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시대를 꿰뚫는 감정
감정의 힘을 믿는 영화, <117편의 러브레터>.
간혹 그런 영화들을 만나곤 한다. 인물의 내면을 영화에서 완벽하게 설명하지 않고, 감정적인 상황들을 정립된 논리로 납득시키지 않는데도 감정이 와 닿는 영화들을.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 속에서 감정이 태동하는 부조화의 경험들은 항상 인상 깊었다. 감정의 순수에 잠기는 경험, 그건 오롯이 영화의 이미지와 배우의 얼굴의 몫일 테다. 그런 지점에서, <117편의 러브레터>는 감정을 농밀하게 채워 관객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있는 영화다.
<117편의 러브레터>는 카메라에게 말을 건네는 여성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조금 연세가 있는 화자는 카메라를 향해 “넌 읽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며 편지 뭉텅이를 건넨다. 그러다가 영화가 흑백으로 전환되면서 영화의 제목이 뜨고, 여자는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미클로시’라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전쟁 통에도 살아남았지만,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가, 이번에는 여성이 본인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여성 또한 살아남았고 사라와 유디트란 친구와 함께였지만, 미클로시가 시한부를 받았듯 여성도 신장이 좋지 않아 건강이 매우 나빴다. 그 시점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촉발한 사건, 미클로시의 러브레터가 시작된다. 미클로시는 동향인 사람들, 그중에서도 자신처럼 재활 병원에 있는 여자들에게 러브레터를 보내며 자신과 같은 전쟁의 아픔, 육체의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들 안에서 사랑을 찾으려 한다. 누군가는 이 편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몇 명은 달랐다. 17명으로부터 답신이 도착했고, 미클로시는 그중 어떤 한 사람에게 강한 확신을 느끼게 된다. 그 사람은 ‘릴리’, 앞서 현재에서 카메라와 대화하던 그 여성이다.
이 지점부터 영화는 미클로시와 릴리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사이에서 둘의 사랑을 갈라놓는 것들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둘 사이에 간극을 만든다. 먼저 물리적인 거리를 벌려둔 상태에서 의사를 통해 둘의 만남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화가 있지만, 영화는 둘에게 전화를 잘 건네주질 않으며 편지로 둘의 감정을 커지도록 한다. 심지어 둘을 유일하게 연결하는 수단인 편지마저 친구 릴리의 친구 ‘유디트’에 의해 지속적으로 사라지고, 훼손당한다.
미클로시와 릴리를 비롯하여 두 인물 주변의 친구들은 전부 육체적인 질병이나 결함이 있다. 영화는 전쟁, 그리고 홀로코스트가 초래한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미클로시의 친구 중 해리는 실제 여성을 상대로 성 기능에 문제가 생겼으며, 리츠만은 이따금 피를 토한다. 릴리의 친구 사라는 심한 수전증에 시달린다.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와 문제들은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이다. 유일하게 그로부터 벗어난 예외가 바로 유디트인데, 대신 유디트는 깊은 우울을 앓고 있다. <117편의 러브레터>는 이런 유디트를 통해 아픔의 범주를 정신적인 층위까지 확장한다. 유디트의 우울은 끊임없이 미클로시를 의심하고, 릴리를 미클로시로부터 떼어놓으려 한다.
이렇게 영화는 유대인들의 아픔을 보여주지만, 또 거기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미클로시와 릴리는 결국 만나게 되는데, 릴리는 미클로시에게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가진 불안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한다는 속마음을 전한다. 자신을 입양하려는 기독교인 가정에서 얻는 평안함을 함께 이야기하며, 미클로시에게 함께 개종 후 결혼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미클로시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처럼 영화는 단순히 유대인들의 공통적이고 평면적인 아픔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개개인을 비추며 사려 깊게 위로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이 개종 후에 가질 죄책감을 걱정하듯 변칙적인 한 인물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해버린다. 바로 유명한 랍비, ‘크론하임’을 통해. 처음에 그는 유디트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미클로시와 릴리의 사이를 방해하려는 인물처럼 등장한다. 심지어 유대인 동포들의 아픔을 들먹이며 릴리의 개종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지만, 결국 개종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둘의 결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다소 동화적이지만, 영화가 미클로시와 릴리를 얼마나 사려 깊게 위로하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둘의 사랑은 논리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미클로시는 편지만으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고 사랑에 빠졌으며, 릴리도 미클로시의 문체만으로 그를 확신한다. 심지어 릴리는 후에 미클로시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서도 그와 결혼을 다짐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사려 깊게 담은 카메라, 그리고 그 불투명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얼굴에 녹여내는 두 배우 덕분에 영화는 그 감정들을 오롯이 전달하는 데에 성공한다. 특히 두 인물 사이에 영화가 자아내는 물리적, 심리적 간극은 그 감정의 진폭을 크게 만들며 관객이 빠져들도록 한다.
미클로시와 릴리는 결국 부부가 되어, 그들이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6개월 시한부 판정이 무색하게 기적같이 미클로시의 병이 나아 52년 동안 함께 살았으며, 너를 낳았다는 현재 시점의 릴리의 나레이션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는 현재의 릴리를 비추면서, 카메라에게 이야기하는 릴리를 컬러로 담으면서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는 그 끝에서 감독 부모님의 사진과 함께 “나의 부모님께 드립니다”라는 문구로 마무리된다, 흑백으로. 시점 숏을 통해 자식의 시점 그리고 컬러로 영화를 시작했지만, 그 끝은 부모의 가장 찬란한 흑백 사진으로 마무리된다.
<117편의 러브레터>의 원제목은 ‘새벽의 열기’로, 릴리와 결혼하기 전까지 앓던 미클로시의 원인 불명 증상을 뜻한다. 영화는 제목을 통해 그때의 아픔은 아직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증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리고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이 영화에는 사랑으로 한 개인을,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수한 믿음을 관객에게 설득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런 순수가, <117편의 러브레터>를 아름답게 만든다. 감정과 인간의 순수함을 믿는 순진한 영화가 줄어드는 요즘, 가뭄에 단비처럼 찾아온 아름다운 영화다.
※ 배급사 알토미디어(주)로부터 제공 받은 스크리너를 통해 개봉 전 관람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