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그리고 사회생활에서도 무수히 많은 글쓰기를 한다. 그중에는 숙제로 부여되었던 일기나 독후 감상문의 형태도 있다. 때로 서술 형태의 주관식 시험도 있고, 공문서나 보도자료와 같은 실용문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비망록이나 연애편지 등도 다양한 글쓰기에 해당한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마칠 때까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백 장, 어떤 경우는 몇천 장 정도는 쓰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여전히 글쓰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글쓰기 강의 중에 외국인 학생을 포함해서 몇만 명 이상을 만나보았지만 글쓰기를 떠올리면 설레거나 가슴이 뛴다라는 고백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글쓰기를 피곤하고 짜증 나는 작업이라는 생각하는 이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어찌 보면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토록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수업을 받고 실행에 옮겼음에도 글쓰기가 고통스러운 체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원래 글쓰기가 힘들다거나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좋아질 거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학창 시절로 돌아가 보자!
학교 다니는 내내 그렇게 많은 글을 써서 제출했지만 그 글에 대한 피드백은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당신은 평생을 살면서 어린 시절 일기의 맨 아래쪽에 선생님이 몇 줄 써주시던 덕담 수준의 피드백 말고 진정한 의미의 글쓰기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물론 그런 류의 격려도 소중하기는 하다. 우연히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칭찬 한 마디에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교사의 말 한마디는 일반인과 비중면에서 견줄 수 없는 무게가 있다.
그렇다면 혹시 어떤 문장 습관이 있고, 쓴 글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꼼꼼하게 점검받아본 기억이 있는가. 단언컨대 아마 없을 것이다. 제대로 된 피드백을 써주는 일은 담당자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일이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우리는 피드백의 주체로 교사를 떠올리지만, 학교 현장에서 수업 준비와 행정 업무까지 책임져야 하는 교사가 전적으로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글쓰기에서 피드백이 이루어지지 않는 또 다른 비밀은 피드백의 실질적인 주체라 할 수 있는 선생님에게 있다. 어쩌면 이 말은 대한민국의 교사들이 들으면 싫어하고, 또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용일 수 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초중고등학교만이 아니라 대학교까지 영역을 확장해서 볼 때 맞춤법, 띄어쓰기를 포함해서 학생의 문장을 제대로 보아줄 수 있는 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교사를 비하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글이 결코 아니다. 이는 상상으로 지어내는 이야기도 아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이 가운데 교사가 있다면 어느 정도 수긍할 것이다. 나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상황은 엄연히 우리의 현실이다.
그중 하나는 우리 국민의 생활습관과 언어습관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치밀하고 엄격하게 말하는 대신에 두리뭉실하게 말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예를 들면, ‘대충’, ‘대개’, ‘알아서’ 등을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흔히 사용하던가. 이는 숫자를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두세 개, 서너 개, 대여섯 개 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시간 개념도 비슷하다. 이러한 언어습관은 일반인이 ‘다르다’와 ‘틀렸다’를 구분하지 못하고 쓰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등산을 하다가 앞으로 목적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해졌다고 하자. 내려오던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어떤 답이 나올 것인가? 그 답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 대부분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길을 물어보는 이유는 정확한 정보보다는 심리적인 안정을 얻기 위한 목적이 크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나라에서는 말을 정확하게 쓰지 않아도 소통하는 데는 지장이 별로 없다.
전라도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거시기’라는 단어가 있다. ‘거시기’라는 단어는 사용하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단어이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둘이 하는 이야기의 의미를 짐작조차 못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문제가 없다. 그들 사이에 수많은 거시기가 오고 가더라도 둘의 대화에는 지장이 없는 신기한 일이 생긴다. 게다가 이때 등장하는 거시기는 하나의 사물이나 대상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때 억양이나 강세만으로도 상대방의 발화 의미를 알아차리는 신공이 발휘된다. 전라도에서 ‘거시기’라는 단어 하나로 수많은 이야기가 가능한 이유이다.
오죽하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라는 속담이 나왔겠는가. 생략이 많은 우리말의 특징도 이러한 대화방식이 살아남는 데 일조했다. 우리는 대화 가운데 전체 문장을 말하지 않고, 단어만으로도 질의응답이 충분히 이루어진다. 만약 생략된 부분이 있더라도 상상력으로 채우면 그만이다. 궁금하면 다시 물어보면 그뿐이지만 구태여 다시 물어보는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확인하는 대신에 자신의 판단으로 지레짐작하고 넘어갈 뿐이다. 두리뭉실하게 이야기를 하는 습관은 소통과 운신의 폭을 넓히는 대신 정확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정확한 표현에 서툰 결과를 낳았다.
다른 요인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이다. 우리나라의 교대와 사대에서 배우는 교육과정에서 제대로 된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 각 교육에서 필수와 선택으로 수강해야 하는 교과목만으로도 학사일정을 소화하기에 버겁다. 이는 글쓰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국어교육과라 할지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법의 기본 토대를 배우는 교과목에서조차 왜 이런 형태의 문법이 필요하고, 그 작동 원리에 대해 상세히 배우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안다면 놀랄 것이다.
상황이 이런 형편이니 교사가 학생들의 문장에서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떻게 대안책을 제시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응이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자신이 특별한 의지가 있어서 연수를 신청하거나 공부를 한다면 몰라도 현행 교대나 사대의 교육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만으로는 학생들의 글쓰기를 제대로 봐주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게 냉혹한 현실이다.
다행히도 우리나라 교육제도에서는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장치가 있기는 하다. 바로 교사 연수이다. 아쉽게도 여기에도 허점이 있다. 만약 글쓰기와 관련한 연수를 신청해서 받는다고 해도 자신이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잘할 수 있는가를 배울 뿐이다. 학생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의 문장을 보고, 수정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훈련을 다루는 연수는 그리 많지 않다.
글쓰기는 단순히 글 쓰는 기술이나 요령을 배우는 과정이 아니다. 물론 실용적인 면에서는 그런 부분도 필요하다. 글쓰기는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작업이다. 글쓰기에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내 이야기이다.
앞에서 교사의 피드백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처럼 기술적인 부분은 정확한 표현력을 키우는 데 유효할 뿐이다.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부족한 부분은 시간을 들여서 채우면 된다. 그런 점에서 교사의 피드백은 학생의 글쓰기의 전체 방향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상대방의 조언이나 교사의 피드백은 경직된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여행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물건을 도난당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여행의 전부는 아니다. 당시에는 지독히 고생을 하더라도 오히려 좋은 추억을 만날 수 있는 게 여행의 묘미이다. 우리가 글쓰기를 하는 목적은 작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정답이나 해답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글쓰기에도 성공과 실패가 공존한다. 다 쓰고 난 후에도 마음에 드는 글이 있고 어떤 글은 쓰고 나서도 마음에 영 들지 않는 날도 있다.
글쓰기는 우리가 서툴지만 묵묵히 견디며 살고 있듯이, 글을 동반자 삼아 자신만의 길을 만나는 일이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건투를 빈다!