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미친 여자
조명이 켜진다. 한, 무대의 끝과 끝을 부산하게 움직이며 외출 준비를 한다. 무대의 중앙쯤에는 전신 거울 틀이 놓여 있다. 그 뒤로 한과 같은 옷을 입은 영의 모습이 보인다. 영, 은은한 미소를 짓고 한의 움직임을 천천히 쫓는다. 한 옷장에서 화려한 운동복 바지를 집어 든다. 획, 영 쪽을 돌아본다.
한 (바지를 다리에 대보며) 나풀거리지?
영, 그저 미소 짓고 있다.
한 아니, 이왕이면 화려한 게. 춤출 때 기분도 좋고.
영, 여전히 미소 짓고 있다. 한, 한숨을 쉬고 옆의 회색 운동복 바지를 집어 든다. 검사받듯 두 운동복을 영 쪽으로 들어 보인다. 짧은 사이. 한, 회색 운동복을 무대 중앙에 내팽개친다.
한 안 해. 난 회츄‘남’이 좋다고, 내가 입는 거 말고.
한 씨익 웃는다. 한 화려한 운동복을 그 자리에 내려놓는다. 재빨리 무대 반대쪽 화장대로 달려간다. 빨간 립스틱을 꺼내 정성스레 바른다. 영의 앞으로 가 왁킹 포즈를 취한다. 영도 같은 포즈를 취한다.
한 이렇게 하면 완전 립제이.
한 다음 포즈를 취한다. 하지만 영은 손을 내린다. 한, 힐끗 영의 눈치를 살핀다. 곧 자신도 천천히 손을 푼다.
한 어차피 마스크 가려서 안 보이니까, 알지. 물도 마셔야 하고, 여기가 퀴어판도 아니고.
짧은 사이. 한 화장대로 다가가다 멈칫 뒤를 돌아본다. 영이 휴지를 꺼내 거울 틀 옆에 놓았다. 한은 되돌아가 휴지로 자신의 입술을 닦는다. 휴지를 바닥에 버린다. (점점 한의 이동 반경이 좁아진다.)
한 퀴어들 진짜 이상해. 다른 춤 학원들은 그냥 다 하잖아, 왜 자기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냐고, 어차피 시민 취급도 못 받으면서!
한, 벌떡 일어난다. 화려한 운동복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춘다. 짧은 사이.
한 저 바지 정돈 입을 거야. (휙, 영을 돌아보며) 그래, 이미 ‘걸즈’ 힙합 배우지. 걔네가 그렇게 갈라 논 걸, 어째 그럼. 뭐? 회사 장기자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우는 거라고? 그래, 그 알리바이 내가 만들었다! (한 고개를 제 손에 묻는다.) 멀쩡한 회사원도 꽃무늬 좋아할 수 있잖아.
영 미소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젓는다. 한 되돌아간다. 회색 운동복을 껴입는다. 그때 카톡 알림음이 울린다. 영 궁금한 듯 한의 핸드폰을 넘겨 본다. 짧은 사이. 한 운동복을 바닥에 다시 벗어둔다. 한 고개를 들어 영을 본다.
한 취소됐대. 여기도 거리두기.
좌우를 왔다 갔다 한다. 발에 휴지 곽, 운동복이 차인다. 곧 주저앉는다.
한 뭘 옷을 따지고 있어, 이 시국에. (핸드폰을 바닥에 두고, 이리저리 구른다.) 어으, 답답해. 지난주도 추석이었는데.
한 힐끗 핸드폰을 본다. 팔을 꼼지락 뻗어 핸드폰을 쥔다. 몸을 일으켜 앉는다.
한 (핸드폰을 두들기며) 남자라도 만날까? (한 거울 옆의 냉장고에서 즉석떡볶이 키트를 꺼낸다) 떡볶이도 같이 해 먹고.
한, 힐끗 영을 본다. 영은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한 왜. 뭐라더라, 이성애자들은 8인까지 모였다더라. ‘우리 큰손주. 색시감은 언제 데려올라고?’ 그거 한다고. 난 못 보잖아. 그니까 초대 한 명 정도는 쌤쌤이 아냐?
영 짐짓 고개를 젓는다.
한 실내에 두 명은 방역 지침에도. 그래, 낯선 사람이긴 하지.
한 앉아서 떡볶이 봉지를 깐다. 힐끗 영을 본다. 다시 떡들을 손으로 비벼 떼어낸다. 영은 내내 한을 응시하고 있다. 짧은 사이. 한이 떡을 탁 내려놓는다.
