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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Suburb)를 만들어낸 출퇴근의 역사

by Grandmer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저는 올해 35살이 된 데이비드라고 합니다.

< 운전 기사 참조 이미지 >

아프리카 가나의 북쪽 마을인 쿠마시에서 태어났으며 가나의 수도인 아크라에는 20살이 되던 해에 왔기 때문에 올해로 꼭 15년이 됩니다.


현재 직업은 운전기사스탠더드 차터드라는 은행에서 근무하는 영국인 매니저의 출퇴근을 돕고 있습니다.


그가 사는 곳은 아크라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에어포트 레지던셜이라는 곳입니다.


제가 사는 아크라 외곽 지역과는 3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 아크라 외곽 >

중심부의 부동산 가격은 너무 비싸서 제가 거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한 달에 아무리 적게 잡아도 월세가 3천 가나 세디 (500달러, 60만 원) 가량되기 때문에 저는 외곽에 한 달에 150 가나 세디 (30달러, 4만 원) 정도 되는 집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서 그의 집까지의 거리는 30km 정도이기 때문에 차로 운전해서 가면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가 없는 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1시간 반 정도를 걸려 그의 집에 도착하게 됩니다.


새벽 5시 반에 집에서 출발해 버스 정류장까지 20분 정도를 걷고 버스를 타고 다시 50분 정도를 이동하고 근처에 내려서 다시 그의 집에 가게 되면 오전 7시 전에는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오전 7시에는 차량의 상태를 점검하고 7시 20분 정도에 그를 직장까지 데려다주면 아침 일과가 끝이 납니다.


그의 집에서 그가 일하는 스탠더드 차터드 은행 본점까지는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습니다.


아침저녁 출퇴근이 힘들기는 하지만 도시에 와서 직장을 잡게 된 것은 저의 삶이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발판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Ⅰ. 출퇴근의 시작


지금이야 일상적인 일이지만 한때 통근은 파격적인 행위였습니다.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하는 동시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농업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세 시대나 근대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통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논이나 밭에 가서 작물을 일구고 경작하기 위해서 이동하는 거리를 통근 혹은 출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직장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일터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의 확장이라고 생각했을 뿐 별개의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직장이라는 개념이 들어서게 되고 이 두 공간의 이동을 우리는 출퇴근이라 부르고 통근이라는 말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통근의 시작은 영국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산업 혁명과 함께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증기기관을 이용해 먼 거리를 이동하는 기차가 발명되면서 통근이라는 사회적인 혁명도 발생되게 됩니다.


최초에 사람들은 통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왔습니다.


통근은 귀찮은 행위가 아닌 열망할 만한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최초의 철도 열풍과 함께 장거리 통근이 생겨났면서 통근은 이동의 자유를 상징했으며, 그 도전과 변화를 받아들일 만큼 용감한 사람들에게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일, 주거, 여가의 패턴을 바꿔놓았고, 심지어 시간 자체의 개념까지도 바꿔놓았습니다.


집과 직장을 분리하려는 열망도 생겨났습니다.

< 초기의 증기 기차와 승객들의 모습 > (출처 : 아틀라스 뉴스)

즉, 건강한 곳에서 살고 수익이 가장 많은 곳에서 일하려는 열망이 19세기에 진행되면서 점점 강화된 것입니다.


이런 분리는 증기력을 이용한 운송수단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기술 덕분에 가능해졌습니다.


이것은 철도 문화의 일부였고 1830년대에 시작되어 50년 동안 영국을 변모시키게 됩니다.


철도의 도래와 함께 나라가 분주히 움직이게 된 것이지요.



Ⅱ. 출퇴근의 발전


초창기의 철도는 사람이 아니라 화물을 옮기려고 건설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광산에서 생산한 석탄을 공장이며 도시로 운반하고, 지방에서 생산한 식량을 도시로 운반하고, 공장에서 생산한 옷감을 항구로 운반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철도가 개통된 1833년 이래 철도 운영업체들은 막대하고도 자발적인 여객 수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38년에 이르러 스톡턴 달링턴 철도 노선은 매년 20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객 운임 수입이 화물 운임 수입을 훨씬 뛰어넘었다.


마찬가지로 리버풀 맨체스터 철도도 본래 생면화를 맨체스터로 운송하고 완제품을 리버풀의 부두로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자본가들이 철도 건설에 자금을 댄 것도 운하에만 의존해 물류가 이동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운하 운영업체들이 과도한 이용료를 부과했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 물이 꽁꽁 얼거나 여름에 가뭄으로 수위가 너무 낮아지면 운송이 아예 불가능해 다른 방법을 모색했고 이 결과로 철도가 번영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화물 전용 철도가 화물 운송 수단이 아닌 여객 이동 수단으로 변경되게 됩니다.

