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배나무집 셋째 딸 Vol.8
지유는 큰 언니가 다니는 대학에 합격했다. 이왕이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이 낫겠다는 아빠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유는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결국 지유는 달랑 한 학기를 마치고 휴학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에게는 근황을 알리지 않았지만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친구들 사이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동네가 들썩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지유의 빈자리는 이미 다른 여학생이 차지한 지 오래였다.
늦은 장마의 영향인지, 태풍의 영향인지 삼 일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유는 서재에서 아빠의 서예를 도왔다. 국민학교 4학년인 막내 지명이는 누나가 돌아온 것이 마냥 좋았던지 지유 앞에 앉아 생글거리며 먹을 갈았다. 홍명덕은 지유를 따라 행동하는 지명이 기특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먹을 갈아본 적 없었는데 계속되는 비 때문에 다른 놀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가 오는 삼일 내내 지유의 집에서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비를 뚫고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하숙방 총각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누굴까?”
처마 끝에 데굴데굴 구르는 빗방울은 바닥을 두드리고, 쪼르륵거리며 떨어졌다. 바닥까지 이어진 긴 물줄기들은 피아노 선율에 박자를 맞춘 타악기 같았다. 하숙방 총각 중 누군가는 휘파람을 따라 불렀다. 어떤 이는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을 두드렸다.
사 일째 되던 날 아침, 비가 그치자 하늘은 전에 없이 청명했다. 칠 월의 따가운 햇살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동생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없고 집에는 새엄마와 지유만 남아 있었다.
“지유!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그러니? 영태 아저씨가 요즘 따분해하시더라.”
“아니에요. 저는 그냥 집에 있을게요. 그게 더 편해요.”
지유는 그냥 집이 편했다. 왕년에 잘 나가던 퀸카가 고향으로 낙향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게 싫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아빠가 유학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빠는 지유의 휴학 사실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큰언니는 팔 월쯤이나 되어야 내려온다고 했다. 서울에서 사귄 남자 친구와 실컷 연애를 하고 싶었던 언니와는 서로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
오후가 되자 마당의 모든 것들이 바짝 말라버렸다. 언제 비가 왔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지유는 느티나무에 걸린 그네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아빠에게 휴학한 사실을 알려야 할 지도 고민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저기 말입니다.”
지유는 등 뒤에서 들리는 생소한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군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아마도 하숙방에 사는 군인들 중 한 명일 것이었다. 지유는 평소 입던 대로 대충 걸쳐 입고 나와 있었는데, 모르는 남자가 그런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아빠는 왜 하필 하숙방을 해가지고선~’ 지유는 집안에 외간 남자들이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더해졌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죠?”
“아~ 누구신가 해서 그냥 뵙고 싶어서 불러봤습니다.”
그는 지유의 불쾌한 표정을 읽고 뒤늦게 후회했다.
“죄송하지만요, 여기는 저희 가족이 쓰는 마당이거든요. 여기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좀 부담스럽네요.”
지유는 남자에게 짜증을 증폭시켜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하숙방 사내들이 기웃거리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그 사내는 놀랐는지 말을 더듬으며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쳇! 그럼, 그렇지. 싱겁긴~ 그래도 귀엽긴 하네.”
남자는 해군 치고는 얼굴이 흰 편이었다. 그것이 지유가 기억하는 그 남자에 대한 전부였다.
그 날부터 해군의 공습은 시작되었다. 지유는 매일 다른 청년들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아야만 했다. 삼 일째 되던 날부터 지유는 그것을 즐겨 보기로 작정했다. 왠지 고교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구 일째 되던 날, 홍명덕은 하숙방과 본체 사이에 담장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담장을 넘어와 지유가 자는 방 창가에 편지를 몰래 놓고 가기도 했다. 지유는 고교시절 학교 담장을 넘어와 몰래 연애편지를 놓고 갔던 명수라는 남학생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명수가 하숙방에 사는 군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그가 바로 지유의 창가에 편지를 놓고 간 명수라는 것도.
8월 중순이 넘어서도 연애편지는 이어졌다. 홍명덕은 영태 아저씨에게 지유를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부탁했고, 영태 아저씨는 지유의 경호원 역할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청년들은 영태 아저씨를 통해 지유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경쟁하듯 영태 아저씨에게 달라붙었다. 영태 아저씨는 그런 그들이 재미있는지 지유에게 일일이 보고하다시피 했다. 그때마다 영태 아저씨와 지유는 깔깔거리며 연애편지를 읽었다. 무더위가 쓰러져 가던 구 월의 어느 날, 끊임없이 들어오던 연애편지와 데이트 신청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뚝 끊어졌다. 영태 아저씨에게 전해오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청년들 덕에 공짜 담배 얻어 피우던 재미가 사라진 영태 아저씨는 왠지 모를 섭섭함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일 동안 비가 내린 마당의 그네에서 보았던 군인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