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미국
전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 뉴욕은 런던 다음으로 내가 꿈꿔온 도시였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타임스퀘어, 브로드웨이 그리고 전 세계의 금융 허브 월스트리트까지. 처음 여행을 떠날 때처럼 잔뜩 기대하는 마음을 품은 채 JFK 공항에 도착했고, 까다로운 입국 심사를 마친 후 공항을 빠져나왔다.
뉴욕에 머무는 기간은 열흘. 크리스마스와 1월 1일이 포함된 일정이다. 크리스마스 마을, 다이커 하이츠가 궁금했고, 뉴욕에서 맞이하는 새해 카운트다운이 버킷리스트였다. 크리스마스이브 전에 도착한 뉴욕 날씨는 겨울이었음에도 춥지 않았다. 가장 처음 방문한 곳은 타임스퀘어. 많은 전광판이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패션위크 주간도 아닌데 패셔니스타들이 다 모인 듯하다.
타임스퀘어의 현란한 불빛 때문에 어둠이 찾아온 줄도 모른 채 시간을 보내던 중 한국에서부터 예약해 둔 재즈바를 찾았다. 평소에 재즈를 즐겨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여행할 때만큼은 평소와 다른 모습의 나를 발견하는 묘미가 있다. 크리스마스 주간답게 재즈바 직원들은 모두 산타 모자를 쓰고 있었고, 이곳에서 저녁도 해결할 겸 버거와 감자튀김을 주문하고 재즈바 공연을 감상했다. 편곡한 캐럴들을 메들리로 부르며 식사하는 관객들의 흥을 돋운다.
재즈바 꽤 재밌는 곳이잖아?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자 미리 구한 동행들과 함께했다. 혼자 여행이 편하지만, 어쩐지 뉴욕에서 크리스마스는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던 까닭도 있었고, 무엇보다 가고 싶었던 레스토랑에서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1인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하여 동행을 구했다.
이브까지는 따뜻했던 날씨가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자 거짓말같이 추워졌다.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는데,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날씨다. 쨍쨍한 햇빛, 맑은 하늘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풍이다. 브루클린으로 넘어가 강변을 산책하고, 덤보에서 인증사진도 잊지 않는다.
뉴욕 3대 스테이크 중의 하나인 벤자민 스테이크에서 크리스마스 메뉴를 주문한다. 티본스테이크와 에그녹(eggnog)이다. 에그녹은 진하고 달콤한 우유에 달걀흰자와 향신료를 섞은 미국의 성탄절 시즌 음료다. 에그녹의 첫입은 달콤함이었다. 웨이터가 달걀이 들어갔다고 설명해 줬지만, 달걀 비린내가 나지 않고 고소함만 있었던 에그녹. 뉴욕에서 먹은 많은 것 중에서 매그놀리아의 바나나 푸딩 다음으로 맛있었던 에그녹이다.
브루클린의 다이커 하이츠 마을. 일명 크리스마스 마을이다. 본인의 집을 반짝거리는 불빛으로 장식하여 마을 전체가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곳. 전문가까지 고용해서 수천만 원을 쏟아부으면서 경쟁처럼 크리스마스 장식에 진심인 마을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꾸미는 데 1등을 한 집에는 1년 동안 전기세가 무료라고 하는데, 수천만 원을 쏟아부을 바에는 1년 전기세를 내는 게 더 싸게 먹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을의 경쟁 덕분에 뉴욕을 여행하는 겨울 여행자들은 볼거리가 하나 추가되니 오히려 좋다. 타임스퀘어와는 다른 반짝거림, 동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다. 예쁘게 잘 꾸며둔 집 주변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이날 하루를 위해 소품들을 집에 보관해 뒀을 생각을 하니 귀엽다는 생각까지 든다. 노부부가 사는 집이라면 크리스마스의 동심을 위해 낭만을 잃지 않은 모습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가족과 함께 조용히 보내야 하는 크리스마스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우리 집을 사진 찍고 마을 전체를 시끄럽게 한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진 않은데, 다이커 하이츠 마을 사람들의 넉넉함이 엿보인다.
