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명

돌배나무집 셋째 딸 Vol.9

by 루파고

“오래 기다렸습니다. 저는 김선명 중위입니다. 오늘은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합니다. 지난번 뵈었던……”

그는 군인다운 목소리로 짧고 굵게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끝 부분을 흐리고 있는 것만 빼고. 지유는 그가 준비는 많이 했지만 상당히 떨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호기심이 일어났다. 살짝 귀엽다는 생각도 했지만 바로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아~ 그러시군요! 저는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많이 바빠요.”

지유는 신경 써서 톡톡 튀기듯이 거절했다. 김선명에게 단호하다는 느낌을 받게 하겠다는 심산이었는데 결과는 알 수 없었다.

“만나는 분이 안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번 주 일요일 아침 열 시에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선명의 표정엔 의지를 담은 묘한 느낌이 담겨있었다. 마치 군인 정신이 바짝 들어간 듯 명령에 가까운 투로 말을 던지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지유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얼굴이 벌게진 상태였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연습한 대로 할 말은 다 한 것 같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지유는 피식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웃음소리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김선명은 자기 하숙방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더니 전봇대 근처에서 가서야 티가 날 정도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 뭐야~ 일요일에 다른 사람이 나와도 모르고 따라가겠네. 뭐가 저런대?”

지유는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저녁에도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지유는 바로 아래 동생인 지호와 마당을 거닐고 있었는데 한 남자가 하숙방과 본채를 구분지은 담을 넘더니 거침없이 다가왔다. 지유와 지호는 괴한인 줄 알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지유는 어제와 비슷한 경우라고 예상했다.

“언니 보러 온 것 같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지호는 귓속말을 했다. 지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호는 아빠에게서 언니를 보호하라는 엄명을 받은 상태였다.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지유와 지호를 훑었다. 훤칠한 키에 시원한 이목구비였다. 누가 봐도 미남이라고 할 수 있었고 다부진 근육질의 몸매에 팔뚝의 구릿빛 피부 위에 파란 힘줄이 강인해 보였다. 지금은 군복이지만 사복을 입었어도 해군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모든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정미소라고 합니다. 이름이 웃기지만 웃기는 뜻은 아닙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지만 다음 주 일요일 7시에 대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어른 키를 넘는 담장을 순식간에 뛰어넘어 돌아갔다.

“우와~ 언니 저 군인 아저씨 저 담벼락을 한 번에 넘었어. 도둑 아닐까?”

동생 지호는 그의 신출귀몰한 담 넘기에 감탄한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 지유는 아빠의 호출을 받았다. 임무를 받았던 지호가 아빠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아빠는 지유가 꿈을 이루길 바란단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아빠 역시 너무 괴롭고 참 답답하지만, 가능만 하다면 뭐든지 해주고 싶구나! 아빠가 무슨 말하는지 알겠지? 겨울 되기 전에 다시 서울로 가라. 아빠는 꼭 그랬으면 좋겠다.”

지유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굳이 설명이 없어도 아빠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휴학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이 오기 전엔 서울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있었기에 아빠의 부탁을 거스를 일은 없었다. 게다가 소원이었던 유학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결심한 지 오래였다.

일요일 오전이 가까워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아빠도 이번 주 일요일 약속에 대해서는 모르실 거야.’ 호기심은 이미 지유를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열한 시가 다 되어 지유는 대문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시간은 한참 지났지만 두 주먹을 불끈 쥔 김선명이 묵묵히 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검은색 구두 뒤꿈치로 바닥을 툭툭 차고 있었다. 지유는 조금 미안한 생각은 들긴 했지만 십 분 정도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김선명은 간헐적으로 손목시계를 쳐다보았고 가끔씩 두리번거리다 한숨을 쉬기도 했다. 지유는 그가 더 이상 기다리게 하는 건 무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나갔다. 인기척을 느낀 그는 지유가 나오자 뒤돌아서며 활짝 웃어 보였다. 지유는 이제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쌍꺼풀이 없고 단호해 보이는 까만 눈동자는 강직한 성격을 드러내는 듯했다. 백팔십 센티는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약간 마른 듯한 몸매는 각이 잡힌 군복을 어울리게 했다.

“혹시~ 옷이 그것밖에 없나요?”

지유의 농담 섞인 진담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농담이에요~ 너무 놀라시니까 더 이상은 농담을 할 수가 없겠네요. 저는 데이트이거든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 사실을 우리 아빠가 알면 둘 다 죽을지도 몰라요.”

걱정이 된 지유는 얼굴을 가릴 수 정도로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좀 더 가릴 생각으로 양산까지 준비해 왔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최대한 튀지 않는 옷을 골라 입었다. 김선명은 재빨리 지유의 위아래를 살폈지만 지유는 이미 시선의 이동을 읽고 있었다.

