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네 하숙방

돌배나무집 셋째 딸 Vol.8

by 루파고

홍명덕은 신작로 때문에 정원을 파헤치고 남은 땅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언젠가 친척 어르신이 남는 땅 놀리지 말고 하숙방 같은 걸 해보라는 말을 듣고서였다. 딸 많은 집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요즘엔 소작농에게서 받은 것만 가지고는 대가족을 먹여살리기 어려웠다. 교감이라고는 하지만 학교에서 받는 급여는 그야말로 박봉이었고 매달 상당한 금액을 장학금으로 기부해왔기 때문에 넉넉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홍명덕은 지금껏 지급해왔던 장학금을 끊게 될 경우 누군가는 학업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걱정이 들어 거기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하숙방은 열 칸이 넘었다. 마침 해군부대에 근무하는 간부들은 영외에서 거주하려 해도 마땅한 주택이 많지 않았다. 그 덕에 하숙방을 다 짓기도 전에 열 칸 모두 계약이 완료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생각이 적중한 것이다. 외삼촌에게 받던 이자에 비하면 그래도 턱 없이 적은 돈이었지만 적어도 자산을 처분하거나 소작농에게 부담을 주면서까지 생활비를 마련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 흡족스러웠다. 아이들은 밖에서나 보던 군인 아저씨들을 한 울타리 안에서 보게 되니 신기했다. 하숙방은 본채와 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동선의 통제를 두지 않아서 군인들이 집안 곳곳을 휘젓고 다녔다. 군인들 중엔 서울 사람도 있었고 전라도, 강원도 사람도 있었다.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시시 탐탐 본채 주위를 맴돌았다.

재수까지 하고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둘째는 친구를 통해 자신들이 사는 집이 해군부대에서 유명한 하숙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군부대 안에서는 자기 집이 로망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딸만 다섯인 데다, 인물 또한 떨어지지 않았고 진해에서는 부유층에 속한 집안이었으니 피 끓는 청춘의 남자들이 지유네 하숙방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유네 식구들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하숙방 남자들 모두 부대 안에서 경쟁이 심했다. 하숙방에 들어온 군인들은 각종 경기를 통해 순위가 결정되거나 짬밥 순으로 정해진 것이다.

당시 첫째는 이미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방학 때나 돌아오는 그녀는 군인들에게는 목표 중의 목표였다. 군인들 사이에선 미모를 기준으로 막내딸, 지유, 둘째 딸, 넷째 딸, 첫째 딸 순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둘째는 이미 홍명덕이 만든 맞선 자리가 줄을 서 있었다. 매주 한 명씩 맞선 자리를 나간다고 해도 몇 달은 만나야 했다. 지유는 이미 유명한 퀸카였으며 패셔니스타였으니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막내는 물어보나 마나 최고의 미모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제 중학생이었으니, 군인들의 리스트에만 있을 뿐이었다. 그저 예쁜 여동생 정도로만 존재했다.

지유는 홍명덕의 친구들로부터 프랑스 유학을 제안받았다. 홍명덕 역시 지유의 유학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하지만 현재의 집안 사정으로는 지유의 유학을 밑받침할 상황이 아니었다. 외삼촌에게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자산을 날려버린 터라 자산 유지 자체도 위험수위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홍명덕은 가장 아끼는 지유의 장래에 대해 그 누구보다 고민했다. 그러나 지유 아래로 네 명의 자식들이 있었고 두 아들의 장래 역시 중요했다. 딸들이야 시집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집안을 키우고 이어나가려면 두 아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할 것이었다. 아무리 지유라 해도 무리할 수는 없었다.

“네 유학은 잠시 보류해야겠다. 그냥 네가 가고 싶은 미대를 지원해야겠구나. 아빠의 재정이 예전 같지는 않다. 알다시피 외삼촌 돌아가시기 전에 빌려준 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해서 네 형제들 건사하는 것만 해도 위태위태해. 넌 영리하니까 아빠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빠가 좀 나아지는 대로 네 유학을 준비해볼 테니 몇 년만 참고 있으면 좋겠다. 아빠 믿지?”

지유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아빠의 말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미 친구들은 지유가 곧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지유는 자신을 부러워하던 친구들의 눈빛이 생각났다. <패셔니스타 홍지유, 패션의 고향 프랑스로!> <패션 디자이너 홍지유, 프랑스에서 디자이너로 성공!> <한국의 모든 여성! 홍지유의 패션을 입다!> 지유의 머릿속엔 언제나 이런 슬로건들로 가득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프랑스 유학 길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패셔니스타 홍지유는 앞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모든 꿈이 송두리째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 주체할 수 없어 심하게 울고 말았다.

