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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다.

새벽이 준 선물 인생의 참맛.

by 스텔라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다.

취향 까다로운 아들이 매일 사랑고백을 해댄다. 아들한테 사랑고백 들었다고 그걸로 내가 괜찮은 사람이기엔 근거가 약한가? 아이가 곱하기 넷이다. 나름 큰 뜻을 품고 네 명의 아이를 생명을 품어 이 세상에 내어놓았다.

그리고 글로벌 인재를 목표로 잘 키워가고 있다. 솔직히, 이건 희망사항일 뿐 지금의 현실은 아니다.

3학년 2학기가 끝나가는 큰딸이 아직 한글을 완벽히 못 떼고 있는 듯 하고 2학년 아들은 오늘 아침에도 알림장에 못다 한 숙제를 신발장에서 하다 말고 엄마의 꽥 소리에 쫓기듯이 겨우 학교에 갔다.


그럼 이건 어때?? 애가 넷이다. 그것도 연연 연생에 하나 더. 성비까지 둘둘 딱 어떤가? 또 쪽수로 민다. 안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것은 내 마음은 아는 사실이다. 내 외부적인 조건이 나를 채우기엔 너무나 현실이 남루하다. 얼마나 얘깃거리가 없으면 애 넷 낳은 거 그것만 얘기하나 사 남매를 완전히 떼어놓은 나만을 바라보다가 다시 초라해지면 아이들을 앞세워 본다.


온갖 똑똑한 척 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헛똑똑이가 이런 헛똑똑이가 없다. 바보를 넘어서 천치에 가깝다. 게다가 돈 버는 재주도 없다. 작년에 뭐 좀 해보겠다고 창업을 했다가 쑥 말아먹었고, 부동산 투자도 손해가 이만저만이다. 내가 이렇게 생활력이 없는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생각해보면 나름 두세 번의 직장생활도 했고 대학시절 강사 노릇으로 내 생활비 다 벌고 부모님 용돈까지 드릴만큼 생활력이 있었던 나인데 결혼 이후 경제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해진 나. 경제력을 읽어서 일까? 자아를 다 못 찾아서 일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까? 나는 항상 헤맨다.



새벽에 책 읽고 글 쭉쭉 써지면 세상 바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처럼 충만하다. 새벽의 달콤한 시간이 끝나고 낮시간은 현실이다. 갑자기 예상에 없던 셋째 치과 진료비라는 현실과 마주한다. 두 달 전에 사준 운동화가 작아서 발가락이 아프다는 둘째의 말을 애써 외면한 것과 함께 돈 걱정이 앞선다.

내가 지금 하는 이 일로 돈이라는 걸 과연 벌 수 있을까? 새벽 내내 글 코치라 칭송받으며 그 충만했던 자존감 온데간데없이 쭈글이가 되는 나다. 진짜 원인이 어디 있는 걸까?

방황하던 저번 주 잠시 내 글을 팔아 돈이 되는 일에 마음이 갔었다가.. 이내 이렇게 자잘한 건 내가 아닌 것 같아 거두어들였다. 그게 이내 후회가 된다. 후회해야 하나? 현실에 나를 맞추어야 하나?

오늘 새벽에 다시 알게 됐다. 정답은 내 행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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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로 마음을 내리치듯 어떤 묵직한 것이 쿵 심연으로 떨어진다. 그러면서 알게 됐다.

난 나 자신을 믿는다고 여겼는데, 제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마치 공부를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하지' 하고 큰 소리 빵빵 치는 학생이 막상 공부를 열심히 해도

역시 못하는 결과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처럼.

나는 어느새 긴 인생의 목표를 마련해놓고 그것도 첫 목표를 '천일이나'세워놓고 고작 반년 실천하고 괴로워하는 꼴이라니, 한편으로 이 시점에 알게 되어 다행이다. 그 꼴을 제대로 마주하고 나니 오히려 괴로움에서 벗어나 진다. 그러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사실 난 썩 괜찮은 사람이다.

그 진짜 근거는 내가 지금 서있는 꿈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난 끝까지 해낼 것이라는 내 안에 믿음.

그 믿음만을 화두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내 미래에 대한 어렴풋하지만 단단한 확신 때문이다.

누구보다 진실한 꿈이 크게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자신은 안다.

김미경 선생님 강의에서 흘려듣게 된 미국 투어 강연에서 만난 '탈북자 남자아이'에 이야기에 진한 연민, 엄마 마음이 올라오면서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이 오늘 새벽 글쓰기를 중에 다시 보였다. 그냥 지치고 고단한 내 일상을 그 이야기에 기대 울고 싶었던 거라 해도 상관없다.

