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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티서 Sep 28. 2021

Ms. 에이브릴 세자비

6P. 14살의 태티서

2004년 9월 28일

바람이 거세 호그호그행 열차가 연착하는 날


  중학교에 올라와서 깨달은 중요한 사실 중 하나. 자기 캐릭터를 잘 설정해야 한다. 그 임보라인가 걔만 봐도 그렇다. 원래는 소심하고, 목소리도 작고, 그냥 마른 애였는데, 음악에 심취한 우울한 컨셉 잡더니 이제는 노는 애들이랑도 잘 지낸다. 막 시크하다면서 고백도 좀 받는다.


  내 캐릭터는 좀 복잡하다. (뭐, 다른 애들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일단 끼는 그룹마다 내 캐릭터도 조금씩 변한다. 그게 좀 가식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때그때 캐릭터가 안 변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암튼. 우선 나는 학원에서 형이랑 항상 세트로 묶인다. 둘만 서울에서 등원했고, 또 심지어 쌍둥이니까 어쩔 수 없다. 또 우리 둘 다 무원중 애들이랑 완전 친해졌다. 무원중도 학원 내에서는 소수파고, 또 모두 여자애들이다. 여고도 아닌데, 왜 그렇게 된 걸까 신기하다. 아무튼 우리가 막 지도중 이런 애들이랑 놀 수는 없지 않은가. 거기는 남자애들이 주축인데, 쉬는 시간마다 우당탕거리며 말뚝 박기를 한다. 그러면서 꼭 “아으, 불알 뽀개져.” 막 이런다. 듣기만 해도 너무 민망하다. 지도중 애들이 참 잘생기긴 했지만, 걔들이랑 그러고 놀 수는 없다.


  나랑 형이랑 무원중 애들은 밥 먹고 쪽팔려 게임하고, 옆에 공원에 나가서 지압 산책로 맨발로 달리기할 때도 있다. 근데 사실 대부분 시간엔 수다 떤다. 나도 형도 말이 많은데, 형이 좀 더 기가 세고 목소리도 크다. 그래서 애들이 형은 아줌마라고 부르고 나는 아가씨라고 부른다. 그러면 형이 “태티서 너 밖에서 착한 척 좀 하지 말라.”고 타박한다.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나 정도 가식 안 떠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근데 솔직히 아줌마보다 아가씨라서 좋다. 뭔가 선해 보이고, 예뻐 보이고. 히히, 이왕이면 계속 이렇게 처신해야지.


  학교에선 나는 강경 에이브릴 라빈 파다. 사실 나 말고 우리 반에 딱 봐도 게이가 한 명 있는데, 걔는 강경 브리트니 스피어스 파다. 물론 나도 브리트니 스피어스 좋기는 한데, 좀 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섹시 섹시 이러니까. 이게 중요한 게, 약간 나랑 게이 친구 둘 다 좋아하는 가수에 빙의하고 있어서다. 나는 내가 좀 더 펑키하고, 약간 반항적이고 독특해 보였으면 좋겠다. 근데 또 에이브릴은 핑크나 이런 사람들처럼 무섭지는 않고 귀여움도 있으니까.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 내가 에이브릴 쪽이라고 엄청 강조하고 다닌다.


  하루는 이 게이 친구가 나한테 UCC를 찍자고 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me against the music이라는 곡을 커버하는데, 자기가 브리트니고 내가 마돈나란다. 나는 사실 마돈나가 누군지도 몰랐는데, 걔가 자꾸 넘버 원 팝 아티스트라고 나를 꼬셨다. 영악한 것. 자기가 브리트니 포기 못 하는 걸 내가 모를까 봐? 근데 어쩔 수가 없다. 얘가 통통한 체군데 춤을 미친 듯이 잘 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댄스가 적은 마돈나 당첨이다. 그래도 마돈나가 흰 양복을 위아래로 입고 있어서 좀 멋있긴 하다. 아니, 그래도, 절대로, 무조건 나는 에이브릴 라빈이 더 좋지만. 마돈나는 잠시뿐이다. 딱히 내 캐릭터도 아니다. 


