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로

돌배나무집 셋째 딸 Vol.7

by 루파고

홍명덕이 우려했던 마의 일주일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 버렸다. 서인혜는 활기찬 성격으로 아이들과 금세 친해졌다. 지유를 제외하고 모든 아이들이 서인혜와 이미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홍명덕은 지유가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에 안쓰러웠다. 모든 자식이 다 사랑스럽고 애처롭기는 마찬가지지만 그가 지유에게 쏟은 정성은 좀 달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유에게 송골매의 알을 선물할 때 다른 아이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또래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했었다. 지유에게만큼은 뜻깊은 선물이 주어진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지유가 받은 선물이 이상하다며 놀려댔지만 지유는 자기가 받은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 믿었었다.

“지유야. 선물이라는 것은 받았을 때만 기억이 난단다. 안타깝지만 잊혀 버리는 게 대부분이야. 그렇지만 네 선물은 네가 나중에 엄마가 되어서도 깊이 남을 추억을 만들어줄 거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은 마음에 가장 오래 남는 거야. 알겠지? 이 알 속에서 어떤 녀석이 태어날지 궁금하지 않아? 아빠도 네가 태어날 때 정말 궁금했었어. 어떤 녀석이 태어날까 하고. 그런데 정말 이렇게 예쁜 녀석이 태어났지 뭐야? 엄마에게는 너희들이 가장 좋은 선물이었단다.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엄마의 추억 속에 너희들이 남아있을 거야. 아빠에겐 너희들이 가장 중요한 추억이고 선물이야.”

아빠는 지유에게 송골매의 알을 선물하면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쨌든 엄마로 가득했던 지유의 기억은 아주 조금씩 새로운 추억으로 교체되고 있었다. 지유는 엄마의 추억이 사라지는 것을 꼭꼭 잡아놓으려 했지만 소망과는 달리 점차 희미해져 갔다.

멋쟁이 새엄마는 매일 다섯이나 되는 딸들의 머리를 예쁘게 묶어주고, 예쁜 옷도 사다 입혔다. 가끔은 옷감을 끊어다 직접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 꼼꼼한 딸들은 재봉질도 배우고 최신 유행의 옷을 흉내 내서 만들어 보기도 했다.

중학생이 된 지유는 학교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동급생은 물론 선후배들에게서조차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똑 부러지는 성격 때문에 만나는 친구는 한정되어 있었다. 친구들이 지유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유가 맘에 들지 않는 친구들을 멀리하는 편이었다. 지유는 험담을 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이치에 맞는 예를 들어 친구들의 잘못을 꾸짖기 일쑤였다.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된 건 두 언니들 때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언니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을 티격태격하고 싸웠고 툭하면 지유에게 잡고 잘잘못을 판단해주길 바랬다. 물론 지유가 판단하기 벅찬 문제일 경우엔 새엄마, 아빠, 영태 아저씨, 유모, 식모 아줌마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렇게 해서 화해시킨다 해도 그때뿐이었다.

그 때문에 학교 내에서도 해결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문제가 생기면 지유가 판결을 내려주길 기다렸다. 지유는 나름 이 역할이 재미있기도 했다. 아빠 서재에서 읽었던 책들 속에는 친구들의 갈등을 비유하거나 예를 들어줄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지유는 문학, 과학, 예술 쪽 과목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적을 유지했다. 체육과 수학 쪽으로는 다른 과목처럼 성과를 올리지 못했지만 그 역시도 항상 상위권이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엔 자기 집안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잣집이란 것도, 아빠가 명망 있는 유지라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그냥 살던 대로 살았을 뿐이었다. 친구들의 집을 오가던 지유는 부자와 가난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책에서만 보았던 것이 지유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무렵 지유의 시야가 터지기 시작했다. 동네에서나 놀던 지유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바닷가에도 가 보고, 걸어서 장복산의 저수지 골짜기에 가서 가재도 잡고 산딸기도 따먹었다. 아빠의 동선도 커지기 시작했다. 비누 사업을 한다던 친엄마의 외삼촌이 아빠에게 차를 한 대 선물한 것이다. 이제 지유네 집에는 차가 두 대나 되었고 드디어 아홉 식구가 한꺼번에 차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는 영태 아저씨가 아빠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는데 영태 아저씨의 표정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는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좋았던 것이다. 한동안 지유 가족은 매주 일요일마다 여행을 다녔다. 진해를 떠나 창원, 마산까지도 갔는데 한 번은 여름 피서지로 부산 해운대까지 다녀온 적도 있었다.




