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많아 아는 척하는 걸 좋아하는 걸까
내 주변에는 박사님들이 제법 많은 편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업에 뛰어들었다. 이십 년이 넘게 장사를 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건물 몇 개 밖에 없다. 나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돈만 밝히는 장사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 돈을 벌 목적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불법적인 일을 했던 적도 없는데 말이다. 물론 돈 버느라 여태 결혼을 하지 않아서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장사해서 돈을 버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는 게 별로 없다. 다행히 돈 관리는 세무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김대리가 알아서 기장을 해주니까 걱정 없다. 돈을 운용하는 건 전적으로 엄마가 알아서 한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모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른다. 엄마는 돈에 관한 한 철저하다. 우리 집이 원래 동네에서 소문났을 정도로 많이 가난했기 때문인데 지금은 못 사는 편은 아닌 것 같다. 어쨌거나 엄마와 나는 지금도 아끼고 저축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지난달부터 엄마는 부쩍 바빠졌다. 어느 날 엄마는 내가 혼기를 놓친 것이 맘에 걸린다며 내 혼사 문제를 두고 발 벗고 뛰겠다고 했다. 더 이상은 내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거다. 하지만 난 결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항상 내게 잘생긴 얼굴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내 얼굴이 어떤지 알고 있다. 모르긴 해도 천 명을 무작위로 잡아두고 잘생긴 순으로 줄을 서라면 나는 맨 뒤쪽에서 몇 번째 안에 들 것 같다. 사람은 스스로를 잘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 얼굴만 보면 장가가기 힘들다는 것을 중학교 때, 아니 아마도 그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인생을 통 털어 단 한 번도 여자 친구가 있었던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 아니 내가 다닐 때는 국민학교 때였다. 아무튼 그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공부만 잘하면 여자 친구는 줄을 설 거야.’ 나는 엄마 말을 믿고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당연히 매번 일 등이었다. 하지만 여자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어떤 여자아이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나보다 공부를 못하는 친구들은 언제나 여자 친구가 있었다. 엄마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거다. 그래도 나는 엄마를 미워한 적이 없다. 그저 엄마의 말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었던 것뿐이다.
이미 유치원 때 나는 여자아이들이 기피하는 류의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연한 거다. 이후로 나는 엄마가 내게 하는 몇 가지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허구한 날 ‘어이구~ 내 강아지. 이 예쁜 새끼~’라고 했었다. 이 말은 절대로 믿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음으로는 ‘공부만 잘하면 여자 친구는 줄을 설 거야.’라는 말이다. 하나 더 있다. 고등학생이 된 후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던 내게 엄마는 항상 같은 말을 했다. ‘대학에 가면 여자 친구도 사귈 수 있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는 걸 그때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내 팔자에는 여자와의 인연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 거짓말을 마지막으로 거의 이십 년 가까이 여자에 대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달부터 다시 거짓말이 시작됐다. “이제는 돈이 많으니까 여자 친구, 아니! 아내를 구할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나는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엄마 저는 그냥 혼자 살 거예요.” 내게는 더 이상의 희망고문이 필요치 않았다. 나 스스로가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국제결혼이라는 것도 있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하여튼 엄마는 요즘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러 다닌다. 그러더니 최근엔 꽤나 오랜 인연이 있었던 박사님들이 나를 자주 찾아온다. 나를 돕겠다고 말이다.
제일 먼저 찾아온 박사님은 알고 지낸 지 족히 십 년은 넘는 은결 씨다. 무용 전문가다. 은결 씨는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엄마가 전부 다르다. 내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능력자다. 은결 씨는 내게 여자를 만나고 결혼까지 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물론 나는 은결 씨를 믿는다.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남들은 한 번도 하기 힘든 결혼을 세 번이나 했으니 대단한 능력인 걸 인정해야 옳다. 그런 그가 내게 결혼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하니 생전 처음으로 귀가 뻥 뚫린 것 같았다.
은결 씨 다음으로 찾아온 박사님은 일 년 전쯤 우리 가게 단골손님이 된 금융 전문가 구조 씨다. 구조 씨는 엄청나게 돈이 많다. 부자다. 그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차를 타고 다닌다. 구조 씨는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세상은 모두 딱딱 들어맞게 되어 있어요.” 구조 씨는 며칠 전 내게 이상한 말을 했다. “여자도 딱 맞는 여자가 있어요!”
세 번째 찾아온 박사님은 치병 씨였다. 치병 씨는 영어 전문가인데, 말할 때마다 영어를 자주 써서 알아듣지 못할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박사님은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살아서 가까운 양화다. 양화는 그다지 가까운 친구가 아니지만, 최근 들어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은 찾아온다. 양화가 나를 친구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꼭 인류학자 같지만 사실은 건강 전문가다.