  아 그리고 이 게이 친구 포함해서 반은 다르지만 같은 초등학교 출신 친구들이 있다. 쉬는 시간엔 맨날 그 중 소담이네 반에 모여서 논다. 우리가 좀 특이한 게 남자, 여자 섞여서 노는 집단은 우리뿐이다. 그래서 시비 거는 남자애들도 물론 있다. ‘배신자’라거나 ‘따까리’라거나. 근데 얘네도 우릴 무시 못 하게 우리는 그림도 잘 그리고, 공부도 잘 하고, 게이 친구는 영어 영재고 첼로도 치고 그런다. 우리가 좀 예인 집단이다. 우리끼리 돌려 쓰는 해리포터 패러디 소설인 ‘호그호그 이야기’가 있었는데, 거기서 싫어하는 남자애들 다 찐따로 등장시켰다. 킬킬.


  최근에 우리 집단 애들이 만화책 궁을 엄청 재밌게 봤다. 그래서 그거 패러디 만화도 같이 그려보기로 했다. 캐릭터를 짜는데, 애들이 나를 당연하게도 세자비에 캐스팅해줬다. 그 게이 친구는 중국에서 와서 뿔피리를 잘 불고(얘가 또 첼로치니까), 애교 만땅인 링링이라는 캐릭터다. 약간 남편인 세자(정연이 역할)가 링링의 매력에 자꾸 빠져서 내가 슬퍼하는 스토리였다. 그야말로 비련의 여주인공. 옷이나 이런 거도 다 너무 청순하게 디자인해줘서 좋았다. 


  근데 사실 이런 거 다 우리끼리의 놀이일 뿐이다. 나는 아가씨, 에이브릴 라빈, 세자비 캐릭터 다 좋은데 대부분 애들은 아예 그 의미 자체를 모른다. 에이브릴 라빈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냥 걔들한테 나는 여자1이다. 어쩌면 여자2. 어쩌면 묶어서 여자 쌍둥이. 내 친구들은 어차피 거의 다 여자지만, 그런 식으로 말할 때 여자라는 말은 정말 싫다. 그건 욕하는 의미로 하는 말이니까. 그런 세상 안에선 게이고 여자고 호모고 에이브릴 라빈이고 다 같은 말이다.


  가끔 그런 고민을 한다. 나는 그들의 기준에 적응해야 할까? 여자 아니면 남자 중, 남자 그룹 안에? 어쨌든 그쪽이 더 큰 세상이긴 하니까. 우리 할머니도 ‘여자애들이랑 놀지 말아라. 걔네는 진짜 친구 아니다.’ 하니까. 그것 말고도 주변에서 우리를 하도 유별난 시선으로 보니까. 물론 나도 남들 신경 긁고 싶지 않다. 게이 새끼라며 급식 먹으려고 줄 서 있는데 내 등에다 침 뱉었던 정해솔. 노는 애니까 나 역시 무섭다.


  평범한 척을 시도해 본 적도 있다. 과학 영재캠프인가 거기에 간 적이 있는데 죄다 남자 판이라, 나도 그들 중 한 명인 척했다. 대충 개구리도 해부하고, 별도 봤다. 근데 그러고 있으려니 캠프가 너무, 너무, 너무 재미없었다. 걔들도 다 나를 재미 없어 했다. 걔네의 기준 안에서 난 그냥 말 수 없고, 안 웃고, 맥가이버 칼도 모르고, 축구에도 안 끼려 하는 범생이일 뿐이니까. 거기에 낄 수야 있었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이쪽과 저쪽에서 나는 전혀 다른 취급을 받는다. 중학교 생활은 앞으로 2년 반이나 더 남았는데. 아무리 우리가 전과는 달라졌다지만. 여자와 남자는 이제 서로 입는 교복부터 다르다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목소리도 표정도 없는 애가 되고 싶지 않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계속 살 수가 있을까?


  지금처럼은 계속 살 수 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내 친구들과 내가 만든 세계관이 존재한다. 적어도 그 안에서 나는 아가씨이자 에이브릴 라빈이자 세자비로, 잘 지낼 수 있다.



본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년 아동·청소년 대상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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