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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마음의 원고를 풀어낼 시간

엄마의 소중한 육아가 빛을 잃지 않도록

by 스텔라


기록하자, 육아는 변화의 극단을 보여주는 좋은 글감

외부 도움 없이 아이를 많이 키우다 보니 정말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다들, 왜 이렇게 힘들다면서 아이를 키우는 일에 정성을 많이 쏟는 걸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힘든 것의 총합이 아이가 주는 행복의 총합보다 작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듦은 점차 작아질 것이고 행복은 더 누적으로 커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리고 당장의 힘듦을 이기는 유전적인 본능이 있다. 내 종족을 번식시키되 나보다 나은 존재로 세상에 내놓고 싶은 것은 본능에 가깝다. 그러니 그 힘든 선택을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요즘 같이 아이 낳는 것 자체가 선택사항이 되어버린 세상에도 여전히 아이의 탄생은 고귀한 행위이고, 육아는 그 어떤 일보다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로 평가되는 이유다.

오늘 당장의 기쁨이나 직관적으로 아이가 내 눈에 예쁜 현상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딱 이거라고 말할 수 없지만, 현실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낄 장치가 육아 라이프 곳곳에 설정이 되어 있다. 내 직관, 본능이 이게 맞는 길이라고 우기는 그것에 맹목적으로 기대 아이를 키워냈다.

천하의 이기적이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웠던 내가 아이라는 생명을 이렇게 키워내고 있는 것이 새삼 기특하고 신통하다. 아이는 강아지처럼 언제가 그 자리에 있지 않다. 매일이 다르게 발전해 가면서 어제 못했던 말을 하고 도움으로만 살아가던 아이가 대화를 하고 엄마에게 도움을 더 많이 주는 존재로 엎치락뒤치락 매일 변화무쌍하다.


바로 이 변화의 변곡점에 답이 있다.

바로 이거다. 사람은 바로 안정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변화라는 본능에 반응하는 ‘생명’인 것이다. 낳고 키우고 낳고 키우고의 반복이다. 이것을 많이 하니 더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살게 된다. 그 변화가 바로 스토리고 나만의 콘텐츠다. 그걸 말로 하면 이야기가 되지만, 조금 정제해서 세상에도 도움이 될 글로 풀어내서 엮으면 책이 된다. 그러니 육아만큼 인생사 파란만장하게 만드는 콘텐츠가 또 있을까? 꼭 육아서가 아니라고 해도, 육아의 내공은 어디에도 쓸 데가 있다. 이 쓸모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명하게 이 시절을 배우고,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칭찬과 인정, 고통과 철학이 뒤엉킨 시간

가끔 외동이나 둘 엄마에게 이유 없이 미안할 때가 있다. 육아란 누구나에게 힘든 일인데 인원수가 조금 많다고 해서 사람들은 엄청난 환호와 칭찬을 해 준다. 사실 나도 첫째 아이만 키우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자리가 지금 자리만큼 힘들었다. 내가 모두 챙겨야 하는 엄마 독립이 보장되지 않은 그 자리가 나보다 더 큰 자리라는 생각을 늘 한다. 그런데도 나의 이 생각과 상관없이 네 아이를 키운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인정과 칭찬을 위해 20~30대를 다 쓴 나로서 이 지점에 멈춰 섰다. 자기 효능감이 떨어진다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출산을 거듭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선 바로 그 지점이다. 내가 여태 해왔던 그 어떤 성과보다 가장 화제에 많이 오른 부분이 바로 ‘네 아이 엄마’라는 사실이다. 나에게도 여기서 벗어나서 나는 나대로 오로지 나로서만 빛나 보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싶었고 네 아이란 타이틀 없이 오롯이 나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 타이틀은 벗어나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내가 나로서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는 그냥 나보다 더 빛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육아를 해냈다는 것은 누구나 자신만의 진짜 스토리를 갖는 것이구나. 아이가 하나건 둘이건 생명을 키워 낸 내공은 잘 빚으면 모두 흑 속에 감춰진 진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눈물겹던 내 육아가 경력으로 빛나도록

끝이 없을 것 같았던 나의 지난한 육아가 언젠가는 나의 경력이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믿어왔고 간절히 바라왔지만 그게 막상 현실이 되니 더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어려우면 누구에게나 어렵다. 어느 한 명도 아이를 쉽게 키운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 이걸 알면 알수록 위안이 됐다. 육아가 어렵다는 것은 자꾸 혼자의 세상 속에 파고들 때 더 그렇다. 그 잘난 어떤 사람도 똑같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물리적인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 그것을 어떻게 뚫고 나갔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기대어 그 시절을 현명하게 버텨내야만 한다.

