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나는 왜 그렇게도 여행을 사랑했을까. 첫 여행지였던 런던에서의 기억이 선명했기 때문일까. 실패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따라다니는 첫 여행지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행복을 얻어냈기에 더 선명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가장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여행을 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해서 작은 일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폴짝거리던 여행. 고정돼 있던 샤워기 헤드에도 불평 없이 씻을 수 있음에 감사했던 욕실, 머리숱이 많다며 청혼하던 빈 또라이, 홀로 서 있던 어두워진 밤거리마저도 기억에 담아두고 싶었던 그날 밤,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행복하다'를 연신 외치던 밤. 다시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그때의 나처럼 여행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문득, 오래전 그 첫날밤이 그립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여행지를 정할 때부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었다. 가보고 싶은 곳은 넘치는데, 시간은 한정적인 상황이 매번 아쉬웠다. 겨우겨우 여행지를 정하고 나면, 항공권을 발권할 때 다시 스트레스가 시작된다. 분 단위로 변경되는 가격, 내가 구매한 금액보다 1원이라도 저렴해지면 억울했다. 자꾸만 결제 승인이 거절되는 카드 때문에 발권에 애를 먹고 한화 결제에 붙은 수수료를 보며 배신감까지 들었다. 숙소는 또 어디로 골라야 하는 건지. 스트레스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나 고생 끝에 티켓이 발권됐을 때의 설렘, 메일함에 예매 내역이 수신됐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티켓만 받았을 뿐인데 이미 나는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이처럼 여행을 계획하는 일은 내가 의도한 스트레스였다. 복잡하고 답답한 일상에서 유일하게 기꺼이 받아들이는 스트레스. 그것이 여행으로부터 왔다는 생각은 언제나 묘한 안도감을 가져다주곤 했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단순한 생활이 좋았다. 좋은 동행을 만나면 웃고, 나와 맞지 않는 동행을 만나면 안녕을 고하고 내 갈 길을 갔다. 미디어에서만 볼 수 있던 랜드마크들을 보며 감동하고 가끔은 잘못 들어선 길에서 만난 인연이 소중한 벗이 되기도 하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행위들이 좋았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현실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종종 행복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나를 또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돼 주리라 믿었으니까.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여행지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옷이 그게 뭐냐.'라며 엄마에게 등짝을 맞을 일도 없고, '체면을 차려라.'라며 나를 감출 필요도 없다. 내 이름도, 직업도, 나이도 모르는 곳. 여행하는 동안 행복은 내가 선택한다.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매 순간 새로움이었다. 삶에 즐거움이 있다면 이곳이라고 알려주는 표지판 같았다. 소비만 하니 즐거울 수밖에. 한국에서도 여행하듯이 살아가면 행복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행은 나를 성장하게 했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시도할 때는 두려움으로 주저하는 대신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말지.' 하는 마음으로 도전하게 했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그 속에서 발견한 것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도전한 인생만 있을 뿐 실패한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결국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 힘들고 고된 여정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특별해진다고 믿는다.
여행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자들은 안다. 큰 것을 얻으려 하면 뭔가를 잃어버려 의도치 않게 비움을 경험하고, 비우고 가면 생각하지 못한 것들로 채우고 돌아오는 것이 여행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자꾸만 여행을 떠난다. 비우고 싶은 무언가가 뭔지 몰라서 떠나고, 무언가를 채우고 싶어서 떠난다.
하루만 더 머물고 싶던 여행도 있었고,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던 여행도 있었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몇 번이나 볼을 꼬집으며 잠시 현실을 잊었던 여행이 있던 반면, 여행지에서 마주친 현지인들의 일상에 오히려 나의 현실이 그리워진 여행도 있었다. 온도도 습도도 모두 달랐지만, 그 모든 여행의 끝에는 그리운 나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로인 침대.
물기가 바짝 마른 욕실.
창틀의 먼지.
매일 앉아 밥을 먹던 식탁.
모든 것이 그대로이기에 모든 것이 익숙하다. 집에 돌아온 것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한다. 검은 빨래와 흰 빨래를 구분하며 세탁기 안에 여행지의 냄새가 담긴 빨랫감을 잔뜩 넣는다. 비행기 탑승 전 샤워를 했지만, 어딘가 찝찝함에 다시 한번 샤워한다. 분리된 샤워기, 딱 적당한 수압, 익숙한 샴푸와 바디워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순간 속에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익숙한 일상에 잘 도착했음에 감사하며 비로소 여행이 끝났음을 실감한다. 모든 것들이 낯설지 않아서, 모든 것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주어 감사했다. 여행의 완성은 잘 돌아오는 것임을, 일상을 잘 만나는 것임을 느낀다. 그렇게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켜주는 일상이 있으니 나는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언젠가 일상으로 돌아올 당신의 여행도 행복하기를. 카르페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