“오늘~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그렇게 과찬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람들 보기 전에 빨리 동네에서 벗어나야만 해요.”

지유가 재촉에 김선명은 지유를 앞서 걸었다. 큰길로 나서자 군용 지프 한 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시죠! 제가 오늘 금녀의 지역으로 모시겠습니다.”

김선명은 전과 달리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뭐지? 이 갑작스러운 자신감은?”






지유는 김선명이 준비했다던 데이트 코스를 기대해보기로 했다. 지유 역시 태어나서 처음 하는 데이트였기 때문에 기대하는 마음은 그와 다르지 않았다. 김선명이야 지유의 그런 마음을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김선명은 이 날을 위해서 부대장에게 간곡히 부탁을 해 둔 터였다. 진해 최고의 퀸카와 교제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작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금녀의 지역이라고 한 곳은 다름 아닌 진해 해군 기지였다. 그 때문에 김선명의 부대는 주말도 반납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차렷! 경례! 필승! 부대 입구로 지프가 지나가자 훤칠하게 키가 큰 병사 두 명이 총을 들며 목청 터지게 경례를 했고 부대 안으로 진입하자 간부, 병사 할 것 없이 경례했다.

“김선명 씨, 계급이 꽤 높은가 봐요?”

호기심이 생긴 지유의 질문에 김선명의 얼굴은 다시 발그레해졌다. 사실 그들이 타고 있던 지프는 부대장의 것이기 때문에 군인들이 경계를 했던 것인데 그것을 지유가 알 리 없었던 것이다. 지유는 지프 창 밖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군기지는 지유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군항제 때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구역에 가본 적은 있었지만 부대 내부 깊숙이 들어온 적은 처음이었다. 지프는 군함이 정박되어 있는 부두 끝 등대까지 가서야 멈추어 섰다.

“진해에서 가장 멋진 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선명의 말대로였다. 그곳은 이미 지유의 감성을 충분히 간지럼 태우고 있었다. 해운대나 태종대의 바닷가도 멋진 곳이었지만 이런 풍경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엄청난 규모로 위용을 느끼게 하는 군함은 부두 끝의 등대와 묘하게 어울리며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유는 진해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해군기지가 자리 잡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게다가 선착장 끝에 위태롭게 우뚝 선 등대는 ‘이곳의 가장 비밀스러운 곳은 내가 지키고 있소’라고 말하는 듯했다. 선선한 바닷바람은 지유의 치마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챙이 넓은 모자가 날아갈 세라 챙 끝을 부여잡은 지유의 모습은 김선명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등대가 군함을 찾아들게 하는 존재라면, 그곳에 선 지유의 모습은 남심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수병들 역시 넋을 놓고 지유에게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앉으시죠.”

지유의 모습에 정신을 놓았던 그는 한참만에 제정신을 찾고서야 테이블로 안내했다. 먼바다에다 시선을 놓아버렸던 지유는 이제야 말끔한 흰 제복의 수병들이 테이블에 먹거리를 세팅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 지유와 눈을 마주친 수병은 놀란 빨개진 얼굴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수병답지 않은 수줍은 듯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김중위 님의 보석을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준비된 각본대로 읊는 수병의 표현이 우습긴 했지만 지유는 이런 대접이 별나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겼다.

테이블 위에 걸린 두 가지 색상의 천은 멋진 바다와 잘 어울렸다. 세심하게 신경을 쓴 티가 났다. 흠집 하나 없는 꽃무늬 패턴의 접시는 일부러 준비한 것 같았다. 커피잔 역시 군인들이 쓸 것 같지는 않은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홍차 드시겠습니까?”

부자연스럽게 각본을 읊었던 젊은 수병은 지유보다 세 살은 많아 보였지만 목소리에서부터 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수병의 심경은 주전자에서 떨어지는 홍차 줄기만 보고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안심 스테이크를 준비했는데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군인 아저씨들도 그런 걸 드시나 보네요.”

“지유씨가 이 자리에 계셔서 그런지, 한 번도 아름다웠던 적이 없는 이곳이 처음으로 아름다워 보입니다.”

김선명은 환심을 사려는지 간지러운 대사를 읊기 시작했지만 지유에게는 그다지 감동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렇게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흘렀다. 누구에겐 길었고 누구에겐 짧았을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김선명은 지유에게 해군기지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도착한 잔디밭에는 삼십 명은 되어 보이는 수병들이 이 열로 사열해 있었는데 김선명은 허락도 없이 지유의 손은 잡고 사병들 사이로 걸어갔다. 수병들은 제식에 맞춰서 일제히 사열했고, 그 사이를 통과해 나오자 김선명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지유씨! 저랑 사귀어 주십시오!”

지유는 당황했다. 그저 호기심 때문에 나온 것이었는데 일방적으로 교제하자는 제안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난감했다. 그에게 호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빠의 부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미안해요.”

이전 08화지유네 하숙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