그런데 이들 네 명의 박사들은 서로를 잘 모른다. 어쩌면 구조 씨는 치병 씨와 알지도 모르겠다. 한두 번 정도는 인사를 나눴을 거다. 어쨌거나 요즘 박사님들은 내 결혼 문제를 두고 특별히 신경을 써주고 있다고 한다. 특히 구조 씨는 이삼일에 한 번씩 찾아와서 내게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냐고 물어본다. 물론 나는 딱히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한 번도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구조 씨가 나를 도와서 앞장서 주겠다고 하니 고맙긴 하지만 다들 쓸데없는 고생이다. 어차피 안 될 일인데 왜들 호들갑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주변에 사람들을 잘 둔 것 같긴 하다. 인생을 헛살지는 않은 것이다.
어제는 엄마가 좋은 처자를 물색해 두었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예쁜 얼굴이다. 나는 당연히 있는 대로 느낀 대로 말했다. “정말 예쁘네요. 이런 아가씨와 결혼하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저를 만나줄 리 있겠어요?”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진만 보고 한눈에 반했다. 심지어 벌써 내 마누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정도니까. 그러나 나의 환상은 금세 깨어지고 말았다. 어떤 여자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다시 엄마의 거짓말이 시작됐다. “돈만 많으면 여자는 줄을 서게 되어 있어!” 나는 그런 엄마의 거짓말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사진 속 아가씨는 나를 보며 활짝 웃어주고 있었다. 아가씨 이름은 ‘세나’라고 했다 얼굴만큼이나 예쁜 이름이다. 나는 이미 세나 씨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엄마보다 내가 더 적극적이 된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사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무언가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나보다 엄마가 더 적극적이긴 하다. 아직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가 벌써 결혼을 앞둔 것 마냥 호들갑이다. 그래서 나는 주변의 경험 많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해보기로 했다. 참고로 나는 상당히 준비성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장사로 돈을 많이 벌어 본 사람이다. 내 주변에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나는 엄마의 현명함 덕분에 실패 한번 없이 사업에 성공했을 거다.
나는 단점이 많다. 그중 가장 큰 단점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결정에 앞서 심사숙고한다는 것이 결국 결정장애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래전 책에서 읽은 구절 하나가 기억나고 말았다. 거기엔 분명 장사를 잘하는 사람은 연애도 잘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엄마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나는 장사를 잘하는 남자니까! “남자는 돈만 많으면 여자는 줄을 서게 되어 있어!” 나는 엄마가 했던 말을 소리가 나도록 되뇌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나는 이제 돈이 많다. 충분한 만큼 돈이 많다. 작년에는 십이 년 전에 사둔 땅이 토지 개발로 보상이 되면서 오십억 원이 가까운 현금이 통장에 들어왔다. 삼 년 후에는 나머지 삼십억 원이 더 들어온다. 게다가 서초동에 사둔 삼 층짜리 상가 건물도 있다. 보증금 같은 걸 전부 돌려준다 할지라도 최소 이십억 원 정도는 된다고 들었다. 수원 영통에 사둔 빌라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현재 약 이백억 원을 소유한 자산가다. 물론 이런 건 모두 엄마가 계산해 주어서 알게 된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십여 년간 이렇게 많은 돈을 모으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도 삼십 평이 안 되는 허름한 빌라에서 전세로 살고 있었기에 나는 그저 굶어 죽지는 않는 수준으로 사는 줄 알고 있었다. 하여튼 엄마는 내 결혼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내가 모아놓은 재산에 대해 모두 알려 주었다.
내가 무슨 장사를 하는지 누구나 궁금할 것이다. 나는 수산시장에서 갈치만 전문으로 유통하는 일을 한다. 갈치들은 언제나 일렬횡대로 줄지어 내게서 점수가 매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제는 갈치들과 대화도 가능하다. 어떤 갈치들은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아마도 좋은 점수를 내 달라는 걸 거다. 하지만 나는 그 녀석들과 타협한 적이 없다.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안 봐주는 등의 불평등은 내게 있을 수 없다. 물론 그런 녀석들이 많은 건 아니다. 대부분의 갈치들은 내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다. 그저 일렬횡대로 누워서 내가 내릴 명령만 기다리는 것이다. ‘넌 최상급, 넌 폐기, 넌 중급, 넌 선물용, 넌 떨이용!’ 나는 항상 그런 식으로 갈치를 구분한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좋은 건 팔아도, 나쁜 건 팔면 안 된다. 좋은 걸 사간 사람은 그것이 기억나서 다시 찾아오지만, 아무리 싸게 팔아도 쓸모없는 것을 팔면 그 사람들은 나쁜 기억만 남게 된다. 그 사람들은 두 번 다시 널 찾아오지 않아. 우리도 먹지 않을 것을 손님에게 파는 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일이야. 그리고 떨이용 물건은 항상 남겨두는 게 좋아. 형편이 여유롭지 않은 사람들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거든. 못 이기는 척 한 마리 더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잖아. 우리가 특별히 좋은 일을 하며 살지는 못하더라도, 형편이 우리보다 여유롭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몫을 조금 덜어서 나눠주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니까.”