새벽에 글 쓰다가 갑자기 인생의 쓴 만 짠맛이 그리고 단맛이 다 느껴져서 그게 눈물로 표현이 되는 경험은, 내가 진짜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현재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나는 엄마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이 안에 가득 차 있고 공자님 말씀에 따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중 수신, 제고를 위해 20년을 살았다. 이제는 불혹의 나이 마흔을 찍고 나서 새로 시작한 2020 새로운 1살부터는 본격 꿈의 나이 1살인 것이다. 근데 내가 생각해도 꿈이 참 멋있다. 엄마를 돕는 엄마이며 작가가 사랑하는 작가다.

여태 했던 건물주의 꿈이나 그냥 베스트셀러 작가의 꿈은 하나하나가 도구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꾸려온 그 차체가 인생이고 사람은 모두 선자리 그대로 아름다운 게 인생이고, 그걸 글쓰기를 통해 전하는 길을 가야겠다는 것. 그게 내 꿈이다.

그런데 그런 멋진 꿈을 꾸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제 막 기기 시작한 꿈 나이 한 살 주제에 기는 것에 충만한 하루여도 모자랄 판에 걷고, 뛰는 오빠 언니를 부러워하고 있는 모양새였으니 그 조급함을 바라보며 혀를 차다가 이내 내 머리를 쓰담 쓰담하며 나를 칭찬한다.

조급하다는 것은 이루고 싶은 게 많은 것에 다름 아니고, 조급함과의 싸움에서 이겨 낼 수만 있다면 확신이 있는 곳으로 향해있는 모든 것은 아름다운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나를 위로해 줄 수 있게 됐다. 새벽 글빨로 중년의 엄마는 제법 잘 크고 있다.


꿈을 찾아낸 눈도 아름답고, 그곳을 향해 가겠다고 낸 나의 마음도 거룩하며

그곳을 향해 더디지만 한발 한발 가고 있는 나의 새벽은 찬란했다.


비록 어떤 이유로, 갈 곳을 잃어서, 혹은 그냥 가기 싫어서 잠시 서 있거나 되려 몇 보 후퇴하더라도 그 방향에 서 있는 내가 아름답다는 것을 이토록 절절히 느낀 새벽이 없다. 이 새벽은 누구 덕분인가?

우주에 오로지 나밖에 없는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글벗주는 부새습 모임 덕분이다. 내가 투척할 글감을 기다리며 졸린 눈을 비비고 새벽잠을 깨우고 있을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나의 그들 덕이다.

그 글벗들을 만난 것은? 바로 내 덕분이다. 내가 지난 반년 동안 새벽 기상 루틴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나는 내 덕분에 이 선물을 감사히 받으며, 이날 내가 받은 이 영감과 감동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면서 내 앞날들을 하나하나 누려갈 것이다.

이 출산 절벽 시대에 용감무쌍하게 네 아이의 엄마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 안에서 그 모진 세월 견뎌냈고. 그 내공을 갈고닦아 세상을 발칵 뒤집을 수는 없더라도 내 주위의 엄마들의 마음에 잔잔한 용기를 얹어주고 싶다.

할까, 말까 망설이는 마음에 할 수 있다고 가만히 손을 잡아주고 싶다. 슬그머니 손을 놓더라도 다시 잡을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주며 한발짝 물러나 조용히 침묵하고 싶다. 엄마라는 그 복잡하고 유기적인 세상 최고의 직업군을 잘 수행해내고 있는 그들을 향한 나의 작은 존중의 표현이다. 같은 마음으로 때론 강하게 잔소리를 하고도 싶다. 출산하거나 출간하거나 둘 중에 하나는 하라고 쫑알대고 싶다.





15년 뒤에 나 55세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아마 잘했다. 잘하고 있다. 수고했다. 앞으로도 어떤 일이 있어도 쭉 가기만 하면 된다. 내가 너 이런 모습으로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며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겠지?

그날을 생각하면 나의 조급함과의 싸움에 전의가 살아난다. 오늘 이 찬란한 새벽을 또 접으며, 일상의 엄마로 현실 악다구니로 통장잔고에 한숨섞인 수셈으로 살아갈 나이지만, 오늘 만큼은 어떤 장애물도 가볍게 넘길 의기 충전한 날이다. 이 마음을 같이 나눌 사람들이 있어 더 행복한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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