한 나더러 어쩌라고? 남자들이 낯선 시디만 원하는 게, 내 탓이야?
긴 사이. 떡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영 누그러진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린다. 한, 영에게서 돌아 눕는다.
한 됐어. 그런다고 덜 외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영 두 손을 제 가슴 앞에 꼭 모은다.
한 안다고. 그러다 감염되면 회사에 따로 할 말도 없는 거.
한, 기우뚱 몸을 일으킨다. 그대로 엉덩이를 끌고 영 앞으로 간다. 한, 자기 긴 머리를 찬찬히 손 빗질한다. 영도 따라서 손 빗질한다.
한 머리가 짧았으면 의심 안 받았을까.
영 제 머리를 몽땅 뒤로 감춘다. 짧은 사이.
한 그래도 티 났을 거야.
영 제 머리를 스르륵 푼다.
한 추석 전에 부장님이랑 남직원들은 다 같이 갔다더라. ‘비지니스 클럽’.
영 눈이 동그래진다.
한 거긴 코로나가 피해가? (한숨 쉬고) 적어도 잘리진 않겠지. 걸려도, 다 같이 간 거니까.
한 자기 양쪽 무릎을 모아 앉는다. 고개를 무릎 가까이 숙인다.
한 난 그냥 퀴어 페미니스트 춤 동아리가 가고 싶었을 뿐이야.
사이.
한 있잖아. 나 대학생 때는 메르스가 유행이었어. 그때 막 호모들이 이 시국에 축제 한다고. 실은 퀴퍼 참여자 대부분이 온라인으로 참여했거든. 오히려 반대 세력이 훨씬 더 많이 모였었거든. 근데 사람들은 막 동성애자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에이즈랑 메르스 바이러스가 합쳐지면 슈퍼 바이러스가 된다고. 웃겼어.
영 손등으로 입을 막고 웃음 참는 시늉을 한다.
한 그땐 매번 이런 식일 줄 몰랐거든.
영, 멈칫한다.
한 그 이번에도 왜, 이태원 게이 클럽발 코로나라고, (고개를 살짝 들고 두리번) 그런 기사가 있을 텐데..
영 핸드폰 쪽을 손짓으로 가리킨다. 한, 제 자리에서 손을 뻗었다가 이내 추욱 내린다. 한, 영 쪽을 돌아본다. 객석에선 한의 뒷모습만 보인다.
한 (중간중간 쉬어가며) 생각해보면 한참 동안 나한테 말 걸어준 사람이 없었어. 업무 연락은 많았지. 혁이 씨 이것 좀 수정해주세요. 혁이 씨 컨펌 다시 내려왔어요. 혁이 씨, 혁이 씨. (긴 사이) 너도 알잖아. 혁이 씨는 내 전부가 아니야.
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 주변을 둘러본다.
한 아니 근데, 집이 언제 이렇게 더러워졌어. 좀 치워야 하는데.
짧은 사이. 한 그대로 자리에 천천히 드러눕는다.
한 (누우며) 집에서만 생활할수록, 공간을 쾌적하게 유지해야 하는데. 그래야 다시 힘이 나는데.
짧은 사이. 영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완전히 일어서서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한을 내려다본다.
한 (한숨 쉬고) 너는 이런 내가 우습지?
영은 고개를 젓는다.
한 (띄엄띄엄 이야기한다) 왜 방은 지가 다 어질러 놓고 자꾸 남 얘기만 하고 있잖아. 친구 없는 것도, 게으른 것도 다 자기 탓이면서. 이 시국엔 다들 힘든데, 고작 춤 동아리 못 갔다고. 완전 피해의식이 쩔어서는. 완전 원맨, 원트랜스젠더쇼야. 거울이나 붙잡고....
한은 이제 눈까지 감고 있다. 영이 한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영, 한이 자는 것을 보고 미소를 푼다. 엄중한 표정으로 한을 내려다본다. 사이. 영 천천히 거울 틀을 기울인다. 거울 틀 안에 한이 갇히도록 거울 틀을 그대로 눕혀 놓는다. 한 미동도 없다.
한 (잠꼬대처럼) 걱정 됐을거야, 운영진도. 왜 게이, 레즈들이 춤바람 나서 사람들 전염 시킨다 소리 나오면, 안 되는 거잖아.
영은 꼿꼿이 서서 한을 내려다본다. 꼭 감시하는 것처럼. 긴 사이.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한 자기 싫은데. 맨날 잠만 자는데.
영은 여전히 한을 응시한다. 곧 조명이 완전히 꺼진다.
- 막 -
본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에 선정, 지원을 통해 제작된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