다. 저기~ 준규가 손을 흔든다. 정말 반가워 보인다. 물론! 나도 반갑다! 이 자식아!


우리는 약속한 대로 전통주점에 들었다. 막걸리를 받아놓고 준규를 보니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솟았다. 취중진담이라지만 나는 맨 정신의 준규 생각을 듣고 싶다.


“준규야! 혹시, 세연이 있잖냐. 니가 임신시킨 거 맞냐?”


용기 내서 물어보는 거다. 준규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하다. 그것이 진실일지 거짓일지 알 수는 없지만 꼭 듣고 싶다.


“임신? 그게 무슨 소리야?”


준규는 역시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혹시, 세연이가 집에서 나갔을 때 너와 함께 있었던 것 아니었어?”


나는 다시 물었다. 준규의 표정은 진정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여태까지 세연이의 아이는 준규의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결국 세연이 아이는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거다. 대체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세연이 아이의 아빠는 누구란 말인가?


“사실~ 니가 최근에 세연이 맛난 것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난 니가 세연이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 세연이를 만나고 다니는 것인 줄 알았어. 그런데, 그건 아닌가 보구나~”


내 말에 준규의 표정은 정리될 수 없는 난감함이 가득하다.


“그럼~ 그 아이가 내 아이라는 거야? 난 내가 세연이에게서 떠난 이후로 한동안 세연이를 만난 적이 없었어.”


준규는 막걸리를 연거푸 홀짝거린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세연이의 아이는 정말 우리가 모르는 남자의 아이라는 거다. 그럼 모두가 의심하고 있었던 것처럼 세연이의 아들은 준규의 아들이 아니란 거다. 그런데! 내가 왜 가슴이 다 후련해지는 건가? 25년 만에 만난 준규에게서 20년간의 미스터리가 풀린 것이다. 내 동생 세연이는! 그럼~ 어쨌든! 준규 이 자식은 우리 세 자매와 사랑을 했던 놈이다.


<준규야 너 혹시 우리 중 누구 하나라도 사랑한 적이 있긴 했었니?> 이 한 마디 말이 입 근처에서 뱅뱅 돌기만 했다. 술의 기운을 빌어서라도 나는 끝내 준규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사고뭉치 준규와 일당 중 한 명이 오십 가까운 나이에 다시 만나 막걸리 잔을 들이붓고 있을 뿐이다. 난 그저 준규가 우리 세 자매 중에서 세연이라도 사랑했기를 바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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