< 19세기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림 > (출처 : 허핑턴 포스트)

철도가 탄생한 첫 해에만 40만 명의 승객이 이용했으며, 여객 운임 수입이 화물 운임 수입의 두 배 수준에 달할 정도로 수익성이 높았습니다.


철도의 탄생과 함께 사람들의 이동이 더 많아지면서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철도 영국의 국토를 망친다는 것이 표면적이 이유로 자연의 절경과 고대의 기념물들을 더럽히기 때문에 지역을 망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계급체계에서 흠집을 낸다는 것이 반발의 주된 이유였습니다.


철도가 한 곳에 속박되어 노동에 종사하는 하인들에게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하인들을 버려놓는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습니다.


그렇지만 통근이라는 것이 발생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통근으로 출퇴근이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더 번성하게 되었고 사업장소를 중심가에 두고, 25km 혹은 30km 떨어진 곳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아침 일찍 각자의 상점이며 회계 사무소며 사무실에 도착하고, 저녁이면 평소와 같은 시간에 각자의 거처로 아무런 불편 없이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철도가 연결된 곳이면 대도시의 사방팔방 어디나 거주자가 곱절로 늘어났습니다.


Ⅲ. 자동차를 이용한 출퇴근의 발전


자동차를 발명한 나라는 영국이지만 자동차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나라는 미국이었습니다.


자동차의 대량생산에 성공한 사람은 헨리 포드였고 대표적으로 T 모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포드는 기술적으로 발전하면서도 신뢰할 만하고, 나아가 낮은 금액에 판매가 가능해 봉급을 넉넉히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 사서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조립 생산 공정과 표준화된 부품이라는 분야를 개척했으며, 1908년 8월에 최초의 T 모델을 출시했다.


첫 달에는 겨우 11대가 완성되었지만 이후 생산량은 눈부신 속도로 늘어났고 1915년까지 생산한 자동차는 100만 대를 넘어서게 됩니다.


자동차의 가격이 낮아지면서 중산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화이트 칼라, 사무직군) 자기 소유의 차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차량을 거의 업무에 이용했으며 주행 거리의 60퍼센트가 업무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동차로 통근하겠다는 결정을 부추긴 것은 자동차 통근이 주는 자유의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T 모델은 기차보다 느리고 덜 편안했고 속도도 내리막에서야 간신히 시속 65km를 도달할 수준이었습니다.

< 포드 T모델 사진 > (출처 : 테크 월드 뉴스)

소음도 심하고 승차감도 좋지 않아서 여러 모로 불편했지만 정해진 시간에 타야 하는 기차에 비해서 자유도가 높다는 것과 Door to Door 가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자동차 통근은 급속하게 발전되게 됩니다.


자동차 통근이 발전하면서 자동차 산업의 발달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이는 미국의 주택 건축에도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차고라는 개념이 1920년대에 발생되었는데 처음에는 주택 뒤에 지은 별도의 구조물로 과거의 마구간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소유자들이 늘어나면서 차고는 주택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고 나아가 주거지의 매우 필수적인 부분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통근은 도시는 직장이라는 개념을 형성시키고 주거지는 중심지에서 20~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교외(Suburb)라는 문화를 탄생시킵니다.


그 시초는 뉴욕 주의 래빗 타운이 있는데 레빗 타운에는 1만7천채의 똑같은 주택이 들어서게 됩니다.

래빗 타운의 주택은 케이프 코드라는 한 가지 모델뿐이었는데 이는 포드의 대량 생산 원리를 주택에 적용하여 만든 것으로 새로운 형태의 거주 문화를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래빗 타운은 인구의 대이동을 보여주는 단면으로 혁명의 모범 사례로 불리고 이후 펜실베이니아와 뉴저지에도 하나씩 주거지를 더 만들게 됩니다.


[ 글을 마치며 ]


출퇴근이라는 것은 매우 피곤하고 힘든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는 경제적인 부를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처음 통근을 시작했던 1세대 통근자들은 대부분 부유해서 1등석으로 여행했지만, 그보다 사회 계급이 낮은 다수의 사람들은 3등석을 탔습니다.


3등석이라고 해도 열차의 운임은 노동계급의 주머니 사정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일주일에 닷새 동안 하루 두 번씩 20킬로미터를 오가는 데 드는 비용이 일반 육체 노동자의 일주일치 급여의 절반에 달할 정도였으니까요.


따라서 3등석의 주요 승객도 막노동꾼이 아니라 하급 사무원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통근 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서 1세대 통근자들보다 10년이나 더 지난 1850년대부터 비로소 통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통근이 보편화되면서 직장과 주거지의 분리가 이루어졌고 통근자들은 기차역에서 가까운 교외에 저마다 집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도시에서 근무하는 시간을 여전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속도는 처음에는 느렸지만 결국 주거 패턴을 변화시킨 첫걸음이 된 셈입니다.


사실상 통근이 교외를 만들어냈고 나아가 교외의 생활방식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참고 도서 : 출퇴근의 역사 (이언 게이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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