그렇다. 나는 떨이용 갈치만큼은 내가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는 녀석들을 골라낸다. 그러면 갈치들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빛을 낸다. 선택받은 갈치들이 기분 좋다는 걸 표시하는 거다. 가끔 내게 말을 걸어오는 갈치들은 항상 다른 말을 한다. 덕분에 나는 하루하루가 지겹지 않다. 그런데 희한하게 갈치들이 말을 할 때면 엄마는 어딘가로 가고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됐다. 갈치들은 의외로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은결 씨가 찾아왔다. 나는 은결 씨를 한 번도 부러워한 적이 없었지만 어제부터는 부러워하게 됐다. 나는 이제야 여자를 만나서 결혼이라는 것을 하려고 하는데, 은결 씨는 벌써 세 번이나 결혼을 했으니까! 나는 은결 씨에게 결혼하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은결 씨는 어쨌든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결혼을 제일 많이 한 사람이다. “은결 씨.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좀 물어봐도 될까요?” 갈치를 고르고 있는 은결 씨는 벌써부터 친절한 표정으로 나의 질문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다. “말씀만 하세요! 제가 아는 거라면 얼마든지 알려드릴게요.” 역시 은결 씨는 친절한 사람이다. 나는 은결 씨에게 내 결혼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결혼 계획이래 봐야, 그저 나는 돈이 많은 남자가 되었고, 세나씨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지만……
은결 씨는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했다. “송진 씨! 제가 송진 씨하고 알고 지낸 지가 벌써 십 년은 넘었잖아요? 솔직하게 말하면요. 여자는 진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송진 씨가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는지는 몰랐지만, 그 정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송진 씨가 싫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요즘 여자들은 송진 씨 같은 남자를 좋아하거든요. 사랑이라는 것도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라져 버려요. 여자들은 남자가 지겨워지면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고 하면서 떠나버리죠. 자기 배가 아파서 낳은 아이조차도 버리고 달아나버려요. 차라리 송진 씨처럼 조건이 좋은 남자라면 더욱 좋겠죠. 어쩌면 사랑해서 결혼하는 여자들보다 송진 씨 조건을 보고 결혼하겠다고 하는 여자가 더 좋을 것 같아요. 송진 씨 결혼 축하해요.” 나는 은결 씨의 조언이 너무 고마웠다. 나 같은 남자와는 다르게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은결 씨가 하는 제안은 역시 박사님 다운 제안이었다. 나는 은결 씨 비닐봉지에 제일 잘 생긴 갈치 한 마리를 더 손질해서 담아 주었다. 은결 씨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밝아졌다. 역시 엄마 말처럼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이제 내일이면 세나씨를 만나게 된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인데 치병 씨가 찾아왔다. 치병 씨는 멀리서부터 나와 얼굴을 마주치고는 눈인사를 했다. 치병 씨는 오는 길에 주변의 다른 상인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치병 씨는 가까운 곳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가끔씩 외국인들이 찾아와서 상인들이 곤란할 때 도와주기도 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다. 치병 씨는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정말 잘한다. “요즘 낚시로 잡은 은갈치 어때요?” 치병 씨는 기분이 꽤 좋아 보인다. “드릴까요?” 나는 벌써 은갈치 두 마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송진 씨. 장가간다면서요? 축하해요!” “어떻게 아셨어요?” 치병 씨는 벌써 누군가에게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어제 어머니께서 송진 씨 좀 도와달라고 전화 주셨어요. 오늘도 그래서 온 거구요.” 치병 씨는 은갈치를 다듬는 내 손을 주시하고 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송진 씨! 여자는 말이죠. 강한 남자를 좋아해요. 제가 한 번은 말이죠. 일 년 넘게 따라다니던 여자에게 한마디 했어요. ‘나는 너 같은 여자가 많아. 괜히 힘 빼지 말고, 다른 남자를 찾는 게 좋을 거야!’라고 말이에요. 그래도 그 여자는 죽기 살기로 따라다녔지요. 물론, 제가 사귀던 더 예쁜 여자를 보고서야 포기했지만 말이에요. 사실, 그건 두 여자를 두고 서로 긴장하게 만들어서 더 예쁜 여자를 제 여자로 만든 거예요. 순전히 제 계획에 의한 것이었죠. 남자는 센 척을 할 줄 알아야 돼요. 그리고 송진 씨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치장도 좀 해야 해요. 송진 씨! 혹시 차가 뭐죠?” “차요? 무슨 차요?” “승용차 말이에요!” “저는 차가 없는데요……” 치병 씨는 내가 차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게 이상한가 보다. “면허는 있어요?” “네! 