인생이란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파도라 한다. 다가오는 파도를 그냥 그걸 올라타고 즐기는 것이 인생이라고도 한다. 나는 오는 파도마다 나에게 주는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니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타이밍을 올라타야 할 타이밍을 놓친 경험도 많다.

모든 육아의 문제의 끝엔 결국 '나의 존재'로 귀결했다. 그리고 나를 좀 해결했나 싶으면 다시 육아문제가 터지고, 예기치 못한 시댁문제, 친정 문제도 속출했다. 폭풍 후가 지나고 나면 또 나는 내 것을 찾아 허덕이던 어느 순간 깨달았다.

결국 나, 가족, 사회 차례대로 그려진 이 인생의 나이테를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어느 하나 딱 끝나고 다음 스테이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 안에 모든 문제와 함께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 말이다.


지금 이 순간만이 유의미하다.

그러니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을 온전하게 느끼면서 사는 것만이 살아있는 삶일 것이다.

모두 각자의 별이지만, 우리는 모두 우주 속의 같은 '별'이라는 점에서 함께 존재한다.

특히, 엄마로서 고민과 외로울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많이 힘들다 보니 엄마들의 삶에 관심이 많다. 내 어려웠던 시절이 엄마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것만큼의 보람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큰 아이 5살이었을 때 그 밑으로 줄줄이 4세, 3세 8개월 아이를 재워놓고 매일 밤 미치기 일보 직전인 나를 붙들고 울면서 매달린 '존재'에 대한 처절한 고민이 분명 쓰임이 있을 거라 믿는다. 딱히 눈에 보이는 쓸모는 아니더라도 위로라도 되고 싶다. 지금도 이 순간도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의 존재감에 힘들어하는 엄마들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날들을 현명하게 버티다 보면 진짜 벗어날 날이 오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날이 온다고 내 경험에서 비롯된 생생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잔소리꾼이 되려 나보다. 육아 선배들이 책으로 전하는 위로로 그 터널을 지나왔고 지나고 나니 결국 같은 말을 하게 되니 말이다.



여전히 육아는 고민이다.

지금도 5년 전의 그날도 다름이 없다. 다만 힘듦은 같지만, 그 무게감과 결이 다르다.

그 당시엔 정말 내일 당장 생명을 끊어내도 될 만큼 고통으로 똘똘 뭉쳐진 삶의 무게였다. 당장 이 애들을 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것을 혼자 다 해내지 않으면, 세상 누구도 함께 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없고 내 고충을 나눠줄 수 없다는 지독한 고립감이다. 이건 친정엄마의 찬스가 있어도, 집안에 도우미 이모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저 엄마니까 가슴에 품은 납덩이다. 납덩이의 무게가 어느 날은 운 좋게 행복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무슨 짓을 해도 여전히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나만의 무게다. 신이 바빠 대신 보냈다는 지상의 엄마들, 아무도 대신 가져갈 수 없는 왕좌의 무게를 지닌 엄마의 영역이니 그만큼 엄마라는 이름이 위대하다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매일 육아의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뭐가 달라진 걸까? 1대 4의 일방적으로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고립감에서 벗어났다. 지금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시끌벅적 정신없긴 해도 고립 육아에서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육아로 바뀌는 날이 왔다. 나의 힘듦을 가장 크게 부각했던 고립감은 훅 덜어졌다. 하루를 견뎌야 하는 고통이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행복한 고민으로 바뀌는 시점이 온 다는 것 믿고 지금을 현명하게 버티자.




나는 그 현명함 들을 양질의 책에서 대부분 건져내었다. 이웃 엄마도 모른다, 내 친정엄마의 것도 정답이 아니다. 내가 큐레이터가 되어 나와 내 아이에 맞는 육아와 라이프스타일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읽고 나만의 언어로 기록해 두면 거친 육아의 결은 한없이 보드라워진다. 힘든 시간을 책과 글쓰기로 현명하게 버텨야 그 행복은 더 크게 결실을 이루는 것이다. 한 발짝 먼저 선 경험으로 엄마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때가 분명히 온다. 나도 막연하지만 믿고 그날만을 바라고 그 눈물이 쏙 빠지는 시기를 현명하게 버텨왔기에 마침내 오늘을 만난 것이다. 누구의 세월도 더 느리게 가거나 빠르지 않다. 인생은 그런 면에서 공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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