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우한 폐렴이 발발한 후 전 세계가 팬데믹에 빠져버렸다. 팬데믹 이후 일상은 마비가 됐고, 하늘길은 꽁꽁 닫혀버렸다. 모두가 금방 일상으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되돌아오기까지는 약 3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늘길이 닫힌 3년간, 나는 우울증이 왔다. 많은 곳을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에 지쳐 답답할 때마다 짧게라도 비행기에 몸을 실었기에 해소할 수 있는 창구가 없다는 것에 답답했다. 지난 여행을 곱씹으며 매일을 버텨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우울증을 치료할 목적으로 여행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고, 랜선으로나마 보는 여행지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흘려보낸 3년. 하늘길이 열렸다.
하늘길이 열렸다는 소식에 알아본 것은 다름 아닌 여권 유효기간. 그 사이에 여권이 만료된 것이다. 여권 재발급을 신청한 후 항공권을 알아봤다. 첫 여행지는 싱가포르. 신혼여행이었다. 신혼여행지로 썩 사랑받는 나라는 아니었지만, 싱가포르로 결정하게 된 이유는 어이없게도 백신이었다.
당시 하늘길이 완벽하게 열린 것은 아니었기에 3차까지 백신을 접종해야 갈 수 있는 나라가 대부분이었는데, 나는 1차조차 맞지 않은 미접종자였다. 남편은 2차까지 맞았지만, 수일이 지나버려 미접종자로 분류돼 버린 기막힌 상황. 미접종자도 입국이 가능한 나라는 싱가포르와 태국, 몰디브, 유럽이었다. 유럽은 나와 남편 모두 각각 두 번씩 다녀온 터라 썩 내키지 않았고, 당시 우리는 휴양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몰디브는 제외했다. (무엇보다 몰디브는 비행시간이 너무 길었다) 태국이랑 싱가포르를 고민하던 중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있는 싱가포르로 결정한 것.
싱글일 시절부터 신혼여행은 멕시코의 로스카보스에 가고 싶었다. 로스카보스에 가려면 LA를 경유해야 하는데, 미국은 경유만으로도 백신 접종 3차까지 필수였다. 그렇게 날려 보낸 나의 로스카보스. 아마 결혼식이 3~4개월 늦었다면 싱가포르가 아닌 정말 로스카보스에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언제나 타이밍이 중요하다.
3년여 만에 다시 방문한 인천공항. 매번 혼자 오던 공항이었는데,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게 어색했다. 그것도 이제 내 남편이라는 사람과 함께 오니 더 어색했다. 하지만 어색함도 잠시, 탁 트인 공항의 천장과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설렘은 그대로였다. 아직 제약이 많은 하늘길이었기에 공항과 면세점은 붐비지 않았다. 새로 발급받은 여권 사이에 티켓을 끼우니 실감이 났다.
나 진짜 공항에 왔구나.
나 진짜 비행기를 타는구나.
이제 진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비행기에 탑승한 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비행기의 엔진소리, 조명, 불편한 좌석, 좁은 화장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싱가포르까지 비행시간은 약 6시간. 좁은 좌석에 몸을 구겨 넣어도 마냥 행복했다.
행복하다.
입 밖으로 행복을 연신 내뱉으며,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처럼 창밖을 내다보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오랜 시간 바라고 기다려온 순간이기에 우리는 아이처럼 표현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제 더 이상 20대의 나이가 아니었기에 구겨져 있던 6시간이 지나자, 무릎이 아팠지만, 문제 되지 않았다. 무릎이야 주무르면 그만인 것을.
입국장 문이 열리자마자 풍겨오는 싱가포르의 습도 높은 냄새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비가 내리고 있던 싱가포르, 호텔까지 전철로 이동하는 내내 풍겨오는 전철 역사 안의 냄새와 함께 비 오는 골목의 냄새가 정겹다. 날씨 예보를 보니 우리가 머무는 열흘 내내 비 소식이다.
설마 우기도 아닌데 열흘 내내 비가 오겠어?
밤새 내린 비가 다음 날 아침에 그쳤다.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수영장에서 수영한 뒤 가볍게 조식을 먹고 호텔을 나섰다. 코에 닿는 바람이 느껴지자, 마스크를 끼지 않고 청량한 햇살을 맞으며 골목골목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의 입 모양이 보이고, 대화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운다. 오래도록 꿈꿔온 일상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의 감정들이 한순간에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웠던 지난날이었다.
싱가포르의 첫날은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지구본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일렁거렸다.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입장권과 패스트트랙을 별도로 판매한다. 입장권은 말 그대로 입장티켓으로 놀이기구를 타는 것에 큰 제약은 없다. 패스트트랙은 모든 놀이기구를 기다림 없이 탈 수 있는 티켓이기 때문에 이 티켓이 있다면 빠른 시간 내에 많은 기구를 즐길 수 있다. 입장권과 맞먹는 금액의 패스트트랙. 더 이상 가난한 여행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패스트트랙도 함께 발권했다. 기다림 없이 놀이기구를 즐기며 돈의 맛을 보던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실내·외가 별도로 구분돼 있지 않아 급하게 몸을 피신하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비가 점점 더 거세지자, 우산을 꺼내 들고, 아기자기한 유니버셜 스튜디오 내부를 거닐었다. 비가 와도 좋았다. 우리가 간절히 바랐던 여행을 하는 중이니까.
열흘 동안 싱가포르 곳곳을 돌아다녔다. 사실 싱가포르는 열흘이나 머물 곳은 아니다. 땅덩어리가 좁은 탓에 호텔도 비싸고, 물가도 비싸기 때문에 3박 4일 정도 머물거나 경유지로 잠시 거쳐 가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사전 정보가 부족했고, 백신 때문에 선택지도 많지 않았기에 싱가포르에 열흘을 있었다.
물론 크게 할 건 없지만, 오랜만의 밟은 이국땅이라 좋았던 건지, 옆에 함께 하는 이가 있어서인지 모든 것이 마냥 좋았다. 열흘 내내 비가 계속 내린 것은 매우 아쉬웠지만.
매일 아침에는 화창한 싱가포르였다. 화창함을 보고 운동과 수영을 즐긴 뒤 밖을 나오면 어김없이 비가 쏟아졌다. 우기도 아닌데 한국의 장마처럼 세찬 비가 계속 내렸다. 매일 오전 10시~11시부터 시작된 비는 기가 막히게도 저녁 8시~9시에 그쳤다. 2~3일 정도 비가 내렸을 때는 '우리가 언제 또 싱가포르에서 비를 맞아보겠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바깥 활동이 한창인 시간에만 비가 내리니 나흘 차에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 진짜 비 계속 이렇게 올 건가!! 너무한 거 아니냐!!!"
하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어쩌지는 못하는 법, 우산을 들고 다니면서 낮에는 최대한 실내 위주로 돌아다녔고, 밤에 야경을 보러 나왔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싱가포르는 낮보다 밤이 더 예쁜 곳이었다. 적어도 우리의 기억 속에는 그렇다.
종종 SNS에서 보이는 파란 하늘의 싱가포르가 낯설다. 우리에게 단 하루도 파란 하늘을 보여주지 않았던 싱가포르. 그래서인지 맑은 싱가포르가 궁금하다. 눈도 못 뜰만큼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싱가포르는 어떨까? 딱 1박 2일만 다시 가보고 싶은 싱가포르. 훗날 발리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꼭 싱가포르를 경유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