면허는 있지만, 운전을 거의 안 해봤어요.” “요즘은 차 없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데~” 치병 씨는 내게 차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 같다. “요즘 여자들은 남자를 판단할 때,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해요. 혹시 명품 지갑이나 괜찮은 옷 같은 건 있긴 해요? 내일 맞선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나는 좋은 옷 같은 게 없다. 그냥 일할 때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 외에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송진 씨. 몇 시에 끝나요? 어머니께서 제게 부탁한 게 이거 때문이었나 보네요.” 나는 치병 씨와 밤늦게 만나기로 했다. 둘 다 늦은 시간에 끝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치병 씨가 떠나고 난 뒤, 은갈치 중 살이 마른 녀석이 눈알을 굴렸다. “송진 씨!” 또 말을 거는 녀석이 있다. “내가 너한테 이 말을 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 방금 치병 씨에게 싸 준 은갈치는 지금 말을 건넨 녀석 옆에 있던 갈치였다. “뭐야? 너 장가간다면서?” “그래! 나도 이제 결혼할 거야.” “그런데, 방금 다녀간 두 녀석 다 이상한 사람 같지 않아?” “뭐가?” “글쎄~ 내가 보기에는 정상적인 사람들 같지 않아.” 나는 갈치와 이야기를 하던 중 손님이 오는 바람에 내게 말을 걸던 갈치까지 손님 손에 쥐어주고 말았다. 녀석과 나머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마디 남겨두려 했지만 손님이 서비스로 달라며 생떼를 부리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갈치가 팔려나간 후 오랜만에 일찍 영업을 끝낼 수 있게 된 나는 치병 씨를 만나기 위해 준비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만난 치병 씨는 내 손을 잡아끌고 동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치병 씨는 내게서 생선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면서 투덜댔다. 차에 생선 냄새가 밸 것 같다면서 말이다. 나는 치병 씨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했지만, 치병 씨는 괜한 친절을 베풀려고 한 것 같다고 했다. 그의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우리는 동대문 의류 시장을 돌아다니며 내 옷을 세 벌 샀다. 나는 치병 씨가 하라는 대로 했다. 예전에 엄마를 따라와 본 적이 있는 곳이었지만, 엄마 말고 다른 사람과 온 것은 처음이다. 동대문은 옷을 판다는 것만 다르지, 우리 수산시장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생선 냄새가 나고 동대문에는 옷 냄새가 진동했다.
드디어 세나 씨를 만나는 날이다. 하지만 엄마는 세나 씨를 만나는 날을 일주일 연기했다. 이유는 치병 씨 때문이었다. 치병 씨는 엄마에게 나를 철저하게 준비시키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나 같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어제 치병 씨가 혼잣말하는 걸 들어서 알고 있다. ‘저런 바보에게 어떤 여자가 시집오겠어?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정신 나간 여자 아니고서야~’ 물론, 치병 씨는 나를 두고 말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치병 씨가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귀한 시간을 내어 옷도 사주고 한 걸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엄마는 오늘 밤 내가 아는 박사님 네 명을 모두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들 모두 나를 돕기 위해서 모였다고 했다. 내가 세나 씨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엄마와 멋쟁이 치병 씨, 결혼을 세 번이나 했고 돈에 관한 셈이 빠른 구조 씨, 언제나 목소리가 큰 양화가 내 앞에 모여 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우리 가게 단골손님들이다. 서로는 잘 모르는 사이지만 말이다. 엄마는 서로에게 인사를 시켰다. 구조 씨는 치병 씨와 이미 아는 것 같았지만, 양화는 나머지 누구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양화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사장님들께 어려운 시간 부탁드린 이유는 이미 말씀드려서 알고 계실 거예요. 제가 하나 있는 아들내미를 이번에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다들 잘 알다시피, 우리는 평생 시장에서 장사만 해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데다 사장님들은 우리 시장에서도 유명한 박사님들이시니까, 부탁 좀 드릴게요. 이 녀석은 생선 장사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사십이 넘도록 여자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놈이라…… 그리고 아빠 없이 크는 통에 생긴 것만 남자지 완전히 숙맥이에요. 부탁 좀 드릴게요.” 엄마는 박사님들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자는 제가 박사지요. “ 양화다. 여자에 관해서는 은결 씨가 박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영화는 결혼도 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어떻게 은결 씨보다 박사라는 걸까? 하지만 엄마의 눈빛은 양화를 믿는다는 느낌이다. 엄마가 박사님들을 모아놓은 건 이유가 있을 거다.