뉴욕의 거대한 트리, 록펠러의 크리스마스트리도 빼놓을 수 없다. 8km가 넘는 길이의 전등과 꼭대기의 별로 장식된 트리와 사진을 찍으려면 먼발치에서 찍어야 꼭대기까지 사진에 담을 수 있다. 록펠러 센터를 떠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스링크다. 아이들 위주로 스케이트를 탈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른들도 꽤 많이 보였다. 아직 동심을 잃지 않고, 크리스마스를 온전히 즐기고자 하는 마음. 이 순간만큼은 우리 모두 산타할아버지를 믿는 어린아이다. 브라이언파크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까지 구경하고 나니 어느덧 자정이 됐다. 다행스럽게도 뉴욕의 메트로는 24시간 운행되기 때문에 호스텔로 돌아가는 데는 문제 없다.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추워진 뉴욕의 날씨는 점점 더 영하권으로 떨어지더니 볼드랍 행사가 예정된 12월 31일에는 체감온도 영하 40도까지 떨어졌다. 160년 만에 미 동부에 한파가 찾아온 것이다. 브라이언파크의 분수는 꽁꽁 얼어버렸고,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볼드랍 행사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된다. 뉴욕에서 가장 큰 행사인 만큼 경찰이 동원되고, 온 세상 사람들이 타임스퀘어로 몰려든다. 한번 펜스 밖으로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기에 화장실도 갈 수 없다. 노상 방뇨하면 경찰이 그 자리에서 잡아가기 때문에 성인용 기저귀도 필수다. 아침부터 마른 목도 참아가며 버킷리스트를 위해 추위와 맞서 싸웠다. 배가 고플 것을 대비해 간단한 간식거리도 챙겨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인파 속에 있으니, 사람의 온기로 추위가 사그라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천만의 말씀. 사람이 몰려들어도 추운 영하의 날씨. 진짜 미국인들도 날씨 앱을 보더니 이런 온도는 처음 본다고 했다. 여의도의 빌딩풍에 적응한 줄 알았지만, 뉴욕의 추위는 가히 여의도를 뛰어넘을만한 추위였다. 손끝, 발끝 감각이 사라지고 10개나 챙긴 핫팩도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을 무렵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덧 밤 11시를 넘겼다. 몇 분만 더 기다리면 뉴욕에서 새해를 맞이한다.
11시 59분부터 전광판이 변한다. 60초 카운트다운 시작과 동시에 볼이 내려온다. 10초가 남으면 모두가 함께 외친다.
10, 9, 8... 3, 2, 1, 0
Happy new year!!!
불꽃놀이와 엄청난 조명들 사이로 색종이들이 떨어지고 사람들의 환호가 가득 찬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뉴욕에서 맞이하는 새해라니. 모두가 처음 만난 사이지만, 웃으면서 새해 인사를 건네고 포옹한다. 이제야 온기가 들어서는 것 같다. 비록 동상에 걸렸지만, 13시간을 기다린 보람이 있다. 불꽃이 터질 때 그 환호성을 잊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유난히도 힘들었던 한 해였기에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지만, 입은 분명하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나의 버킷리스트가 하나 지워졌다.
볼드랍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카운트다운이 종료되자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각자 이후의 시간이 있겠지. 펜스를 치우니 사람들이 일제히 빠져나간다. 경찰들의 통제 덕분인지 질서는 유지된다. 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은 타임스퀘어가 조용하다. 색종이들이 거리 곳곳에 널브러져 있고, 네온사인만 반짝거린다. 추위로 빨개진 딸기코와 얼어버린 발을 종종거리며 호스텔로 향해본다.
타임스퀘어에서 호스텔까지 메트로 한 정거장, 도보로 10분 거리였지만 굳이 메트로를 고집했다.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조차 잊을 만큼 삭막한 역사 안을 흥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었고, 기타 하나를 아무렇게나 매고 노래를 부르며 역사 안을 음률로 가득 채워준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 안에서 한참 동안 누군가의 연주를, 춤을, 노래를, 인생을 보려고 기꺼이 메트로 비용을 지불했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 잠시 멈춰 누군가의 노래에 집중했던 여유가 그립다. 그들의 목소리와 흥이 곧 나의 여행이었는데 여전히 그들은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있을까? 아니면 그들도 나처럼 그때의 그날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때 찬란하게 빛났던 그 시절, 언젠가 다시 역사 안에서 춤추고 노래할 날을 기다리며.
번외) 뉴욕에서 생긴 일
무슨 배짱인지 뉴욕에서 예쁜 사진을 찍겠노라 결심한 나는 패딩을 챙겨 오지 않았다. 코트로 버티다가 급히 매장에서 패딩을 하나 구매했고, 가져온 목도리로 꽁꽁 싸매보지만 역부족이다. 길을 걷다 보니 눈알만 뚫려있는 모자를 발견한다. 이 모자를 쓰면 따뜻할 것 같지만 어쩐지 공항 도둑으로 오해받을 만한 모자라서 구매가 망설여지는 찰나, 쓰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혹시 지금 쓰고 있는 모자 따뜻해? 얼굴까지 다 덮여있으니까 바람은 안 들어갈 것 같은데, 따뜻하면 나도 사려고."
"눈알이 엄청 시려서 자꾸 눈물이 나와."
웃기고 슬픈 대화다. 한 사람은 추워서 공항 도둑으로 오해받더라도 구매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이미 구매한 사람의 눈알이 시리다는 대답을 듣고 구매를 포기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손을 호호 불며 빨개진 볼과 귀로 호스텔에 들어오는데 로비에서 리셉션 직원이 나를 부른다.
"안 추워?"
"너무 추워."
"귀마개도 없어?"
"응, 목도리가 전부야."
"그럴 것 같아서 널 위해 준비했어."
사람 얼굴만 한 귀마개를 내게 건넨다. 매일 밤 빨개진 볼과 귀를 하고 손을 호호 불며 들어오는 동양인 여자애가 불쌍했는지 리셉션 직원이 귀마개를 선물해 줬다. 크기가 큰 덕분에 정말 따뜻했고, 베풀어준 호의 덕분에 뉴욕에 머무는 내내 따뜻한 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