홍명덕 또한 지유의 눈물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지유가 다섯 살 되던 해부터 홍명덕은 직접 글을 가르쳤다. 다른 형제들이 밖에서 뛰어놀 때, 지유는 자신과 함께 서재에서 공부하며 놀았다. 지유는 서예 공부를 하고, 역사 공부를 하고, 피아노에도 열심이었다. 다른 자식들보다 편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편애할 수 없음에 그 역시도 괴로웠다. 지유는 아빠의 괴로움을 이해했다. 지유 역시 아빠가 자신에게 많은 것을 투자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형제들 모두 지유가 아빠의 총애를 받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지유는 큰 언니가 다니는 대학에 합격했다. 이왕이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이 낫겠다는 아빠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유는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결국 지유는 달랑 한 학기를 마치고 휴학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에게는 근황을 알리지 않았지만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친구들 사이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동네가 들썩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지유의 빈자리는 이미 다른 여학생이 차지한 지 오래였다.

늦은 장마의 영향인지, 태풍의 영향인지 삼 일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유는 서재에서 아빠의 서예를 도왔다. 국민학교 4학년인 막내 지명이는 누나가 돌아온 것이 마냥 좋았던지 지유 앞에 앉아 생글거리며 먹을 갈았다. 홍명덕은 지유를 따라 행동하는 지명이 기특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먹을 갈아본 적 없었는데 계속되는 비 때문에 다른 놀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가 오는 삼일 내내 지유의 집에서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비를 뚫고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하숙방 총각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누굴까?”

처마 끝에 데굴데굴 구르는 빗방울은 바닥을 두드리고, 쪼르륵거리며 떨어졌다. 바닥까지 이어진 긴 물줄기들은 피아노 선율에 박자를 맞춘 타악기 같았다. 하숙방 총각 중 누군가는 휘파람을 따라 불렀다. 어떤 이는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을 두드렸다.

사 일째 되던 날 아침, 비가 그치자 하늘은 전에 없이 청명했다. 칠 월의 따가운 햇살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동생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없고 집에는 새엄마와 지유만 남아 있었다.

“지유!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그러니? 영태 아저씨가 요즘 따분해하시더라.”

“아니에요. 저는 그냥 집에 있을게요. 그게 더 편해요.”

지유는 그냥 집이 편했다. 왕년에 잘 나가던 퀸카가 고향으로 낙향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게 싫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아빠가 유학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빠는 지유의 휴학 사실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큰언니는 팔 월쯤이나 되어야 내려온다고 했다. 서울에서 사귄 남자 친구와 실컷 연애를 하고 싶었던 언니와는 서로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

오후가 되자 마당의 모든 것들이 바짝 말라버렸다. 언제 비가 왔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지유는 느티나무에 걸린 그네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아빠에게 휴학한 사실을 알려야 할 지도 고민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저기 말입니다.”

지유는 등 뒤에서 들리는 생소한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군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아마도 하숙방에 사는 군인들 중 한 명일 것이었다. 지유는 평소 입던 대로 대충 걸쳐 입고 나와 있었는데, 모르는 남자가 그런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아빠는 왜 하필 하숙방을 해가지고선~’ 지유는 집안에 외간 남자들이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더해졌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죠?”

“아~ 누구신가 해서 그냥 뵙고 싶어서 불러봤습니다.”

그는 지유의 불쾌한 표정을 읽고 뒤늦게 후회했다.

“죄송하지만요, 여기는 저희 가족이 쓰는 마당이거든요. 여기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좀 부담스럽네요.”

지유는 남자에게 짜증을 증폭시켜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하숙방 사내들이 기웃거리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그 사내는 놀랐는지 말을 더듬으며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쳇! 그럼, 그렇지. 싱겁긴~ 그래도 귀엽긴 하네.”

남자는 해군 치고는 얼굴이 흰 편이었다. 그것이 지유가 기억하는 그 남자에 대한 전부였다.

그 날부터 해군의 공습은 시작되었다. 지유는 매일 다른 청년들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아야만 했다. 삼 일째 되던 날부터 지유는 그것을 즐겨 보기로 작정했다. 왠지 고교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구 일째 되던 날, 홍명덕은 하숙방과 본체 사이에 담장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담장을 넘어와 지유가 자는 방 창가에 편지를 몰래 놓고 가기도 했다. 지유는 고교시절 학교 담장을 넘어와 몰래 연애편지를 놓고 갔던 명수라는 남학생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명수가 하숙방에 사는 군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그가 바로 지유의 창가에 편지를 놓고 간 명수라는 것도.




8월 중순이 넘어서도 연애편지는 이어졌다. 홍명덕은 영태 아저씨에게 지유를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부탁했고, 영태 아저씨는 지유의 경호원 역할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청년들은 영태 아저씨를 통해 지유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경쟁하듯 영태 아저씨에게 달라붙었다. 영태 아저씨는 그런 그들이 재미있는지 지유에게 일일이 보고하다시피 했다. 그때마다 영태 아저씨와 지유는 깔깔거리며 연애편지를 읽었다. 무더위가 쓰러져 가던 구 월의 어느 날, 끊임없이 들어오던 연애편지와 데이트 신청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뚝 끊어졌다. 영태 아저씨에게 전해오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청년들 덕에 공짜 담배 얻어 피우던 재미가 사라진 영태 아저씨는 왠지 모를 섭섭함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일 동안 비가 내린 마당의 그네에서 보았던 군인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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