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은 4학년 수민이와 5학년 샨드라만 가르치는 날이다. 수민이와 샨드라는 장난을 안 치고 착실하게 수업을 들어서 나도 수업하기가 편하다. 두 명 다 수업과 관련 없는 수다를 많이 떨기는 하지만 말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낫고, 그렇게 이야기하며 한국어 연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좋다.
샨드라의 눈은 수업 시간 내내 초롱초롱 빛난다. 샨드라에게 쓰기 과제를 주면 샨드라는 과제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다 쓰고 나서는 내가 자기에게 오기를 가만히 기다린다.
반면에 수민이는 수업을 좀 지루해하는 편이다. 수민이에게 쓰기 과제를 주고 다른 일에 신경 쓰다가 수민이를 힐끗 보면, 항상 축 늘어진 자세로 세월아 네월아 느릿느릿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이다. 수민이는 공부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한다고 한다.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을 때 수민이는 아주 활발한 수다쟁이이다.
예의도 바른 수민이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나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그리고 바로 어제오늘 있었던 이야기, 가족 이야기, 꿈 이야기 등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이러고서는 수업을 시작하겠다고 하면 신기하게도 바로 몸이 축 쳐진다.
"수민아 안녕!"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 제가 아침에 오면서 뭘 봤는지 아세요?"
"뭘 봤는데? 궁금하다."
"민지라고 우리 반 애가 있는데요, 걔가 앞에 가고 있는 거예요. 저는 걔랑 인사하기 부끄러워서 걔가 못 보게 뒤에서 살금살금 갔어요. 그런데 걔가 뒤를 휙 돌아보더니 저한테 '수민아, 안녕!'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게요?"
"어떻게 했는데?"
"저는 어색해서 '아, 안녕' 하고 눈 안 보고 인사하고 빨리 걸어서 학교 들어갔어요. 웃기죠? 히히히"
"에이, 친구가 먼저 수민이가 반가워서 인사했는데 수민이도 반갑게 인사하지 그랬어."
"아니에요. 저는 친구들하고 그렇게 인사하는 게 부끄러워요. 그리고 같은 반이지만 안 친해요. 우리 반에는 또 민수라는 애가 있는데요, 오늘 미술 시간에 어땠냐면요..."
"그랬구나. 자, 이제 우리 공부 시작하자. 책 펴 수민아."
이러면 이전까지 신나게 수다를 떨던 수민이는 갑자기 몸이 축 처져 천천히 책을 펴고, 힘없는 목소리로 나한테 묻는다.
"... 오늘은 몇 쪽까지 할 거예요, 선생님?"
수민이는 내가 알려 준 진도가 자기 생각보다 많으면 '히잉... 빨리 해야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절대 빨리 하지는 않는다. 말할 때도 쓸 때도, 한숨을 쉬며 아주 느리게 하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중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는 갑자기 목소리가 밝아지고, 어떤 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가 겪은 일을 몸동작을 하면서까지 들려주곤 한다.
"수민이는 베트남에서도 학교를 다녔지? 베트남 초등학교하고 한국 초등학교는 어떻게 다른 것 같아?"
"다른 거요? 전 잘 모르겠는데... 베트남 친구들은 틱톡 좋아해요. 아, 저 선생님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저 베트남에서 친구하고 같이 틱톡을 찍었는데요, 어떻게 찍었게요?"
"어떻게 찍었어?"
"막 춤추면서 찍었는데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춤추면서 찍었어요. 진짜 웃기죠?"
수민이와 이야기를 할 때면 어쩜 이렇게 수다 떨 때와 공부할 때 태도가 다른지 싶어 재미있다. 공부도 이렇게 신나게 하면 좋을 텐데. 그런데 수민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수다가 아니라 '잠'이다. 수민이의 대답 중 50%는 '잠'이 차지한다.취미가 뭐냐, 집에 가서 뭐 하냐, 방학 때 뭐 하고 싶냐 하면 무조건 잠 잠 잠이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집에서 아주 일찍 일어나거나 평소에 잠을 잘 못 자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어느 날은 교재에 'Leve me slep'이라고 쓰기도 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leave me sleep(날 자게 냅둬)'을 자기 스타일로 쓴 거라고 한다.
Leve me slep!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수민이에게 어른이 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대답은 역시나였다.
"음... 어른이 되면 실컷 자고 싶어요. 지금은 학교 때문에 아침에 맨날 일찍 일어나야 되니까요. 우리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 소리치면서 저를 깨워요."
"어른이라도 아침에 일하러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돼."
"그래도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우리 엄마 아빠하고 할머니는 항상 저한테 뭘 하라고 시키고 '이거 안 돼, 저거 안 돼.' 말하는데요.(한참 어른들이 자기한테 잔소리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데 어른이 되면 저한테 안 그럴 거잖아요. 어른이 되면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거 할 거예요. 일단 잠을 많이 잘 거예요!"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 게 많다니! 어른인 나도 몰랐는데. 아니, 지금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도 어렸을 때 평일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싶은데 항상 8시 전에 일어나는 게 불만이었고, '빨리 어른이 돼서 내 맘대로 일어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지금의 수민이처럼 어른이 되면 다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실상은 할 수 있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없는 게 더 많아진 듯하지만 말이다. 가끔은 수민이 나이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수민이한테 어른의 생활에 대한 실상을 알려 줄 필요는 없겠지. 수민이의 '빨리 어른이 돼서 잠을 실컷 자고 싶다'는 꿈을 꺾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수민이가 어른이 됐을 때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어 마음대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 될지. 수민이는 '마음대로 실컷 잘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지만 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수민이가 '마음대로 실컷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