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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만에 만나는 유럽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by 우연

블라디보스토크는 인천에서 비행기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이었다. 왜 과거형이냐고? 이제는 멀어진 블라디보스토크이기 때문이다.


2022년 2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과 러시아 간의 하늘길은 막혀버렸다. 현재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려면 동해항에서 출발하는 배를 이용하거나 몽골, 우즈베키스탄 등을 우회해서 가야 한다. 이 경우 항공권은 매우 비싸고, 배편 역시 100만 원이 넘으면서 편도로만 24시간이 꼬박 소요되기에 가까웠지만 멀어진 유럽이 됐다.


내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해는 2018년. 추석 연휴가 긴 것을 확인하고 1년 전 티켓팅을 해두었던 곳이었는데, 그 사이 예능 프로그램에 몇 번 나오더니 너무 유명해졌다. 나름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다 보니 출국 짐 정도는 전날 밤에 1시간이면 싸는 게 가능했다. 퇴근 후에 주섬주섬 짐을 싸고 있는데 엄마가 집에 들어오더니 묻는다.


"너 어디가?"

"응 나 내일 블라디보스토크 가."

"러시아? 내일? 며칠?"

"연휴 동안."


뒤이어 아빠가 말한다.


"러시아면 소련이잖아. 사회주의 나라를 왜 가."

"블라디보스토크는 2시간밖에 안 걸려, 거기는 킹크랩이 싸고, 곰새우가 맛있대."

"엄청 추울 텐데, 러시아는 진짜 춥다고 하잖아."

"모스크바는 추울 수 있는데 블라디보스토크는 그 정도는 아닐걸? 그리고 지금 9월이잖아."


출국 하루 전날 딸의 여행 일정을 알게 되는 부모님. 아빠에게는 그저 (구) 소련인 사회주의 국가일 뿐인데 킹크랩이랑 곰새우인지 뭔지를 먹으러 간다는 딸의 말에 기가 찬 듯하다.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한 채 도착한 블라디보스토크의 9월은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였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작은 도시였다. 러시아 극동지방에서는 하바롭스크 다음으로 큰 도시지만, 볼거리가 많은 도시는 절대 아니었다. 메인 스트리트로 불리는 아르바트 거리를 둘러보는 것은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바다로 이어져 있어 한 바퀴를 크게 돌아본 후 곰새우와 킹크랩을 파는 중국 시장으로 향했다. 왜 이름이 중국 시장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곰새우는 2kg, 킹크랩은 무게가 있던 터라 3kg을 구매해서 호스텔로 돌아왔다. 호스텔 로비에서 비닐장갑을 양손에 끼고 5kg을 혼자 야무지게 까먹었다. 찜기에 쪄먹으면 훨씬 고소하고 부드러웠겠지만, 호스텔에 별도로 키친이 마련돼 있지 않았기에 전자레인지에 돌려버렸다. 몸통은 짧지만, 굵은 곰새우는 한국에서 먹던 새우와는 다르게 크기가 커서 까는 맛이 있었다. 물론 씹는 맛도 일품이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렸음에도 질긴 맛은 없었다. 고소함과 쫀득함만 있을 뿐.


양질의 단백질로 배를 채우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작이자 종착역이기도 한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횡단 열차를 타면 모스크바까지 약 7박 8일이 소요되는 긴 여정이지만, 유럽 여행의 비용을 아낄 수도 있어 많은 배낭여행자의 꿈이 실현되는 기차이기도 하다.


기차 안에서만 보내는 7박 8일, 씻고 자는 것은 불편하겠지만 창밖으로 펼쳐지는 설경을 생각하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하루라도 젊을 때 타야 할 것 같은 청춘열차 느낌이다. 돈 없고 시간 많은 배낭여행자 신분일 때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존재를 알았다면 주저 없이 선택했겠지만, 당시 나는 횡단 열차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힘차게 걸어보는 발걸음.


해가 넘어갈 무렵 구글맵을 끄고 골목 구석구석을 걷다 보니 현지인이 가득한 카페가 보인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따뜻한 조명의 카페에 들어갔다. 긴 금발 머리의 주근깨가 빼곡한 사랑스러운 자매 두 명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카페의 좌석은 10석 남짓.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고,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 것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한국인은 철저하게 나뿐이었다.


역시나 들어가자마자 내게로 향하는 시선들. 마치 동양인은 처음 본 것 같은 눈빛이다. 다리가 길쭉한 러시아인들 사이에 내가 들어섰다. 카페인에 취약해 오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지만, 카페의 공기가 따뜻해 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라떼를 주문하자 나와 사랑스러운 눈 맞춤을 한 후 라떼를 준비한다. 라떼 아트는 하트모양으로 내가 반응하니 찡긋 웃는다. 따뜻한 라떼를 한 모금 하는데 바나나 하나를 잘라 내어 주며 사랑스럽게 말한다.


"for you."


한국에서도 흔하게 먹는 바나나일 뿐인데 언니들의 눈웃음에 홀려버렸다. 따뜻한 공기와 사랑스러운 눈 맞춤, 부드러운 라떼까지.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카페다. 구석구석 둘러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어 오히려 여유롭게 머물 수 있었던 공간 덕분에 추운 러시아의 날씨에도 블라디보스토크의 기억은 따뜻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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