지유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해, 홍명덕은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하필이면 지유가 다니는 여고였다. 그것도 교감선생님으로 온 것이다. 한참 멋 부리기의 최고조에 있었던 지유는 형제들 사이에서도 가장 감이 좋았다. 다른 형제들이 위아래 코디를 잘 맞추지 못해 고민할 때 지유는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 뺨 칠 정도로 멋쟁이 코디를 했다. 지유에겐 액세서리도 필요 없었다. 그저 아무거나 걸치고 나가도 지유가 입으면 진해의 패션이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된 데는 새엄마 서인혜의 역할이 컸다. 그녀 역시 딸들을 예쁘게 치장해 주는 것이 좋았다. 그 무렵 지유는 진해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명한 모델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집 앞을 서성이는 낯선 그림자가 생겼다. 집 앞 돌배나무는 이제 낯선 그림자들의 소유가 되었다. 낯선 그림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홍명덕은 영태 아저씨에게 집 앞을 수시로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영태 아저씨에게 <불독>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쯤이다.

“불독이다!”

영태 아저씨가 대문 근처에 나타날 만하면 어디선가 외침이 들렸고 그와 동시에 푸다닥 소리와 함께 낯선 그림자들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지유는 남자 친구를 사귀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1학년 가을부터 영태 아저씨가 지유를 감시하는 전담 기사가 되어있었다. 홍명덕은 지유를 그대로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지유는 친구들처럼 미팅에 나갈 수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남자 친구를 소개받을 수 없었다. 친구들은 교감선생님에게 찍힐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딱 한번 미팅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보안과 작전을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성공한 줄 알았던 작전도 다음날 저녁 홍명덕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결국 영태 아저씨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게다가 걱정했던 대로 친구들은 체육선생님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친구들은 두 번 다시 지유를 미팅에 끼우는 일이 없었다. 지유의 고교시절은 그냥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패션 아이콘, 패셔니스타, 진해의 퀸카 홍지유는 그저 온실 속 화초로 살 수밖에 없었다. 지유는 대문 밖의 낯선 그림자들로 만족하기로 했다.



지유는 중학생 때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에 전혀 관심이 없던 첫째 언니 지숙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더니 재수를 해서 음대에 진학했다. 둘째 언니는 아빠처럼 교육자가 되고 싶다며 교대 진학을 원했지만 학업 수준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형제들은 시집을 가는 게 빠르겠다며 놀리기 일쑤였다. 인물로 치자면 둘째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다.

지유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봄, 집을 통과하는 신작로 공사가 시작됐다. 한적했던 동네가 중장비들과 수백 명의 인부로 북적였다. 친엄마가 정성을 들여 가꿔온 화원은 신작로에 편입되었다.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아끼던 행운나무와 문주란을 반대쪽으로 옮겨 심어야 했다. 가을 먹거리를 제공하던 배나무와 단감나무도 절반 이상 잘려나갔다. 새엄마와 막내를 제외한 가족 모두 친엄마의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추억 속에 남아있었던 엄마의 향기가 풍겨 나는 정원이 스러져갔다. 특히 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중장비가 화원을 밀어버리던 날 홍명덕은 얼른 자리를 피해버렸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유는 참지 못하고 설움 받힌 듯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유를 제외하곤 누구도 홍명덕이 자리를 옮긴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7월이 왔고 드디어 신작로가 개통되었다. 공사차량을 제외하면 사실상 지유네 자동차가 신작로를 처음 주행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잘 닦인 도로는 동네를 새로 조성한 것처럼 싹 바꿔놓았다. 홍명덕은 그다지 탐탁지 않았지만 영태 아저씨는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영태 아저씨는 홍명덕이 내어 준 땅 전부가 신작로 개발로 수용되어 원래 시세보다 열 배 가까운 가격으로 보상을 받았다. 이제는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다. 하지만 영태 아저씨는 지유네 가족과 함께 살기를 원했다. 그는 홍명덕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머슴으로 들어왔는데 식구들 중 누구도 그를 하인 부리듯 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나 가족처럼 대했기에 지유네 가족을 떠나기 싫었다. 그보다 그에게는 지유 가족도 자신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작로가 난 후 지유네 집 근처에는 각종 상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쯤부터 지유 외삼촌이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유네 집안이 가진 주변 땅값이 큰 폭으로 오르면서 홍명덕의 자산이 알게 모르게 불어났다. 그런 사실을 눈치채고 사업 자금을 빌릴 목적이었던 것이다. 외삼촌이 선물했다던 승용차 역시도 이른 계획 중 하나였던 것이다. 외삼촌의 회사는 이미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집집마다 외삼촌 회사에서 팔고 있는 비누를 쓰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외삼촌 회사를 광고하는 방송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홍명덕은 담보도 없이 적은 이자를 받고 사업자금을 빌려주곤 했다.

지유가 고등학교 3학년에 되던 해 외삼촌은 과로로 쓰러졌고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외삼촌의 회사는 외숙모가 사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상하게도 그 시점부터 지유의 외가와는 인연이 끊어졌다. 외삼촌의 회사는 지유네 집안과는 관련이 없는 다른 집안의 회사가 됐다. 문제는 홍명덕이 계약서나 담보 없이 빌려준 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홍명덕은 개의치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것은 미련을 버리는 것이 옳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새엄마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참다못한 새엄마는 외숙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증거를 대라는 것이었다. 외숙모는 작정을 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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