“남자는 돈이 우선이에요! 일단, 송진 씨는 이미 돈을 많이 모아 놨으니까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했다고 봅니다.” 구조 씨가 말했다. “에이~ 무슨 소리! 돈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남자는 자신감이 있어야죠. 그런데 송진이는 자신감이 너무 없어요.” 양화다. 구조 씨의 말에 반발했다. 맞다! 나는 자신이 없다. 솔직히, 세나씨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여자는요! 모름지기 말발 좋은 남자를 좋아해요. 잘생긴 것도 좋지만 유머감각이 없으면 여자들이 싫어해요.” 이번에는 치병 씨다. 나는 말발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난 그저 가끔 말을 걸어오는 갈치들과는 아무 부담 없이 말을 하는 것을 제외하곤 그리 말을 많이 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갈치들은 나를 이상하게 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이상하게라기보다는 다르게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이상하게 보지는 않으니까. “여자들은 진실성이 없어요. 그거 아세요? 여자들은 그저 항상 돈만 밝히죠. 사랑?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첫 번째 사랑했던 여자는 제가 직장에서 잘리고 나니까 힘들다면서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갔고, 두 번째 사랑한 여자는 어렵게 시작한 노점상으로 벌어다 주는 돈이 너무 적다면서 싸우고는 역시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가 버렸어요.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아내 역시, 매일 돈이나 많이 벌어 오라고 구박하고 있어요. 지금은 사업을 해서 돈도 많이 벌어다 주고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여자들은 남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돈을 사랑하는 게 분명해요. 송진 씨는 이번에 세나 씨와 결혼을 하려면 돈이 많다는 걸 자꾸 보여줘야 해요. 세나 씨는 꽤 미인이라고 하던데, 그런 여자들은 특히 돈에 더 민감할 거예요.”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 집에 돈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게 얼마나 큰돈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엄마는 내가 결혼해도 될 만큼 모두 왔다고 하니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결 씨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 줄 몰랐다. 엄마도 그래서 매일 밤 장사해서 벌은 돈을 세면서 그렇게나 행복한 표정으로 웃어댔던 것 같다.
“제 생각에는 송진 씨가 직업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여자들이 어디 시장에서 장사하는 남자를 거들떠나 보겠어요? 게다가 송진 씨는 좀……” 치병 씨가 말을 하다 말고 끊었다. 엄마는 그런 치병 씨에게 괜찮다며 계속 말해보라고 했다. “네. 음~ 그리고 행색도 그래요. 어제 같이 동대문에 갔는데 여자들이 송진 씨 옆을 지날 때마다 코를 킁킁거리거나 코를 막고 지나가더군요. 요즘 여자들이 얼마나 깔끔을 떠는지 아시죠? 보나 마나 뻔합니다. 보기에도 그런 송진 씨가 여러모로 떨어진다면 어떤 여자들이 좋아하겠어요? 단지 돈만 있다고 될 일은 아니죠! 이미 기본적인 결격 사유가 있는데요.” 치병 씨의 말에 엄마 표정이 매우 어두워졌다. 나는 괜찮은데 엄마는 기분이 상했나 보다. 치병 씨는 엄마와 눈을 마주쳤고, 이내 찔끔한 듯 말을 멈추고 시선을 피해버렸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남자는 가오가 있어야 되는데, 송진 씨는 직업도 그렇지만, 뭐~ 차도 없잖아요. 요즘 젊은 여자들은 BMW, 벤츠, 아우디 같은 차를 가진 남자를 좋아해요. 저만 해도 그래요. 예전에 국산차 탈 때보다 지금 BMW 타니까 젊고 예쁜 여자들이 줄을 서네요.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가오가 서야 해요. 내일 당장이라도 새 차 한 대 사야 해요.” 양화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운전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엄마는 내일 당장 한 대 사겠다고 했다. 우리 집은 차가 필요 없는데 엄마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언제나 불필요한 물건을 사는 건 낭비라고 했기 때문이다.
