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에서 청산도 가는 배를 탄다.
배는 느리고 큰 만큼 더디 간다. 50분 남짓, 배를 타면 청산도가 보인다. 사실 청산도는 슬로시티로 유명한 동네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이들도 걸기 위해 오는 경우가 많고, 청산도 마을을 잇는 길 이름도 아예 슬로길이다. 총 11개 코스에 전체 길이만 해도 42㎞라니 대단하기는 하다.
확실히 걷다 보면 주변이 더 잘 보이고 안 보이던 것들도 더 눈에 들어온다. 느리게 걷기의 힘이다. 걷기의 또 다른 매력은 주변 경치를 보면서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자신과의 대화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이런 시간의 가치는 헤아리기 힘들다. 특히,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푹 빠져 주변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삶의 동력을 상실한 이들에게 땀 흘리며 걷는 매력은 색다르다.
봄이라면 유채, 가을이면 코스모스로 뒤덮이는 청산도를 느긋하게 걷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청산도의 매력은 유채꽃 피는 봄에 빛을 발하지만 여름철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항구에서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영화 <서편제>의 촬영 현장이자 <봄의 왈츠> 세트장이다. 당리마을 초입을 넘어 판소리 ‘진도 아리랑’이 들리는 길을 따라가면 어느덧 <서편제> 영화 촬영지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사부작사부작 걸으면 <봄의 왈츠> 세트장이 있다. 2006년에 만들었다는 제작 세트는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여전히 매력적이다. 더 매력적인 것은 거기서 바라보는 앞바다 전경이다. 그냥 보고 있어도 저절로 시가 나온다.
청산도의 명소로 범바위(슬로길 5코스)를 빼놓을 수 없다. 주차장까지만 가면 길도 평탄해서 전망대까지 오르기 쉽다. 비록 범바위에 직접 올라갈 수는 없지만, 좋은 기운을 받고 눈도 호강하니 이만하면 오를 가치가 충분하다. 범바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인근의 섬 풍경은 여행자의 막힌 가슴을 뚫어준다. 전망대를 지나 새끼 범바위로 올라가면 또 다른 풍광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범바위에서 장기미 해변으로 가다 보면 청산도의 명물인 구들장 논이 나온다. 한국에서 계단식 논을 보기란 쉽지 않다. 우리에게는 산골짜기 비탈진 곳에 있는 다랑이논으로 더 익숙하다. 구들장 논의 명칭은 논바닥에 돌을 구들처럼 깔고 흙을 부어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베트남 사파에서도 계단식 논을 보기는 했지만 다시 보니 또 새롭다. 아마 청산도의 구들장 논도 자투리 땅을 이용해야 했던 섬이라는 지리적인 특수성 때문에 발달했을 것이다.
사철 풍경이 풍요롭고 넉넉한 청산도는 차로 섬 전체를 돌 수도 있다. 청산도에서 차를 운전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완도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만약 차를 가지고 청산도를 다니는 이라면 좁은 길도 그렇지만 막다른 길에서 낭패를 볼 수 있다. 특히, 범바위에서 나와 장기미 해변으로 가는 길은 막다른 길이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런 소소한 배려가 아쉽다. 표지판에 사전 안내를 해주었더라면 땀을 흘리며 차를 돌려 나오는 번거로움은 피했을 것이다. 초보 운전자라면 외진 길에서 다른 차를 만났을 때나 막다른 길에서 차를 돌릴 수 없어서 진땀을 흘릴 수도 있다.
내친김에 차를 몰아 해변을 달리다 보면 상서마을 돌담길이 나온다. 2014년 국립공원 최고 명품마을로 지정되
었다는 바로 그 마을이다. 밭을 일구며 나온 돌로 쌓았음직한 돌담이 푸근한 마을 정경과 어우러져 새로운 풍미를 제공한다. 돌담길로만 따진다면 청산도 근처의 여서도도 빼놓을 수 없다.
담쟁이가 어우러진 돌담길은 쌓은 이의 정성만큼이나 사랑스럽다. 이런 돌담길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마을의 정겨운 옛 돌담이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스쳐 가는 여행자의 지나친 욕심이다. 비록 청산도를 순회하는 셔틀버스가 있기는 하지만 군데군데 구경을 하다 보면 다니기에 약간은 불편하다. 좀 더 자유로운 여행을 원한다면 택시투어를 할 수도 있다. 내가 만났던 팀은 경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청산도 가는 배 안에서 우연히 만나 택시투어를 함께 다닌다고 했다. 하기는 걷기를 작정하고 오지 않은 바에야 걸어서 섬을 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