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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S Feb 16. 2020

출장의 맛: 출장은 업무의 성과를 이끌어내는 수단

여권이 너덜해진 15년 차 출장쟁이의 이야기

"아, 출장을 더 미뤘어야 했나...?"


2016년 겨울, 싱가포르 호텔 방에 누워 넋두리를 하는 나.

그해 초쯤에, 브라질과 동남아에서 크게 유행하는 지카 바이러스가 소두증 아기 출산과 관련이 있다는 뉴스가 나오며, 전 세계의 예비 부모들은 커다란 공포에 휩싸였다. 당시 가족계획 중이었던 내게도 쉽게 넘길 수 없는 뉴스였기에 그 해 여름으로 예정되었던 싱가포르 트레이닝 출장을 가능한 계속 미루다가, 더는 늦출 수 없어 결국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바이러스가 모기를 통해 전염이 된다는데, 동남아에서 모기에 전혀 안 물릴 방법이 있긴 한 걸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약 5일간의 출장 기간 내내 예비 아빠 후보의 눈물겨운 사투가 이어졌다. 가능한 밝은 색 긴팔, 긴바지를 입고, 야외에서의 모든 활동은 다 피한 채, 업무만 마치면 호텔방에서 꽁꽁 싸매고 지냈다. 이렇게 유난스럽게 지낸 덕분에,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모기 피해 Zero' 목표를 어렵사리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귀국 직전, 싱가포르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마지막 식사를 하던 태국 음식점. 안도의 마음으로 방심했던 그 찰나에 나는 결국 모기에 물리고 만다. 아... 그때의 절망감이란, 마치 다 이겨가던 야구 게임에서 9회 말 2 아웃에 역전 끝내기 안타를 맞아 역전패한 심정과도 같았다. 다행히, 그 모기는 바이러스를 옮기지 않은 것으로 후에 판명이 났지만, 출장이 도대체 뭐길래, 이런 고통도 감내해야 했을까. 


내가 모기에 물리다니!! [사진 1]




출장은 여행이 아니다


"라스베가스? 아~ 부럽다. 나도 출장 가고 싶다!"


출장 갈 때, 주변에서 종종 듣는 이야기. 근데, 내가 가는 곳이 라스베가스면 뭐하고 몰디브면 뭐하나. (몰디브 출장은 좀 가보고 싶기는 하다.) 어차피 회의 - 발표 - 회식만 주구 장창하다 오는 건데. 그렇게 말해도 일단 밖에 나가면 좋지 않냐는 이야기도 듣고는 하지만, 회사에서 호텔에, 비행기에 비싼 돈 들여 보내는 것은, 결국 내가 이 출장을 통해 얻어낼 성과가 이 투자보다 커야 한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바깥바람 쐐서 좋다는 생각보다는 부담감이 들 수밖에 없다.


"우동먹고 싶은데 점심엔 도쿄나 갈까?"

예전에 무슨 코미디 프로에서 들었던 대사 같은데, 내게는 남 얘기 같지가 않았다. 이게 여행이 아닌 출장이란 건 함정이지만... 삼성 시절엔 도쿄 당일 출장이 은근히 많았다. 당시 서울 외곽의 본가에서 출퇴근하던 나는, 수원 오피스까지 출퇴근이, 길 좀 막히면, 편도 2시간 정도 걸리는 고난의 행군을 했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도쿄 가는 항공편도 2시간. 그러다 보니, 아침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하듯 집을 나선다. (짐도 노트북 가방 하나 들고 가니, 평소 출근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공항으로 갈 뿐. 아침 비행기를 타면 도쿄 도심에는 12시 전에 도착을 한다. 파트너사와 미팅을 하고, 현지 법인과도 각종 업무 협의를 빡빡한 일정에 맞춰하다 보면 어느덧 5시. 슬슬 정리하고는 퇴근 버스에 몸을 싣듯 귀국 비행기에 타서, 출장 성과를 정리하다 보면 어느덧 도착한 집. 도쿄를 간 건지, 수원을 간 건지, 하루 종일 빡빡하게 일한 기억만 있는 것을 떠올리면 내겐 큰 차이 없는 하루였다.


