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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피형아 Mar 18. 2021

#11. 바다 누나의 실신 & 8.19

11화. 바다 누나의 실신 & 8.19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이전 이야기들을 먼저 보시면 새천년 감성을 더욱 즐길 수 있읍니다.



https://brunch.co.kr/@forsea5999/10

10화 <S.E.S.의 생수병>


https://brunch.co.kr/@forsea5999/1

1화 <1997년 11월 28일>







11화.



2001년 여름, 그때까지만 해도 분당은 그렇게 크지도, 넓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에서 공연을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분당을 홍보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쨌든 나를 포함한 우리 <요정 베이커리>는 그 먼 분당까지 (지금도 분당이었는지, 성남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왠지 분당의 느낌이 더 많이 난다) 달려갔다. S.E.S. 를 덕질하면서 이때가 가장 최고의 전성기였다. 나의 열일곱도 전성기였고 <요정 베이커리> 또한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분당은 거리가 짧다고 할 수 없는 곳인데 2001년에는 더더욱 멀게만 느껴진 곳이었다. 도대체 어떤 교통수단으로 그 먼 분당까지 덕질을 하러 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다. 라디오 공개방송이었는지, 엠넷 <쇼킹 엠> 야외 공연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생각보다 무대 크기가 작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야외 공연이었기 때문에 각 가수들의 팬클럽만 있던 게 아니라 그곳 주민들도 많이 있었다. 거리가 워낙 멀었고 그때는 지금처럼 분당까지 편하게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크게 없었을 때라 그랬는지 S.E.S. 팬들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우리 <요정 베이커리>에서도 다른 공방 때와는 달리 10명 정도밖에 가지 못한 공연이었으니까. 얼마 뒤, 드디어 누나들의 무대가 시작되었고 누나들은 '꿈을 모아서'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에 맞춰 목이 터져라 응원법을 외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바다 누나가 무대에서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처음에는 퍼포먼스인 줄 알았고 장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내 곧 심각한 상황인 것을 인지한 뒤에 우리끼리는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그날의 기억은 팬의 입장에서는 사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중 하나다. 바다 누나가 실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무대에 올라 녹화를 마치긴 했는데 보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사실 응원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법도 한데 우리는 더 이를 악물고 응원했다. 평소보다 더 크게 말이다.


유진 누나 인스타그램 (2016)

나의 열일곱을 포함한 나의 학창 시절은 참 파란만장했다. S.E.S. 덕질은 내 학창 시절의 일부가 아니라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이나 거대한 퍼즐이 내 머릿속과 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누나들의 불같은 S.E.S. 활동만큼, 우리들 역시 누나들과 함께 했다. 누나들이 있는 곳엔 언제나 그랬듯 우리들이 있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나와 <요정 베이커리>는 말도 못 할 정도로 큰 상처들을 껴안고 살았었다. 단지 혼자서는 공방을 뛸 자신이 없어서 <요정 베이커리>라는 S.E.S. 공방파를 최초로 만들었고 그것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이나 규모가 커졌던 게 나를, 그리고 우리를 항상 아프게 만들었다. 1,2편에서도 언급했지만 S.E.S. 팬덤 내에는 공방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공방을 뛰어도 각자 뛰는 게 전부였고 어떠한 스케줄을 가도 S.E.S. 팬클럽은 20명을 웃도는데 멈췄다. 핑클과 거의 4,5배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랬던 S.E.S. 팬덤 내에서 내가 <요정 베이커리>라는 공방파를 최초로 개설했고 최고의 정점을 찍었을 때의 카페 회원수는 7천 명을 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 결과 S.E.S. 는 4집 때부터 현장을 뛰는 공방 팬들, 즉 오프라인을 뛰어 덕질을 하는 팬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20명이 오면 10명은 <요정 베이커리>였고 나머지 열명은 각각의 팬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누나들의 첫여름 활동이던 4.5집 '꿈을 모아서' 때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S.E.S. 에게도, 우리 <요정 베이커리>에게도 가장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 사이 <요정 베이커리>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성장하느라 바빴고 팬덤 내에서도 우리 <요베>와 같은 다른 '파'들이 많아졌으니까. 항상 <음캠>이나 <뮤뱅> 같은 현장에 20명에서 30명 정도에 웃돌던 S.E.S. 팬들의 숫자도 그만큼 꽤 많아진 게 사실이다. 평균 40~50명, 많을 때는 거의 100명이 올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거짓말도 아니고 부풀리는 것도 아니고 <요정 베이커리>와 비슷한 규모를 가진 '파'들이 전혀 없었다. 현장에 워낙 많은 팬들을 데리고 다니던 곳도 <요베> 뿐이었으니까. 오죽하면 공식 팬클럽 <친구>의 전국 회장인 미윤 누나가 <요베>의 시샵이던 내 전화번호를 가져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친구>의 공식 임원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미윤 누나를 비롯해서 상철이 형, 화정이 누나 등등하고도 꽤나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 S.E.S. 팬사이트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이슈'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요베>를 험담하는 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임원들하고 친해서 우리가 그만큼 혜택을 많이 받는다는 등, 요베 회원이면 티켓이 없어도 입장이 가능하다는 등, 신입 회원에게는 눈길 조차 주지 않고 우리끼리만 시시덕거리기에 바쁘다는 등등 잊지도 않은 글들이 마치 감염처럼 퍼져 나갔다. 그저 열심히 한 것 밖에 없었다. 다른 '파'하고도 친하게 지냈고 특히 ‘에.로.파'(에스이에스 로드 매니저)의 시샵 '도발 바다'는 <요정 베이커리> 최초의 부시샵 출신인 만큼 나하고도 굉장히 잘 지냈다. 당연히 임원들도 나와 <요정 베이커리>를 좋아해 주기는 했다. 처음엔 임원들에게 미움도 받았지만 점점 커지면서 사랑도, 인정도 받았던 게 사실이다. 정말 열심히 한 것 밖에는 없다. 전국 회장 미윤 누나에게 인정을 받는 게 가장 첫 번째 목표였고 그다음 목표는 누나들에게 인정받는 것이었는데 그만큼 나, 우리는 열심히 한 것 밖에 없었다. 4집 컴백부터 해체하는 날까지 단 한 개의 스케줄도 빠지지 않고 전부 다녔다. 서울은 기본, 분당이나 수원, 인천, 안산, 용인도 마다하지 않고 전부 다녔다. 심지어 5집 때 대구에서 했던 게릴라 콘서트까지 다녔으니까.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시기와 질투도 생겨나기 마련이란 걸 열일곱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다. 직접 공방 현장에서는 그런 일이 없는데 인터넷을 켜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이었다. 그저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른들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사건 사고만큼이나 쑥대밭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당시 부시샵이던 '새벽하늘' 누나가 <입장문>이라고 해서 전체 메일까지 돌리는 일이 있었으니까.