“요즘 여자들은 상속에 관련된 것도 따지고 들고, 시부모와 함께 사는 것을 싫어하죠. 어떤 여자들은 그걸 처음부터 내세우기도 한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살면서도 그런 문제를 가지고 시끄러워지는 집안을 본 게 한두 번도 아닙니다. 요즘엔 남자 쪽 돈만 보고 결혼하는 여자들이 많아요. 은결 씨 말처럼 사랑보다 돈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여자들은 이혼해서 한몫 당겨 볼 작정으로 결혼하는 경우도 있어서, 미리 안전장치를 해두는 집도 있어요. 결혼 전에 재산에 대해서 계약을 하는 경우도 많아졌고요. 송진 씨도 세나 씨라는 분과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특히, 송진 씨 조건에서 세나 씨 정도 되는 여자라면 그럴 속셈이 없다고만 볼 수도 없어요.” 구조 씨는 역시 금융 전문가답다. 엄마는 아까부터 안색이 편해 보이지 않는다. 벌써 내가 장가가는 것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이렇게 똑똑한 박사님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신지 모르겠다. “여자들은 해달라는 것도 많아요. 처음엔 착한 척하다가, 조금씩 이것저것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그 정도가 심해지죠. 아마 세나 씨는 송진이에게 다이아몬드, 수입차, 강남의 큰 집, 이런 걸 해달라고 졸라 댈 것 같아요. 분명히 송진이는 결혼하려고 이것저것 다 준비하고 싶겠죠. 어머니께서 아무리 만나려고 해도 세나 씨는 송진이를 꼬드겨서 엄마와 격리시키려고 들 것이고, 착한 송진이를 좌지우지하려고 할 거예요.” 양화의 말은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엄마와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닌가? 만약 결혼이 그런 거라면 억지로 결혼하고 싶지는 않다. “아이를 낳으려 하지도 않을 걸요. 낳긴 뭘 낳아요? 항상 피임이나 할 텐데. 바람이나 피울까? 요즘, 애인 없는 유부녀 없다는데.” “맞아요! 요즘 아줌마들끼리 몰려다니던데~” “누구네 와이프도 어쩌고 그랬어요.” “수산시장 김 씨네도요.”
이제는 박사님들의 대화가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엄마는 끝내 얼굴이 빨개져서는 박사님들의 얘기를 끊고 모임을 마무리했다. 박사님들의 말에 의하면 결혼은 정말 무서운 것 같다. 특히 세나 씨 같은 예쁜 여자일수록 독이 될 위험이 크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걱정스러운 결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세나 씨가 예쁘긴 하지만, 나 같은 남자에게 시집을 올 것 같지도 않고 결혼하는 게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엄마와 떨어져 살기 싫다.
이제 세나 씨와 약속한 시간은 삼십 분 정도 남았다. 엄마는 남자가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서 기다리는 것이 예의라고 했다. 엄마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와 예의라고 했다. 나는 엄마 말씀을 잘 따르며 살고 있다. 나는 모든 사람들 잘 믿는다. 특히 박사님들이 내게 해 준 말들을 기억하고 있다.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예쁜 여자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 만약, 내가 잘못하게 되면 엄마와 나는 따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엄마는 박사님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나는 BMW도 사지 않았고, 직업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새로 산 옷을 깔끔하게 입고 나왔다. 대신 깨끗이 목욕하고 향수도 뿌려서 생선 냄새가 나지 않게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몸에 밴 냄새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식당 종업원이 내 주변에서 냄새를 맡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씻어내도 없어지지 않는 냄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어제 새로 들어온 갈치가 말을 걸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갈치는 내게 여러 가지 조언을 했다. 그중에서 한 가지만 기억하라고 했다. 녀석은 세나 씨의 눈을 보라고 했다. 특히, 마음의 눈을 보라고 했다.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라고 했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라고 했다. 머리에서 나오는 말보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세나 씨다! 정말 예쁘다!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예쁘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세나 씨가 알아보았는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웃으니까 더 예쁘다. 세나 씨 주변의 어떤 것도 세나 씨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흰색 원피스에 검은색 구두를 신은 세나 씨는 천사 같다. 시장에서 이십 년 넘게 있었지만, 세나 씨 같이 천사 같은 모습을 한 여자는 본 적이 없다. 가끔씩 예쁜 여자들이 가게를 찾기는 했지만,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여자는 처음이다. 세나 씨는 의자를 당겨 내 앞에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며칠 동안 인사하는 방법을 연습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세나 씨도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웃고만 있다. 꿈을 꾸는 것 같다. 세나 씨가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고 기분이 좋다. 세나 씨는 한참을 그렇게만 있다. “저기~ 저는! 유 송진이라고 해요! 세나 씨 사진을 봤어요. 사진보다 훨씬 예쁘세요. 그런데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세요?” 나는 조금씩 말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이럴 때 박사님들이나 엄마가 있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그런데 갑자기 갈치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가슴에서 나오는 말을 하라고, 그리고 마음의 눈을 보라고 했었다. 나는 마음을 다해서 다시 말을 걸었다. “세나 씨! 저는, 유 송진이에요. 꼭 만나고 싶었어요.”
