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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S Dec 30. 2018

모두가 꺼리는 일이라면,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알고 보니 이게 남는 장사

'희한하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날 찍어서 부르려고 작정한 거 같아.'


중학교였나, 고등학교였나.. 학창 시절 내 번호가 18번이었던 때의 기억이다. 수학 선생님이 무작위로 번호를 불러 질문해서 답을 못하면 몽둥이찜질을 하는, 뭐 그런 류의 수업이었다. 8일, 18일, 28일 등 끝자리가 8인 날은 당연히 불렸고, 그 정도는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12일에, "오늘이 12일이니까, 어디 보자 한 달이 30일. 30 빼기 12는 18. 18번 나와서 풀어." 29일에는 "29일이니까, 2 곱하기 9는 18. 18번 나와서 풀어." 심지어, "얘들아, 선생님이 오늘은 그냥 기분이 막 별로고 그러네? 그러니까 내 기분 같은 18번 나와서 풀어."


선생님이 그냥 기분이 좀 그래 (출처: 영화 '친구')




'아, 이건 정말 안 하고 싶은데...'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꺼리는 일이 있기 마련이고, 내가 꺼리는 일은 거의 대부분 다른 이들도 꺼린다. 사실 보통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란 게 품만 많이 들고 티는 안나는 일,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 하찮아 보이는 일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어쩐지 학창 시절에도 피하고 싶은 일들이 잘 걸리더니, 회사 생활하면서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아, 저 일은 안 하고 싶은데' 하면 나에게 날아오는. 자기소개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타고난 귀차니스트의 본성을 갖고 있어서 무엇인가를 계속 쉴 새 없이 하면서 희열을 얻는다던가, 일을 너무 사랑해서 일해야만 힘이 나는 사람하고는 거리가 조금 멀다.(놀랍게도 실제로 그런 사람을 몇 번 보았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하고자 해서 의욕적으로 나선 것도 아닌데 모두가 꺼리는 일이 내게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 깨닫게 된 건, 막상 사람들이 피하려는 그런 일들을 직접 해보니 그게 꼭 피할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두를 위해? 나를 위해?

"5년 연속 GWP Agent는 김 과장이 우리 사업부에서 거의 유일한 것 같은데?"


내가 삼성에 있을 때는 부서별로 GWP Agent라고 해서 팀원들의 회사에 대한 만족도를 올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계획 실행하는 '요원'이 있었다. 정기적으로 팀의 문화 활동이나 외부 봉사 활동을 기획, 준비하고, 주니어 직원들과의 면담을 통해 그들의 건의 사항을 임원에 전달하는 업무들을 하게 된다. 또 각 부서 GWP Agent들이 모여서 활동 성과를 발표, 공유하고 교육을 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게 업무 외 활동이어서 다들 자기 일은 그대로 하면서 남는 시간을 쪼개며 해야 되는 일이었기에, 그다지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보통 적당한 대리나 과장급 직원이 1년 임기로 '해치우고' 다음 주자에게 넘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처음엔 나도 그런 마음으로 GWP Agent가 되었다. 팀 행사를 기획 주관하고, 행사마다 사회도 보고, 주니어 직원들 '소원수리*'도 받고 임원진에 애로사항도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그러다 보니 일 년이 휙 지나가 버렸다. '자, 다음은 누구냐. 이 폭탄을 받을 사람이.' 깔끔하게 넘겨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다들 눈치만 보고 주저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마치 저승사자가 되어 누구를 지옥에 데려갈까 하는 것 같았다. '정말 다들 하기 싫어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살짝 고민이 되었다. 몸은 몸대로 피곤한데 문제 생기면 욕이나 먹는, 잘해야 본전인 일을 다들 피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그때 내 머릿속은 수능 때보다도 더 빨리 팽팽 돌아갔다. '이걸 일 년 더 해? 말어? 이거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 않나.'라는 고민이 많았지만, 생각해보면 고생한 만큼 또 내가 얻은 것도 꽤 많았었다. 무엇보다도 고위 간부, 임원 등 회사의 리더들과의 독대할 기회가 많아져 그분들의 팀 운영에 대한 생각, 팀원들에 대한 의견, 그리고 회사의 앞으로의 방향성 등에 관해 종종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점이 내 시야를 넓힐 수 있었던 좋은 소득이었다. 그래, 결심했다. 1년 해봤는데 2년이라고 못할까.

"상무님, 제가 보니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거 같은데, 제가 1년 더 해보겠습니다."

"그럴래? 김 대리가 자원해줘서 다행이다. 고마워. 1년만 더 잘 부탁할게."