"조금만 기다려줘, 지금 막 미팅 끝나고 뛰어가고 있어"

분 단위로 잡힌 미팅들 사이에, 다음 미팅 장소로 뛰어가느라 땀을 바가지로 쏟아내면서 동료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성과중심의 미국 회사인 구글에서도 당연히 출장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다. 지난 샌프란시스코 출장의 목적은 팀의 워크숍이었지만,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갔으니, 현지의 협업 부서원들과의 미팅을 분단위로 잡았다. 누가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간 김에 최대한의 성과를 뽑아내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이 나를 이역만리에서 땀에 푹 절게 했다. 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냐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했지만, 이 땀은 내게 그만큼의 보상을 주곤 했다. 한 달째, 샌프란시스코의 PM(제품 담당)과 매주 화상회의를 해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나를 계속 괴롭히던 때였다. 마침 이 기회를 빌려, 그 친구와 Face-to-face 미팅을 잡아 만나게 되었고, 둘이 직접 만나 문제를 하나씩 분석하며 협의를 했다. 직접 얼굴을 맞대게 되니 서로 좀 더 호의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먼길 날아온 내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었는지, 그 친구는 더욱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썼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빠듯한 스케줄에 쫓기게 되더라도,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 부서의 협력이 필요한 안건은 둘이 손잡고 해당 업무 담당자에게 바로 찾아가서 해결하는 등, 결국 1달 넘게 헤맸던 숙제가 2시간 만에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많은 미션들을 짧은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해내기 위해, 나의 출국 편은 고행의 시간이 된다.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자는 주변의 승객들을 부러워하며, 출력해온 출장 자료들을 훑고 또 훑으며 나는 중얼중얼 속으로 되뇐다. '아, 영화 딱 한편만 볼까..'


나를 땀에 푹 절게 했던 자전거 @ 구글 마운틴뷰 오피스



자율성은 성과의 디딤돌


"옆팀 임원이 출장 와달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건 네가 정해야지. 가든지 안 가든지 정해서 알려줘"


시크하면서 상냥한 내 매니저의 대답.

구글에서 출장에 대해 새롭게 경험하고 배운 점은 바로, 출장에 대한 직원의 자율성이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출장 자체에 대한 구글 사내의 분위기가 그렇다. 매니저가 조언은 해주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일하다가 출장이 필요해서 가겠다 생각하면 가는 거고, 누가 와달라 요청해도, 내가 아니다 생각하면 안 가는 거다. 이와 같이, 출장의 성사 자체에 나의 자율적인 판단의 개입이 큰 만큼, 출장의 목적에 맞는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와이프랑 딸이 호텔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볼게"

전시회 출장에서 만난, 브라질 동료가 디너를 마치고 일어나며 내게 던진 말.

이 친구가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직속 상사인 어떤 임원은 해외 출장 때 남편이 자주 동행해서, 업무와 관계없는 캐주얼한 디너나 현지 이벤트에서 종종 그도 함께 만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정이 들어 팀 동료와도 같은 친근함도 드는데, 출장 업무에 영향만 주지 않는다면, 이렇듯 자비를 들여 가족들이 함께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일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출장 간 김에, 해당 오피스에서 1,2주 더 일하다 오는 동료들도 왕왕 있다. 뉴욕 오피스에서 트레이닝이 있어 출장 간 팀 동료 M은 며칠 전, "나 뉴욕 출장 온 김에, 출장 끝내고 뉴욕 오피스에서 2주만 더 일하다 갈게."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트레이닝은 끝났지만, 뉴욕 오피스의 동료들과 함께 협업할 부분들이 있어, 현지에서 직접 보면서 업무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구글의 합리적인 문화는 이런 데서 더 유연하게 빛을 발한다. 문제없이 업무 성과만 잘 나온다면야 문제 될 게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구글의 가장 큰 장점 중 한 가지는 개개인의 자율성과 그들의 판단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회사가 개개인에 보내주는 이 신뢰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더 많은 책임감을 갖게 하여,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리라 믿는 것인데, 내 개인의 경험도 이 판단에 한 표를 주고 싶다.


출장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팀 동료들



 

"와인이랑 맥주, 그리고 땅콩도 같이 주시겠어요?"


크아-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지나갈 때의 그 짜릿함. 출장 마치고 돌아오는 귀국 편에서의 나만의 세리머니는 어쩌면 출국부터 일정을 마칠 때까지 내내 타이트한 스케줄 속에서 꿈꿔오던 유일한 순간일지 모른다. 돌아가서, 쌓여 있을 출장 후속 업무들이 걱정은 되지만, 잠시 그간의 걱정은 내려놓고 즐기는 이 맛에 그래도 꾸역꾸역 출장을 가는 것 같다.

그래 이 맛이야. 출장의 맛.


출장의 꽃, 귀국길 세리머니







표제 사진 출처: pixabay.com/photos/airport-man-travel-traveler-1822133/


사진 1 출처 : SBS 드라마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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