세나 씨는 핸드백에서 뭔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플라스틱으로 된 조그만 판을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저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세나 씨의 표정이 아까보다 어두웠다. 아마도 내가 실망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절대로 실망하지 않았다. 세나 씨는 너무 예쁘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갈치가 알려준 대로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말하면 된다. 어떻게 하는지를 아직 모르겠지만, 갈치는 내게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했다. 하지만 누구도 내게 마음의 눈으로 보는 방법을 알려 줄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 갈치는 먼저 눈을 보라고 했다. 그리고 마음의 눈을 보라고 했다. 세나 씨의 눈은 정말 까맣다. 그런데 세나 씨 눈은 내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들을 수는 없다. 세나 씨는 내 눈을 쳐다보고 있다. 우린 서로 아무 말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니! 눈동자를 마주치는 중이다. 세나 씨의 눈이 내 눈 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다. 어쩌면 내 눈이 세나 씨의 눈 속으로 들어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기분이다. <제게 말을 거신 건가요?> 세나 씨 목소리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런 거다. 귀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이건,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맑고 즐거운 소리다. 목소리가 아니라 마음속 소리다. 나는 아직 마음으로 말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괜찮아요. 두려워하지 말아요. 제 마음과 대화하는 사람은 우리 엄마를 빼고는 송진 씨가 처음이에요. 저는 우리 엄마와 마음으로 대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송진 씨는 아직 그런 방법을 모르잖아요. 사실, 이 자리는 송진 씨가 보내준 갈치 덕분이에요. 엄마는 갈치와 이야기를 하는 송진 씨를 보았대요. 그리고 엄마가 사 온 갈치는 우리 집에서 송진 씨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물론 엄마는 몰라요. 저는 송진 씨를 만나보고 싶었어요. 오늘 이 자리도 우리 둘만 만나게 해 달라고 했어요. 송진 씨 어머니는 제가 말하지 못하는 걸 모르고 계세요. 어쩌면~ 송진 씨라면 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갈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갈치는 제게, 송진 씨를 만나보라고 했어요. 아직은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모를 수도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이해해요. 지금껏 엄마를 제외한 누구도 저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요. 억지로 노력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제 마음이 보이면 돼요. 이미 제 이야기가 들린다면 반은 성공한 거예요.>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세나 씨에게 말하고 싶지만, 아직 세나 씨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갈치라면 쉽게 말할 수 있었는데, 세나 씨와는 되지 않는 걸까? 나는 벙어리다! 그래도 귀머거리는 아니다! 세나 씨의 말을 들을 수는 있으니까!
오늘은 내가 먼저 갈치를 불렀다. 죽 늘어서 있던 갈치들 중 밑에 깔려 있던 녀석이 눈알을 굴리며 대답했다. <왜? 잘 자고 있는데~> 나는 녀석과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어서 다른 갈치들을 걷어내고 그 녀석을 맨 위로 올려 두었다. <미안해 일부러 깨우려던 건 아니야. 난 어제 세나 씨를 만났거든. 그런데 세나 씨에게 말하는 방법을 모르겠어. 너희들은 세나 씨와도 얘기를 했다면서? 내게도 세나 씨와 이야기할 수 있게 도와줘!> 그러자 갈치는 눈알을 사방으로 굴리고는 다시 말했다. <그럼, 약속할 게 있어!> <뭔데?>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모든 건, 너의 마음에 달린 거야. 너는 초심을 지킬 수 있겠어?> <초심이 뭔데?> <초심이 뭔지 몰라?> <응! 그래!> 갈치는 다시 눈알을 굴리고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초심이라는 건 말이지, 너의 마음을 말하는 거야. 변치 않는 마음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마음이 자꾸만 변해! 아마~ 너도 언젠가 변하게 될 거야!> <아니야!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러지 않을 자신 있어!> 갈치의 말에 나는 다짐하듯 말했다. 아니! 다짐했다. <나도 알아. 지금의 너는 충분히 착해. 하지만, 마음이 변하는 건 착한 것과는 다른 거야. 네가 변하는 것 이전에 너의 주변 상황이 변하게 될 거야. 그러면 너도 어쩔 수 없이 변하게 되어 있어.> <그럼, 내 주변이 변하지 않게 하면 되지 않겠어? 그 주변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거야?> <글쎄! 너무 복잡하긴 한데, 너를 뺀 나머지가 주변이라고 봐야겠지. 만약 네가 변하게 되면 두 번 다시 세나 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게 돼. 세나 씨는 마음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물론 너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너희들은 언젠가, 머지않은 날에 대화가 끊어지게 될 거야. 주변에 의해서 말이야. 