그렇게 1년을 더 했다. 이제는 경험이 쌓여 다른 팀 Agent들도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평소 만날 일이 없던 다양한 팀 사람들과도 교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만큼 내 업무를 더 적은 시간에 집중해서 해야 돼서 피로는 늘었지만, 남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은 일을 내가 자원해서 한다는 게 왠지 어린 마음에 스스로가 조금 멋있게도 보였던 것 같다. 그런 여러 불순한(?) 이유 덕분에 나는 과장이 된 후에도 꾸준히 자원을 했고, 팀원들도 하기 싫은 일 해주는 사람이 하나 생겨 좋아하는 눈치였다. 임원분들도 별다른 불평 없이 하는 내 모습에 조금은 더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이렇듯 남들이 꺼리는 일을 자원함으로써, 팀원의 신망도 얻고, 나 스스로 인맥도 쌓고, 임원들과의 교류도 늘어 나는 일석 삼조의 혜택을 받았으니, 꼭 '모두를 위해 희생한다'는 도덕적인 이유를 들먹이지 않고, 계산적으로 따지더라도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명랑한 회사 생활 @ GWP 행사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액세서리 제품들 담당할 사람이 필요한데, 누구 하려는 사람이 없네. 김 대리는 어때?"

'아놔, 왜 또 나야.' 속으로 짜증이 후욱 올라왔지만, 표정 관리하면서 조금 고민을 했다. 그러자 상무님은,

"김 대리도 알겠지만 다들 주목받는 스마트폰만 담당하려 하니, 이런 손 많이 갈 일을 할 사람 찾기가 어려워."

내가 일했던 휴대폰 비즈니스의 해외 영업 마케팅팀에서는 당시 회사의 스포트라이트와 각 유관부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스마트폰이 주요 제품이었다. 그래서 각 팀에서 제품별로 담당을 배정할 때, 당연히 스마트폰을, 특히 가장 중요한 플래그십 모델을 맡는 것이 눈에 띄었기에 선호도가 높았다. 반면, 그 당시 액세서리 제품은 보통 휴대폰에 호환되는 이어폰이나 충전기, 휴대폰 케이스 등의 주변기기들인데, 폰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한정되어, 잘해야 본전인 제품으로 많이들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팀별로 액세서리 전담인력이 필요하단 상부의 지시에 다들 눈치 보면서 피하려고 하는 분위기였다. 그간 플래그십 제품을 담당했던 나는 상무님의 SOS에 다시금 머리를 굴렸다. '진짜, 정말, 완전, 너무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근데 짜치는 일일 수 있지만, 또 이거 하다 보면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겠지. 다들 안 한다는데 나서서 하겠다고 하면, 상무님도 고마워할 것 같고.'라는 조금 세속적인(?) 이유로 결국 액세서리 담당을 자원하였다. 막상 담당을 하니, 현실은 회사의 관심도 거의 없고, 지원도 없고, 인력도 부족한 삼중고였다. 남들이 피하는 건 다 이유가 있지... 하지만 이후 비즈니스가 진화하면서 제품군도 늘어나, 새로운 제품들도 함께 담당하게 되었다. 손목시계 형태인 웨어러블 제품과 VR 제품이 그것인데, 당시 시장에서도 많이 생소하고 사내에서도 처음 시도하는 제품들이다 보니 내가 진행하는 업무 방식대로 표준 프로세스가 만들어지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어 많은 이들이 피하려 했던 웨어러블, VR 제품을 담당했던 덕분에, MBA 과정 중이나 회사를 옮긴 후에도 희소성 있는 경험자로서 우대받으면서 여기저기에 불려 다닐 수 있었다. 



사실 다들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리고 동기부여를 받기가 어렵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무도 안 하려 하는 일을 내가 하는 만큼, 내가 얻는 대가는 생각보다도 더 큰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할 때마다 '이런 작은 일도 가리지 않고 솔선수범해서 척척 해내는 멋쟁이'라는 가상의 캐릭터에 빙의하려 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나만의 연극 무대를 만들어 '내가 주인공이다.', '신데렐라같이 허드렛일을 하는 거다.' 등의 조금은 낯 뜨거운 자기 암시를 통해 즐겁게 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지 못했던 인맥을 만들거나 윗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내가 하는 일이 남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되기도 하였다.




난 멋져... (출처: SBS '런닝맨')


남자들이 자기 자신이 가장 멋있다고 느끼는 때가 아침에 씻고 화장실에서 거울을 볼 때라는 어느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인가 내 주변에도 화장실 거울 앞에서 온갖 포즈를 잡으며 흐뭇해하는 친구들이 몇 있다.(나는 아니다.) 스스로 멋있다고 느끼다 보면 그 자신감으로 더 당당해져서 실제로 조금은 더 멋져지는 일도 있지 않은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나도 하기 싫지만 누가 시켜서 떠넘기듯 받아서 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해보면 내가 멋있게도 느껴지고 자신감 있게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주변 사람들이 무관심한 '하찮은' 일이더라도 언젠가는 알아주지 않을까. 나의 이런 '멋진 모습'!







표제 사진 출처: 영화 'Tinker Tailor Soldier Spy'

*소원수리: 불편 부당한 일들에 대한 시정 요구를 청취하고 처리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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