Club H.O.T.

2001년 8월이었나? 대형 콘서트 스케줄이 잡혔다. 이름하여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8.19(팔일구). 2001년 8월 19일 날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렸던 대형 콘서트였다. 분명한 건 드림 콘서트는 아니었고 환경 콘서트였는지 팅 콘서트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린 대형 콘서트인 건 맞다. H.O.T. 가 해체 후 강타 형이 솔로로 서는 공연이었고 여기에 신화, S.E.S. 까지 출연 확정이라는 기사를 접했다. 이때 정말 눈에 불을 켰던 것 같다. 다른 공방 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큰 공연이었고 잠실 주경기장 입성이라는 건 우리 <요정 베이커리>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카페에 공지를 올렸고 최대한 많은 회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날 아마도 <요정 베이커리>에서만 50명 정도는 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얼마 뒤, SM 가수들이 일본 스케줄로 인해 참석이 불가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며칠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말이다. 스케줄이 취소되었으니 우리도 가지 않을 법도 한데 인터넷에서는 웬일인지 다 가자는 분위기였다. Club K.I.T.(Club KangTa In H.O.T.) 측에서는 그럼에도 8월 19일 날 잠실로 가서 3층을 채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H.O.T. 와 S.E.S., 신화까지는 상당한 소속감은 물론이고, 팬클럽끼리도 유대감이 깊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S.E.S. 팬들도 참석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그때 생각보다 많은 팬들이 왔던 걸로 기억한다. 2001년 8월 19일, 굉장히 맑은 날씨였다. 한참 더웠을 시기일 텐데 역시나 내 기억엔 청량하기 그지없는 여름이었다. 그때도 역시나 새로 나오는 신입 회원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까꿍 유진'이다. 나와 동갑이었던 '까꿍 유진'은 그 날 이후로 <요정 베이커리>의 새로운 부시샵이 되었고 나중엔 유진 누나의 개인 공식 팬클럽 <파이시즈> 서울 회장까지 되는 쾌거(?)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날도 역시나 우리는 보라색 단체복(정확히 4.5집 때까지의 단체복 색깔은 연보라색이었다)과 풍선을 들고 잠실 주경기장의 분위기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주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S.E.S. 팬석에 앉았는데 역시 3층을 올려다보고는 엄지를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Club H.O.T.

다른 가수들이 많이 나오는 대형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층에는 Club K.I.T. 의 하얀 풍선들밖에 없었기 때문. 즉 H.O.T. 팬들만 앉아 있었고 강타 형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당시 3층을 채운 하얀 풍선들의 규모는 내 기억으로 약 7,8칸은 채웠던 것 같다. 사실 우리도 3층에 앉고 싶었는데 그때 당시 잠실 주경기장의 3층에 앉는다는 건 곧 권력을 의미하는 것과 똑같았다. H.O.T. 가 해체하기 전까지 잠실 주경기장의 3층은 Club H.O.T. 뿐만 앉을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신화창조>나 <Fan god>, 그리고 우리도 H.O.T. 가 해체하고 나서야 3층에 앉을 수 있었으니까. 무대에서 가장 먼 3층에 앉으면 가수들의 모습이 당연히 개미 크기로 보일 텐데 왜 3층은 권력의 자리였던 걸까? 잠실 주경기장은 1층, 2층, 3층으로 되어 있다. 1층 좌석이 제일 적고 그다음이 2층이다. 그리고 마지막 3층은 굉장히 크고 넓다. 여기에 3층은 뻥 뚫려 있어서 잠실 주경기장의 분위기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특권(?)이 있었고 무대에서 가수가 관중석을 바라볼 때도 역시나 3층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잠실 주경기장의 3층은 아무 팬클럽이나 앉을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었다.


"3층에 앉아 계신 우리 H.O.T. 팬분들 한 번만 풍선 흔들어 주시겠어요?"


라고 누군가 마이크를 통해 얘기했고 그 순간 3층에 앉아 있던 수많은 H.O.T. 팬들은 엄청난 환호와 함께 하얀 풍선을 격렬히 흔들기 시작했다. 하나 더 재밌었던 건 공연 녹화가 시작되기 전에 주최 측에서 H.O.T. 의 'Outside Castle'을 틀어주기도 했었다. 내게는 정말 오랜만에 눈앞에서 보는 H.O.T. 팬클럽의 위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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