서로의 마음을 볼 수 없게 되면서…… 물론 다시 볼 수 있게 될 수는 있어. 하지만 예전처럼 대화하기 힘들 거야. 지금의 너희들 마음이 백 퍼센트 투명하다면, 점점 더 너희들의 마음에 있던 투명도가 점점 낮아지게 될 거야. 영 퍼센트가 될 수도 있고, 오십 퍼센트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다시 백 퍼센트가 될 수는 없을 거야. 백 퍼센트 투명도가 있을 때, 그게 초심이야.> <그래! 초심이 뭔지 알겠어. 난 초심을 지킬 거야!> 나는 세나 씨를 위해서라면 초심을 지킬 자신이 있다. 그런데 내 주변에 무엇이 변한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갈치는 눈을 빙글빙글 돌리고만 있다. 나는 다시 재촉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세나 씨에게 말을 할 수 있는지 알려줘! 제발~> <그래! 알려줄게. 쉽지만 어렵고, 어렵지만 쉬울 거야. 그냥 진심을 다해 사랑하면 돼! 그뿐이야!>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르는데?> <사랑이란 건, 어려운 게 아닐 수도 있는 거야. 그래서 어려울 수도 쉬울 수도 있는 거야. 네가 너의 엄마를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해 봐. 네가 그저 ‘나는 세나 씨를 사랑할 거야’,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되는 건 아니야. 네가 진정으로 세나 씨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면 너의 마음이 열리고, 세나 씨의 마음이 너의 마음을 읽게 될 거야. 그게 마음으로 대화하는 방법이야. 마음이 다치면 영원히 이야기할 수 없게 돼.> <응! 고마워~> 잠시 후 갈치는 살이 많이 찐 아주머니에게 손질되어 팔려갔다. 녀석에게 더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 됐다. 나는, 사랑이 뭔지 알고 있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하지만 엄마에 대한 사랑과는 다른 것 같다. 엄마와는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지만, 며칠 떨어져 있다고 해서 엄마가 보고 싶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세나 씨는 그냥, 아무 때나 보고 싶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게 아닐까? 사랑이라는 건, 다 같은 것이 아닐까? 박사님들이 해준 말들에 따르면 결혼은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결혼은 하면 사랑을 하는 게 아닐까? 언젠가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했었다고 했지만 처음부터 사랑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같이 살면서 조금씩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그럼 나도 엄마처럼 결혼부터 하면 사랑하게 되는 걸까? 지금처럼 좋아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걸까?
“사랑이란 원래 없는 거야. 모두 거짓말이야.” 은결 씨다. 결혼을 세 번이나 한 은결 씨는 내게 사랑이란 없는 거라고 했다. 왠지, 은결 씨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갈치는 내가 세나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했는데 은결 씨 말대로라면 나는 영영 세나 씨와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 아닐까? 갈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다. “돈이 없으면 사랑도 존재하지 않아요.” 구조 씨의 말이다. 구조 씨는 아무리 깊은 사랑도 가난하면 떠난다고 했다. 여자는 특히, 돈 없는 남자를 싫어하고, 돈을 가지고 도망친 여자도 있다고 했다. 구조 씨 손님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여자들은 남자에게서 매력을 잃으면 다른 남자한테 가는 거야. 송진 씨는 힘들겠어. 역시 송진 씨는 돈 밖에 내밀 게 없어. 그러니까 송진 씨는 돈 많은 척을 해서라도 멋져 보여야 해!” 치병 씨는 정말 잘생겼다. 치병 씨 같은 남자도 여자가 떠나버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치병 씨는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했다. “사랑? 그런 게 뭐가 필요 있어? 그냥, 좋으면 좋은 거지~ 그딴 건 있어도 필요 없는 거야!” 양화는 사랑 같은 것에 목매는 건 미친 짓이라고 했다. 세나 씨는 사랑은 진심이라고 했다. 갈치들은 초심이 사라지면 사랑도 조금씩 사라진다고 했다. 박사님들은 사랑이 중요치 않다고 했지만 나는 세나 씨와 사랑을 하고 싶다. 진심이다!
어쨌든 나는 세나 씨와 결혼을 했다. 물론 사랑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나 씨에게 벙어리, 귀머거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랑하면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르는 것 같다. 하긴, 나도 예전 같지는 않다. 세나 씨와 가끔씩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 된 적이 있다. 세나 씨와 싸우게 될 때는 그랬다. 미워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세나 씨는 내게 며칠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박사님들의 조언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세나 씨는 내게 BMW를 원하지도 않았고, 갈치 수백 마리 이상의 가격을 하는 비싼 보석을 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세나 씨는 내게 정말 큰 선물을 주었다. 쌍둥이 딸이 곧 태어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두 명의 식구에서 시작한 우리 가족은 다섯 명으로 불어날 거다. 두 배가 넘는다. 누가 그랬던 것 같다. 가족이란 흩어지는 게 아니고 모이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